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산딸기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할머니, 오늘도 산딸기를 따 오시는군요.”
“으응, 뱅수 에미하고 성칠이 에미구만. 이거 우리 길용이 주려고 따 왔지. 우리 길용이가 산딸기를 참 좋아 하거덩.”
팽나무집 할머니가 등에 진 바구니를 앞으로 돌리며 쭈욱 허리를 폈습니다.
할머니가 내미는 바구니 속에는 누런 인동꽃이 가득 담겨 있었고, 산딸기를 싸서 묶은 모시잎이 인동꽃 위에 곱게 놓여 있었습니다.
“아휴, 할머니. 참 많이도 따셨네. 어디 봐요.”
성칠이 엄마가 시장 바구니를 내려 놓고는 모시잎을 풀어헤쳤습니다. 푸른 모시잎 속에는 토끼 눈같은 빠알간 산딸기들이 또록또록 빛나고 있었습니다.
“참 잘 익었네요. 빠알갛게 빛나는 게 입에 넣으면 살살 녹을 것 같네요.”
병수 엄마가 이렇게 말하면서 얼른 한 움큼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안돼, 안돼. 우리 길용이 오면 줄건데 자네들이 먹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할머니는 급히 손을 저어 막으면서 산딸기를 다시 모시잎으로 싸서는 인동꽃을 헤치고 바구니 깊숙히 숨겼습니다.
“길용이가 그 먼데서 언제 온다고 그 때까지 놔둬요? 이리 주세요. 썩어 내버릴 건데 우리 성칠이나 갖다 주게요.”
성칠이 엄마가 인동꽃을 헤집으려고 하자, 할머니는 몸을 웅크려 바구니를 가슴으로 싸안았습니다.
“우리 길용이는 꼭 돌아와. 이제라도 집에 돌아가 있으면 ‘어머니!’ 하고 부르며 돌아올 거여.”
병수 엄마와 성칠이 엄마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할머니, 미국이 얼마나 먼지 아세요?”
“아, 멀면 얼마나 멀까, 서울보다 조금 더 멀겠지.”
병수 엄마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때리며 소리질렀습니다.
“아이고, 할머니. 미국은요, 배를 타고 저어쪽 바다를 건너서 며칠을 가야 돼요.”
성칠이 엄마도 덩달아 말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도 계속 날아서 여러 시간을 가야 되는 먼 곳이예요.”
“며칠이면 어떻고, 몇 시간이면 어떠냐? 우리 길용이 돌아오는 데는 그런거 하나도 상관 없어.”
“그래요, 그래. 할머니, 어서 가셔서 아들 맞을 준비를 하세요.”
“오냐, 내 먼저 가마. 천천히들 오너라. 뱅수하고 성칠이 딸기 따다 주고 싶거들랑 학바위 근방에 가 봐라. 거기 딸기가 많이 열렸더라.”
할머니는 인동꽃 바구니를 메고 등을 돌렸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는 팽나무집 할머니의 등은 사뭇 굽어 있었고, 걸음걸이도 흔들거려서 늙은 나이를 더욱 섧게 보이게 했습니다.
병수 엄마의 눈에는 인동꽃 바구니가 할머니의 몸에는 너무 무거운 것 같아 보였습니다.
성칠이 엄마의 눈에는 인동꽃 바구니 보다 할머니의 몸이 더욱 작아 보였습니다.
“에그, 쯧쯧.”
“에그, 쯧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혀를 찼습니다.
“돌아오지도 않을 아들을 기다리며 딸기를 따두면 뭘 한담. 다 썩어버리고 말 걸.”
병수 엄마가 중얼거리며 시장 바구니를 챙겨 들고 팽나무집 할머니의 뒤를 저만치서 천천히 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철 따라 산딸기, 머루, 다래, 으름을 따놓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썩어버리지 않는 것이 없거든.”
성칠이 엄마도 시장 바구니를 챙겨들고 병수 엄마 옆을 나란히 걸었습니다.
“돌아오지도 않을 아들을 저렇게 기다리다가 병이나 나지 않을는지.”
“똑똑한 자식 두어 봐야 다 소용 없는 일이야.”
“암암, 우리 병수같이 평범하게 자랐어도 이렇게 고향에서 부모 모시고 사니 얼마나 좋은가?”
“그렇고 말고. 병수 엄마 말이 맞어.”
“그나 저나 길용이가 어렸을 때 우린 얼마나 저 할멈을 부러워 했었나.”
“음, 음, 그랬지. 늙으막에 얻은 외아들 길용이가 학교에서 늘 1 등만 한다고 온 동네가 팽나무집을 부러워 했었지.”
“길용이가 미국에 가서 박사를 땄을 때는 이웃 고장에 까지 소문이 쩌렁 쩌렁 울렸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걸어오는 동안 어느새 팽나무집 앞까지 왔습니다.
병수 엄마는 대문 옆에 솟아 있는 팽나무를 쳐다보았습니다. 굵은 곁가지 하나가 이젠 삭정이가 되어 곧 부러져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 땐 이 팽나무가 그렇게 크게 보이더니만 이젠 별로 크게 보이지 않는 것이 참 이상한 일이지.”
“병수 엄마도 그렇게 느끼는가? 나도 그래.”
성칠이 엄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팽나무를 쳐다보았습니다. 둥치에서 처음 가지가 세 갈래로 갈려나간 부분이 썩어서 패이고 이끼가 끼어 있었습니다.
“낳고 키워준 지 에미를 혼자 두고 저 혼자 잘 살겠다고 이민 가버린 길용이가 나쁜 녀석이지.”
“길용이 보다는 길용이 처가 더 나빠. 미국에 까지 가서 공부했으면 그 만큼 더 배웠을 텐데, 시어머니 모시기 싫다는 거 하며, 시에미는 이 시골 구석에 처박아 두고 친정 부모하고만 같이 멀리 떠나 살고 있으니 천벌을 받을…….”
갑자기 성칠이 엄마는 찔끔하고 입을 닫았습니다. 팽나무집 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누가 천벌을 받아?”
할머니의 주름진 눈에 칼이 서 있었습니다.
“아, 아, 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했어요. 병수 엄마, 어, 어서 가, 갑시다.”
성칠이 엄마의 말이 갑자기 더듬거렸습니다.
“그럽시다. 안녕히 계세요.”
할머니는 종종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병수 엄마와 성칠이 엄마의 뒤에다 대고 삿대질 했습니다.
“남의 자식 욕하며 천벌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되려 천벌을 받을 것이여-.”
대문을 닫고 들어와 인동꽃을 널면서 할머니는 자꾸 대문으로만 눈이 갔습니다. “어머니!” 하고 부르며 길용이가 대문을 열고 들어와 품 안으로 뛰어들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대문은 닫힌채 그대로이고 팽나무 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이 쏴아 하고 들렸습니다.
할머니는 치마 끝으로 눈을 한 번 쓰윽 닦고는 다시 인동꽃을 널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학바위 근처로 인동꽃을 따러 갔습니다.
인동꽃을 따서 말리면 한약재로 팔 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비록 적은 돈이지만 할머니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할머니는 바구니를 메고 학바위 근처로 갔습니다.
바구니 하나 가득 인동꽃을 따서 담았더니 해가 하늘 가운데 쯤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시원한 소나무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었습니다.
소나무 가지를 휘감아 돌아 불어오는 바람은 초록빛 바람이었습니다. 햇볕에 달구어진 뜨거운 바람도 소나무 가지에 잠시 머물거나 휘익 지나가기만 하면 금세 초록빛으로 변하여 시원해지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초록빛 바람을 가슴에 받으며 소나무 그늘에 누웠습니다.
할머니가 누워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산딸기 나무가 보였지만, 동네 아이들이 올라와 다 따갔는지 산딸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좀 더 깊이 학바위 뒤로 돌아가 봐야겠는 걸.”
할머니는 누운 채 중얼거리며 소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솔잎이 뭉텅이 뭉텅이 돋은 사이 사이로 파아란 하늘이 언듯언듯 흔들리며 빛과 그림자가 한데 어울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길용이 얼굴 같은 구름이 소나무 위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길용아, 에미 곁으로 빨리 돌아오너라. 뱅수 에미도 성칠이 에미도 네 욕을 하면서 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이 에미는 네가 꼭 에미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단다.”
마치 길용이가 옆에 있기라도 한듯 중얼거리는 할머니의 눈에 솔잎 뭉텅이가 점점 희미해지고, 그 사이로 들어오던 하늘빛이 점점 둥그래지면서 길용이 얼굴 같은 구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어디선가 어머니를 부르는 길용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건 길용이 얼굴을 닮은 구름일 뿐이지, 구름이 길용이는 아니여. 길용이를 생각한 나머지 내가 잘못 들었지.’
할머니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대로 누워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가까이 다가오던 길용이 얼굴 같은 구름이 다시 멀어지더니 솔잎 뭉텅이 위로 올라가서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길용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어머니! 길용이가 돌아왔습니다.”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레둘레 살펴보았습니다.
“이건 틀림없이 우리 길용이 목소리인데…….”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풀잎을 흔들며 바람이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내 머리가 이상해 진 게지.”
고개를 살레살레 젓는 할머니의 얼굴에 슬픔의 골이 깊이 패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골짜기에 기쁨이 홍수처럼 넘쳐 흘렀습니다.
산 아래 마을 쪽에서 길용이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길용아, 틀림없는 우리 길용이로구나.”
할머니는 굽은 허리에서도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아오르는지 소녀처럼 사뿐사뿐히 길용이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예, 어머니. 길용이가 이제 돌아왔습니다.”
할머니는 길용이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왜 이제야 돌아왔느냐? 얼마나 애타게 너를 기다렸는데, 응.”
할머니는 길용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눈물샘을 한꺼번에 터뜨려 아들의 가슴에다 쏟아부었습니다.
“어디 보자, 우리 길용이.”
길용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바라보던 할머니는 길용이의 얼굴에서 얼른 손을 떼었습니다. 길용이의 얼굴은 표정이 하나도 없는 차가운 마네킹 같았습니다.
“아니, 넌 왜 웃지도 울지도 않느냐? 에미 곁에 돌아온 것이 기쁘지 않으냐?”
“미국에서 기계하고만 살다 보니 기쁨이나 슬픔 같은 것이 제게서 점점 사라져 버렸어요. 눈물을 흘려본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지요. 기계는 감정이나 눈물이 없으니까요.”
기계처럼 감정 없이 딱딱하게 말하는 길용이가 할머니에게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분명히 아들인데도 말입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기쁘기만 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들이 이제 돌아왔으니까요.
“길용아, 이젠 에미 곁에서 함께 살 거지?”
“아닙니다. 돌아가야만 합니다. 기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할머니는 가슴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겨울날 한데 두어 차가워진 쇳덩이를 가슴에 대는 것 처럼 움찔해졌습니다.
“길용아, 그럼 넌 이 에미보다도 기계가 더 좋단 말이냐?”
“어머니가 좋은지 기계가 좋은지 그런 건 모릅니다.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도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계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엔 제가 기계들을 다스렸지만 언제부턴지 기계들이 저를 다스리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기계가 명령합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미국으로 돌아오라고요.”
길용이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여있었습니다.
“싫다. 난 미국에 안 간다. 이 좋은 고향 땅을 어찌 두고 간단 말이냐? 나마저 가 버리면 네 아버지 산소는 누가 돌본단 말이냐?”
“어머니, 그래도 미국으로 가야 합니다. 기계가 명령합니다.”
길용이의 차가운 손이 할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얼음같은 차가움이 할머니의 손에서 부터 핏줄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져 가슴이 얼어붙는 듯 했습니다.
“안 간다. 안 가! 기계하고 어떻게 같이 살란 말이냐?”
할머니는 길용이의 손을 홱 뿌리치고 돌아서서 학바위 쪽으로 뛰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왠 일인지 잘 뛸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전 길용이를 향해서 뛰어갈 때는 소녀같이 사뿐사뿐 잘도 뛰었는데,이젠 다리도 휘청거리고 허리도 더욱 구부러져서 펼 수가 없었습니다.
“안 간다. 안 가!”
할머니는 허우적거리면서 외쳤습니다.
“엄마, 엄마, 왜 그래요?”
할머니의 옷자락을 뒤에서 잡아당기며 길용이가 불렀습니다.
지금 부르는 길용이의 목소리는 차가운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쇳소리가 섞여있지도 않았습니다.
허우적거리던 할머니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어린 길용이가 까만 눈동자를 또록또록 굴리며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얼어붙을 것 같던 할머니의 가슴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훈훈해지고 있었습니다.
둘레를 살펴 보았지만 조금 전까지 있던 차가운 손의 큰 길용이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 엄마, 왜 그래요?”
어린 길용이가 할머니에게로 다가오며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멈칫멈칫 뒤로 물러났습니다.
“너도 날 미국으로 데려가려고 왔느냐? 난 미국에는 절대 안 간다. 내 고향에서 살다가 네 아버지 곁에 묻혀야지.”
길용이가 할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핏줄을 타고 솔솔 심장으로 밀려 올라왔습니다.
“엄마,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미국이 어디야?”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오 하고 긴 숨을 뱉었습니다.
지금 할머니 앞에 있는 길용이는 분명히 어린 시절의 길용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조금 전 어른이 된 길용이의 차갑고 냉랭한 마네킹 같은 모습은 그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린 길용이를 와락 껴안고 통통한 볼을 비볐습니다.
“길용아, 난 어린 네가 좋아. 차가운 기계같은 큰 너는 싫어.”
“엄마, 어린 나는 뭐고, 큰 나는 뭐야? 길용이는 하나 뿐이잖아.”
“그래, 그래. 엄마한테는 우리 길용이 하나 뿐이지. 길용아, 아무데도 안가고 엄마 곁에 꼭 있을 거지?”
“응, 아무데도 안 가. 난 엄마 아들인 걸.”
“미국에도 안 갈 거지?”
“엄마, 미국이 어디야? 멀어?”
“서울보다 조금 더 먼 곳.”
“나 미국에 가 보고 싶어.”
“안 돼, 안 돼. 미국에 가면 차가운 기계같은 큰 길용이가 되어 버린단 말야. 미국에는 절대 가지 마아.”
“그래, 그래. 난 아무 데도 안 가고 엄마하고만 같이 살 거야.”
어리광 부리며 말하는 어린 길용이의 눈망울은 또랑또랑한 까만 빛이었습니다. 그 까만 눈망울에 하늘이 온통 담겨 있었습니다.
“엄마, 이거 봐. 딸기 다 먹었어. 또 따 줘.”
길용이가 보리짚으로 만든 작은 딸기 바구니를 내밀었습니다.
“그래, 그래. 많이 따 줄께. 여기 잠깐 앉아 기다리고 있거라.”
할머니는 보리짚 바구니를 받아들고 딸기를 따러 갔습니다.
“우리 길용이, 산딸기 많이 따 줄께, 미국에 가지 말고 엄마하고 같이 살자. 우리 길용이, 산딸기 많이 따 줄께, 미국에 가지 말고 엄마하고 같이 살자.”
할머니는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보리짚 바구니에 산딸기를 따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산딸기가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길용이가 앉아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길용아, 딸기 따 왔다.”
“…….”
길용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용아, 어디 있니?”
할머니는 길용이를 부르며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학바위 근처 풀밭 위로 길용이가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길용아, 어디 가니?”
“엄마, 나 미국에 가요.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올께요.”
길용이는 멈추지 않고 손을 흔들면서 계속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서 점점 멀어질 수록 길용이의 모습은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아주 멀어져서 희미해질 때 쯤에는 먼젓번의 큰 길용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길용아, 가지 마라. 돌아와. 길용아, 네가 좋아하는 딸기를 따 왔다. 돌아 와라.”
할머니는 길용이가 간 쪽을 향해서 뛰어갔습니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길용아, 돌아오너라. 길용아, 빨리 돌아오너라.”
할머니는 소리지르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늘 중간 쯤에 걸려 있었던 해가 어느새 훨씬 서쪽으로 옮겨가서 걸려 있었고, 할머니가 누워있던 곳의 소나무 그늘은 동쪽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맺혀 있었고 불이 붙은 듯 홧홧 열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늘이 옮겨가서 햇볕의 뜨거운 기운이 할머니의 몸을 계속 쏘아대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는 멍하니 학바위를 바라보았습니다. 햇빛을 받은 학바위가 할머니의 이마처럼 활활 불타오르며 곧 날아오르려는 듯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인동꽃 바구니를 메고 비틀거리며 학바위를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어떻게 학바위 까지 왔는지 모릅니다. 할머니는 학바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3 층 빌딩의 높이 만큼한 학바위의 중간 쯤에 산딸기 나무가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할머니가 땄던 어느 산딸기 보다도 알이 굵고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할머니는 학바위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가 올라가기엔 힘든 바위 벼랑이었지만 지금 할머니에겐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머리 속에서는 저 먹음직스런 산딸기를 따서 길용이에게 주려는 생각 외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길용이, 산딸기 많이 따 줄께, 미국에 가지 말고 엄마하고 같이 살자. 우리 길용이, 산딸기 많이 따 줄께, 미국에 가지 말고 엄마하고 같이 살자.”
조금 전 꿈 속에서 딸기를 따며 중얼거리던 말을 할머니는 중얼거리며 돌부리를 잡고, 돌 틈에서 자라난 작은 나무의 가지들을 잡으며 계속 산딸기 나무를 향해 올라갔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어느 것이 꿈인지 어느 것이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꿈이고, 모두가 현실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이마는 활활 불타오르는 듯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딸기를 맛있게 먹는 어린 길용이의 모습이 어른어른거리는 듯, 그 뜨거워진 이마 위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산딸기 나무 있는 데까지 다 올라왔습니다.
할머니는 산딸기 나무 위쪽에서 자란 작은 나무의 가지에 인동꽃 바구니를 걸어두고 한 알 씩, 두 알 씩 산딸기를 따면서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인동꽃 바구니 안에는 어느새 노오란 인동꽃 위를 빠알간 산딸기가 가득 덮었습니다.
할머니의 손에서 가장 먼 가지 쪽에 제일 큰 산딸기가 한 알 남았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뻗었습니다. 손이 닿을 듯 말 듯 했지만 그 쪽으로는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바위 틈에서 돋아난 풀을 한 손으로 잔뜩 움켜쥐고 애기 주먹 만큼 튀어나온 조그마한 돌부리에 발을 걸치고 다시 손을 뻗었습니다.
이제는 겨우 손이 닿았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할머니는 한껏 손을 뻗어 마지막 산딸기를 땄습니다.
앗!
할머니가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풀이 뽑혀져 버렸습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맛물려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할머니는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허공에는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길용아, 네가 좋아하는 딸기 따 왔다. 어서 돌아오너라!”
마지막 산딸기 한 알을 꼭 움켜쥔 채 학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지며 외치는 할머니의 외침은 풀밭 위를 불어가는 더운 바람에 섞여 버렸습니다.
“어머니, 저 길용이예요. 어머니의 아들 길용이가 돌아왔어요.”
“어머님, 제발 눈을 뜨세요.”
아들과 며느리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도 할머니는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아, 그만 하게. 벌써 나흘 째 저러고 계시다네.”
병수 엄마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어머니, 일어나세요.”
“그러게 진작 어머니를 모셔야지. 늙은 어머니를 홀로 두고 자네들만 먼나라로 가서 살면 어찌하나?”
성칠이 엄마의 핀잔에 길용이는 천장만 쳐다보았습니다. 길용이 아내는 고개를 푹 떨구었습니다.
높이 메어달린 링겔병에서 노란 링겔액이 할머니의 여윈 팔에 꽂힌 주사기를 향해서 비닐 호오스를 타고 또옥또옥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자네가 돌아오길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는가? 이 변을 당한 것도자네가 돌아오면 주려고 학바위에 올라가 산딸기를 따다가 당한 것이라네.”
“산딸기, 머루, 다래, 으름을 철마다 따 오곤 했지만 그걸 먹어야 할 자네가 돌아오질 않아서 그대로 썩어버리곤 했었다네.”
병수 엄마와 성칠이 엄마가 번갈아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길용이는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밖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빗물에 젖은 팽나무 가지들이 거무튀튀하게 보였습니다.
“여보, 어머님이 눈을 뜨셨어요!”
길용이는 아내의 외침에 황급히 할머니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어머니, 길용이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절 알아보시겠어요?”
길용이의 외침에 할머니는 얼굴에 작은 미소의 꽃을 피우며 입술을 달싹달싹 움직였습니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크게 말씀하세요.”
그러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입술만 계속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길용이는 할머니의 입 가까이 귀를 대었습니다. 여린 풀잎을 흔드는 듯한 바람같은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습니다.
“뭐라고 하셨지요? 딸기요?”
큰 소리로 되묻는 길용이의 말에 할머니의 고개가 조금 까닥였습니다.
“여기 있네. 이 산딸기를 말씀하시는 거네.”
병수 엄마가 마루에 두었던 인동꽃 바구니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바구니 속에 있는 산딸기는 이미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길용이는 바구니를 할머니께 보였습니다. 할머니의 입술이 또 달싹달싹 움직였습니다. 길용이는 다시 할머니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대었습니다.
“예, 어머니. 맛있게 먹겠어요.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제가 좋아하는 산딸기를 또 따 주셔야지요.”
길용이는 울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하며 거무스름하게 변한 산딸기를 한 움큼 쥐고 입에 넣었습니다.
길용이의 아내도 한 움큼을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길용이는 할머니의 여윈 손을 잡았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소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시들지 않고 그대로 정지되었습니다.
길용이는 할머니의 눈을 손으로 쓸어내려 감겨드리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거 있었지만 길용이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길용이는 마당 가운데에 서서 팽나무를 쳐다보았습니다.
비구름 가득 낀 시커먼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삭은 곁가지 하나가 하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뚝 부러져 떨어졌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방안에서는 길용이 아내의 구슬픈 울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길용이는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거무스름한 산딸기를 또 한 움큼 입에 넣었습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이 길용이의 얼굴 위를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학바위도 빗줄기에 가려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
'꿈꾸는 아이의 글밭 >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작동화> 백로마을의 전설 (0) | 2010.03.25 |
---|---|
<창작동화> 할아버지 놀이터 (0) | 2010.03.25 |
<창작동화> 저금통 속의 다리 (0) | 2010.03.25 |
<창작동화> 재수 없는 고양이 (0) | 2010.03.25 |
<창작동화> 작은 돌 큰 기쁨 (0) | 2010.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