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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아이의 글밭/시와 동시

그 분의 전화번호를 지우며 그 분의 전화번호를 지우며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내 휴대폰에 입력되어 있던 그 분의 전화번호 064-721-16○○ 01○-820-16○○ 이제 그 분의 전화번호를 지운다. “전화번호가 삭제되었습니다.” 버튼 한 번 누름으로 내 곁을 떠나는 번호들 내 기억 속에서는 그 분의 이름만이 남을 것이다. 그 분이 떠나시기 전 난 그 분께 몇 번이나 전화를 드렸던가 휴대폰 속에 저장만 해 놓고 쓸모 없이 공간만 차지하고 있던 숫자들 그나마도 그 분이 가셨다고 아주 지우려 한다. 생전에 병실에서 뵀던 그 분의 모습 암 투병 중에서도 고통을 참으시며 내 손을 꼭 잡으시고 당부하시던 말씀 “펜을 놓지 말아. 좋은 글 많이 써.” 휴대폰 속의 숫자들은 지워버려도 그 말씀만은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하기에 시를 쓴다. 그 .. 더보기
숲 그늘 사이로 스며드는 빛 숲 그늘 사이로 스며드는 빛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짙은 숲 그늘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눈부심이다 신비로움이다 벌판에서는 빛 속에 서 있어도 빛이 보이지 않는다. 산 속 깊은 숲을 뚫고 올라 정상에 서면 빛이 기다리고 있다 하늘 푸름을 한데 모아 짜고 구름 흰 빛깔만을 골라 모아 돋보기 마냥 나무 틈새로 보낸다 그래서 나뭇잎은 색깔이 더 곱다 그래서 그 빛은 가슴 깊은 속까지 스며들어 온다. 더보기
9월 첫날 9월 첫날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여름방학 끝나고 학교에 나오는 날 뚱뚱한 기현이 이마에 송글송글 굵은 땀방울이 흐른다 “가을이 됐는데도 왜 이렇게 더워?” 투덜거리며 그늘을 찾는 아이들 뜨거운 햇볕이 아이들을 따라가며 그늘을 밀어 버린다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바람을 일으켜 보지만 바람도 숲 그늘에 숨어 더위를 식히는지 아이들이 불러도 오지 않는다. 더보기
여름 땡볕 아래 여름 땡볕 아래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여름 해가 하늘 가운데 한참 멈춰 서 있다.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않는다 바람이 불어 서쪽 산 속으로 해를 밀고 가버리면 좋겠는데 어디 갔는지 바람은 소식이 없다 땡볕 아래 누렁이가 혀를 빼물고 축축 구멍가게 아저씨도 힘겹게 부채 흔들며 축축 아하 저기 돌담 위 호박 줄기만이 잎을 활짝 펼치고 있구나 여름 땡볕 아래 호박이 누렇게 익어간다. 더보기
허리 굽혀 산에 오르기 허리 굽혀 산에 오르기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산에 오르는 사람은 허리를 굽혀야 한다 꼿꼿이 허리 세워 오르려 하면 산은 큰 호통으로 쫓아 보낸다 허리 굽혀 고개 들어 산을 우러러 보며 한 발씩 한 발씩 조심스레 올라야 한다 발에 밟히는 들꽃에도 스틱에 채이는 들풀에도 사뭇 미안해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야 한다 산은 오르는 사람에게 겸손하라 한다 허리 굽혀 산에 오르면 그게 바로 산에게 겸손을 배우는 거다. 더보기
능선 따라 나비 한 마리 능선 따라 나비 한 마리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정물오름 오르는 능선으로 노랑나비 한 마리 앞서 오르고 있다. 내가 오름 오르는 것은 오름 꼭대기 거기에 시원한 바람이 날 기다리고 있어서이고 들판도 바다도 모두 가슴으로 들어와 안기기 때문이지 노랑나비 네가 오름에 오르는 까닭은 엉겅퀴, 꽃향유, 개민들레가 능선따라 향기를 날리기 때문이지 노랑나비야, 우리 동행하자 나도 오름길 혼자 오르고 너도 홀로 힘든 날갯짓하고 있잖니. ※ 정물오름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있는 오름 더보기
양로원 할머니 양로원 할머니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성아무개 양로원 할머니들이 현관 의자에 앉아 무료하게 졸고 있다. 더위를 쫓느라 무심하게 흔드는 부채질 기다려도 올 아무도 없는데 줄곳 현관에 앉아 졸린 눈 가끔 뜨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 마당 한 켠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가 할머니들을 보고 있다 저 할머니들도 전엔 아기를 안은 마리아였고 아기를 안고 저렇게 웃던 시절이 있었음인데 할머니들 품에 안겨 있던 아기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할머니들 주름살이 저리 깊은 것을 이젠 커버린 아기들이 알기는 할까? 마리아가 웃고 있다 아기 예수가 방긋 웃고 있다 작은 손 내밀어 부르고 있다 “주름살 깊은 이는 내게로 오라 꼬부랑 허리를 가지고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더보기
파도 파도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그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달려와 부딪쳐 부서진다. 사랑이 미움이 되어 부서진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그를 나는 온 몸으로 받아 안는다. 미움을 부서뜨려 흩어버리고 다시 잔잔한 사랑을 만들어 보낸다. 더보기
거울 앞에서 거울 앞에서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거울 앞에 서면 거기 보이는 또 다른 나 내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내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내가 내게 손짓하며 걸어간다. 더보기
빈 둥지 빈 둥지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어미 새가 알을 품다 날아간 빈 둥지 껍질 깨고 나온 아기 새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떠난 빈 둥지에 아직도 따스함이 남아 있다 아기 새들이 도란도란 얘기 날개 펴고 감싸주던 어미 새의 따스한 깃털 하나도 둥지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장맛비도 스며들고 여름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가는 곳 빈 둥지는 기다린다 떠난 아기 새가 어미가 되어 찾아와 알을 품는 날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