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마을의 전설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내겐 시를 써서 정리해 두는 노트가 있습니다. 이제 다시 펼쳐서 읽어보면 시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시들이 쓰여 있지만 내겐 아주 소중한 노트입니다.
어느 날 문득 그 노트를 펼쳐 보다가, 한 동안 눈이 머물며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작은 천연색 사진과 같은 시가 한 편 있었습니다.
백로 마을의 전설
- 백로 마을 바우 할아범 이야기 -
허허허 허허허
빈 웃음 날리는
할아범
백로가 떠나간 나무 끝
구름을 잡는다.
곶감이 무서운 호랑이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애고, 내 딸 청아
그 이야기만큼은
참 많이
늙었지.
둥우리 이고
천년 비바람 막아
늘 푸르렀거니
백로들의 아늑한 보금자리였다
둥구나무집 분이
선머슴 바우
그 널따란 가슴에 안겨
하얀 백로를 보며
새록새록
밤을 새던 나무
백로처럼 하얀
분이 가슴은
불이 붙은 채
20 리 재 넘어
꽃가마 타고 가고
백로 나무 쳐다보다
백로 나무 쳐다보다
눈물 훔치며
바우는 마을 떠나고
백로들도
훨 훨 훨
마을 떠나고
인제는 돌아온
바우 할아범
허연 수염이
슬프다.
백로가 떠나간 나무는
푸르름을 잃었다.
백로가 떠나간 나무는
먼 하늘 보며 슬프다.
이 시가 이 노트에 쓰여진지 벌써 15 년도 더 지났습니다.
그 때 나는 고향 제주도를 떠나 충청도 어느 산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읍내에서 학교까지 30리도 넘는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드나들곤 했었습니다.
학교에서 읍내로 가는 길이 10리쯤은 포장이 안된 돌짝길이고, 나머지 20리 정도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되어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포장이 된 길보다는 돌짝밭 시골 길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 길의 한 쪽은 야트막한 산과 산을 끼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시, 하시, 봉암리 등 작은 마을들이 있었고, 한 쪽으로는 길을 따라 금강 줄기로 흘러드는 작은 시내가 뻗어 있었습니다.
시내와 나란히 뻗어 있는 돌짝길을 털털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천천히 달리노라면 시원한 산바람이 감꽃 향기, 아카시아 향기들을 내게로 실어다 듬뿍 안겨 주곤 하였습니다.
돌짝길이 끝나는 곳 묵정리까지 오면 꽃향기를 실어다 주던 산바람이 내 뒤로 달아나며 시골길은 시커먼 아스팔트길과 합쳐져 버리고, 길과 함께 나란히 흐르던 시내도 천천히 휘어지며 더 큰 물줄기 속으로 흘러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스팔트길로 들어서기 전에 오토바이를 세우고는 뚝방으로 올라서곤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뚝방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시내가 금강 줄기로 합쳐지는 어름에 스무남은 집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작은 동네 미촌이 있었고, 동네 뒤편으로는 작은 언덕이 누워 있었습니다.
내 눈이 늘 향하는 곳은 동네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어귀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였습니다. 소나무에는 눈처럼 하얀 백로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시원한 강바람에 나뭇가지가 가만가만 흔들리고 백로들이 하얗게 날아올라 강 위로, 산 위로 너훌너훌 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 종일 복잡했던 내 머리 속이 맑아지며 하얗게 칠해지곤 하였습니다.
백로를 바라보던 내 눈이 그 다음에 꼭 향하는 곳은 동네 가운데 제일 큰 기와집 앞에 그늘을 만들고 서 있는 둥구나무였습니다. 둥구나무 아래에는 언제나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서 백로가 둥지를 틀고 있는 나무를 쳐다보는 모습이 머얼리로 보이곤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동안을 보고 있어도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마치 굳어져 버린 망부석인 듯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망부석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가끔 고개를 돌려 날아가는 백로를 따라 눈을 돌리는 것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둥구나무 아래에 그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마도 백로들이 한 마리 두 마리씩 둥지를 떠날 때부터였던 것같습니다.
(1) 둥구나무집 분이
백로 마을 뒷산으로 강바람이 불어 가고 있었습니다. 강바람은 미루나무 새 잎사귀의 연둣빛 향기와 조는 듯이 조용히 흐르는 푸른 강물의 향기를 싣고 와서 뒷산에 내려놓고는, 다시 온갖 꽃향기를 실어 오곤 하였습니다.
봄 향기들이 한가득 모여드는 뒷산 양지바른 풀밭에서는 두 아이가 풀꽃을 따며 놀고 있었습니다. 남자 아이는 풀꽃을 엮어 꽃목걸이를 만들고 있었고, 여자 아이는 풀꽃 모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여자 아이가 열심히 목걸이를 엮고 있는 남자 아이의 뒤로 다가가서는 머리 위에 살며시 풀꽃 모자를 얹었습니다.
“바우야, 뒤로 돌아 봐.”
바우는 풀꽃 모자가 떨어질세라 살며시 뒤로 돌아섰습니다.
“야, 멋있다. 바우는 마치 왕자 같애.”
바우는 풀꽃 모자를 꾹 눌러 쓰며 어깨를 으쓱거렸습니다.
“자, 여기 목걸이.”
바우가 내미는 목걸이를 보고 여자 아이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였습니다. 바우는 조금 망설이다 여자 아이의 목에 꽃 목걸이를 걸어 주었습니다.
“나 어때?”
“응, 분이는 꽃나라 공주 같애”
분이는 얼굴을 붉히고 꽃 목걸이를 어루만졌습니다. 꽃 목걸이에서 나는 꽃 향기가 분이의 코끝을 간지럽혔습니다.
바우가 문득 주머니에서 풀꽃 가락지를 꺼내어 분이에게 불쑥 내밀었습니다.
“어머나, 이건 풀꽃 가락지!”
분이는 기쁜 얼굴을 하고 얼른 받으려다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 하나를 살며시 내밀었습니다.
“신식 신랑은 결혼을 할 때에 새색시의 손에 가락지를 직접 끼워 준대. 자.”
바우는 주저주저 망설이다 분이의 손가락에 풀꽃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바우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분이의 손가락도 파르르 떨렸습니다.
바우는 분이의 작은 손을 살며시 잡았습니다. 마주 잡은 두 손들이 바알갛게 물들고 있었고, 바라보는 두 얼굴이 빠알갛게 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바우와 분이는 손을 잡고 풀밭을 걸었습니다. 풀꽃 모자를 쓴 바우와 풀꽃 목걸이를 목에 건 분이는 꽃나라의 작은 왕자와 공주였습니다. 따스한 햇살도 둘이 걸어가고 있는 곳으로만 비춰 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백로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나무 사이로 아이들이 사는 동네가 내려다 보였습니다. 동네 한가운데의 제일 큰 기와집은 분이네 집이었습니다. 분이네 기와집 앞에는 동네 사람들의 쉼터인 둥구나무가 넓은 그늘을 만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이네 집을 둥구나무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우와 분이가 올라가 놀고 있는 뒷산으로 오르는 어름의 동네 끝자락에는 바우네 집이 있었습니다. 울타리도 없는 조그마한 초가집이 다른 집들과는 조금 떨어져서 오두마니 앉아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바우네 집을 선머슴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바우와 분이는 알지 못했습니다.
바우네 초가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뒷산의 허리에는 백로들이 해마다 찾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우곤 하는 소나무 숲이 있었습니다. 바우네 동네 사람들은 그 나무들을 백로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또 가까운 여러 동네에서는 이 동네를 미촌이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백로가 사는 마을이라고 해서 백로 마을이라고 부르곤 하였습니다.
백로 나무에는 하얀 백로들이 새로운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을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우와 분이는 손을 꼬옥 잡은 채로 백로 나무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백로 한 마리가 훠얼훨 하얀 날갯짓을 하며 나무 위를 비잉 돌아 둥지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둥지에 있던 백로가 긴 목을 뻗어 방금 날아 내려온 백로의 목을 감싸며 꾸르륵거렸습니다. 두 마리의 백로는 목을 비벼 꾸르륵거리다간 부리를 부딪히곤 하는 것이 새색시와 신랑이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것같았습니다.
바우와 분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마주 보았습니다.
“바우야, 나 …….”
분이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으응, 뭔데 ?”
그러나 분이는 얼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바우와 잡았던 손을 살며시 빼서는 꽃목걸이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어서 얘기해 봐.”
바우의 재촉을 받고서야 분이는 얼굴을 돌린 채 조그만 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나 ……, 어른이 되면 바우 네 색시가 될래.”
이번에는 바우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바우도 어른이 되면 내 신랑이 될 거지?”
“응, 으응.”
“그럼, 약속한다? 자,”
분이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바우도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바우의 새끼 손가락과 분이의 새끼 손가락이 백로들의 목처럼 감겼습니다.
“우리 약속을 저 백로들이 알 거야.”
“그래, 백로들을 보고 약속했어.”
목을 감고 꾸르륵거리던 백로 두 마리가 날아올라 바우와 분이의 머리 위를 비잉빙 돌았습니다.
(2) 머슴집 아이
그 때였습니다.
“분이야, 분이야!”
바우네가 있는 산 위로 오르며 분이를 부르는 분이 오빠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분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오, 오빠가……. 바우야, 빨리 숨어. 오빠한테 들키면 혼난단 말야.”
“왜?”
“오빠가 바우하고 놀지 말라고 했단 말야.”
분이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왜?”
영문을 알 수 없는 바우는 똑같은 물음을 묻기만 했습니다.
“글쎄, 몰라. 빨리 숨으래두!”
바우는 분이의 동동거리는 재촉에 상수리나무 그늘로 숨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분이야, 여기에 있었구나. 그런데 오빠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니?”
“으응, 백로를 보느라구…….”
오빠는 분이의 얼버무리는 말을 들으면서도 얼굴에 쓰여지는 당황해 하는 표정을 얼른 읽을 수 있었습니다.
“너 바우랑 같이 있었지?”
“아아니야, 오빠. 나 혼자 있었어.”
분이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지만 오빠는 분이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그늘진 나무숲을 둘레둘레 살펴보았습니다.
“바우, 너 거기 있는 거 알고 있다. 빨리 이리 나와.”
분이네 오빠 성구의 말에 바우는 가슴이 철렁 흔들렸습니다. 분이가 왜 숨으라고 했는지, 분이와 놀면 왜 성구에게 혼나는지 알지 못했지만, 숨어 있는 것이 그만 들키고 말았다는 것에 가슴이 쿵쿵거렸습니다. 그러나 바우는 옷자락을 꼭꼭 부여잡으며 더욱 몸을 움츠렸습니다.
“빨리 나와. 거기 옷자락이 보인단 말야.”
성구는 정말 바우가 숨어 있는 것을 보았는지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바우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성구의 얼굴이 험상궂었습니다.
바우는 발이 땅에 붙은 듯 달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성구의 억센 손이 바우의 작은 목덜미를 움켜쥐었습니다.
“컥컥.”
바우는 숨이 막혔습니다.
“바우! 넌 우리 분이와 놀면 안 돼. 감히 머슴의 자식인 주제에 상전 집 딸과 어울려 놀다니.”
성구는 커다란 주먹으로 바우의 머리통을 한 대 갈기더니 땅바닥에 바우를 패대기쳤습니다.
“분이야. 넌 저놈의 아비를 머슴으로 부리던 양반집 딸이란 말야. 그런 네가 저런 머슴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니. 다시 그러면 혼날 줄 알어. 자, 가자.”
성구는 주먹을 들어 분이의 머리 위에서 흔들어 대더니 분이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고 끌었습니다.
분이는 오빠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자꾸 뒤돌아보았습니다. 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바우는 울지 않았습니다. 작은 주먹을 꼭 그러쥐고 입술을 악다물었습니다.
바우는 옷을 털고 일어나며 동네 노인들이 둥구나무 아래 앉아서 작은 소리로 하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쯧쯧. 좌수까지 지낸 양반집 손주가 하는 꼴을 보게.’
‘그러게나 말일세. 아, 하필이면 일본 순사의 앞잽이 노릇을 할게 뭐람.’
‘성구 그 녀석을 보면 밸이 다 꼬이네 그랴. 그런 놈들 때문에 우리 나라가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야.’
‘쉿, 작은 소리로 말하게나. 누가 듣고 일러바치면 우린 빼도 못추린다구.’
노인들의 말처럼 성구는 일본 순사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고 으스대곤 하였습니다. 힘이 장사라고 하는 옆 동네 용팔이나 읍내 깡 패거리들도 성구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습니다. 성구에게 밉게 보였던 기철이 아버지가 지서에 붙들려 갔다가 돌아와서는 제대로 걷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아 눕게 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개들도 성구가 방망이를 차고 활개를 치고 걸어가면 꼬리를 감추고 슬슬 피하는 지경이었습니다.
분이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 성구가 그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말렸지만 성구는 듣지 않았습니다. 분이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동네 사람들 보기가 창피하다고 양반집 어른답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다녔습니다.
바우는 집에 돌아와서 방문을 닫아걸고서야 눈물을 조금 뽑았습니다.
노무라 히데끼네 금광에 일을 나갔던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온 저녁, 바우는 애써 얼굴을 펴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바우의 얼굴에서 쉽게 그늘을 찾아내었습니다.
“자, 어서 밥 먹자. 우리 바우 배고팠지?”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렸던 아버지, 어머니가 부지런히 밥숟가락을 뜨는데도, 다른 때 같으면 식욕이 왕성하게 먹어댈 바우가 몇 술 뜨지도 않고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바우야, 왜? 낮에 무슨 일 있었니?”
어머니의 말에 바우는 참았던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머니, 머슴이 뭐예요?”
느닷없는 바우의 물음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숟가락을 든 채로 갑자기 굳어 버린 사람 마냥 한동안 움직이지를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숟가락을 놓고 쌈지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워 물었습니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한동안 허연 연기만이 뿜어지고 있었습니다.
“왜? 누가 뭐라 하드냐?”
“그래요. 분이 오빠 성구가 분이하고 놀지 말래요. 머슴집 자식인 주제에 상전집 딸과 어울려 논다고요. 아버지, 머슴은 뭐고 상전은 뭐예요?”
아버지의 손이 담배를 우악스럽게 비벼 껐습니다.
“성구, 이노므 새끼. 지금이 어느 땐데 상전 머슴 하는 거야. 제 놈은 쪽발이 머슴 노릇하면서 말야.”
아버지의 눈에서는 퍼런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천둥소리 마냥 우렁우렁 울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며 문 밖을 내다보고는 얼른 문을 닫았습니다.
“성구가 들으면 어쩌려고 소리를 지르세요. 기철이 아버지 꼴 못 보셨어요?”
“들으라면 들으라지. 내 언젠간 그 놈을…….”
아버지의 큼지막한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바우는 더 이상 아버지께 여쭤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달빛이 환한 마당에 백로들이 잠들어 있는 소나무 숲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싸리 울 너머로 둥구나무가 지켜 서 있는 분이네 기와집이 건너다 보이고, 기와 지붕 위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하러 다니는 노무라 히데끼네 금광이 있는 시항산이 시커멓게 솟아 있었습니다.
그 날밤 술이 잔뜩 취한 아버지를 겨우 달래어 잠재우고 난 후 어머니는 바우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나직한 목소리로 바우가 궁금해하던 것을 다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바우의 아버지는 분이네 집에서 태어난 대물림 머슴이었습니다. 바우의 할아버지도 또 그 위의 할아버지도 모두 분이네 집 머슴이었다고 했습니다.
바우 어머니는 가난한 농사꾼 집 딸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너무 너무 가난하여 온 식구가 굶어 죽을 처지가 되자 바우 외할아버지는 어린 딸을 분이네 집 하녀로 들여보내고 약간의 쌀과 돈을 받아 멀리 남의 나라 땅 간도라는 곳으로 떠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 땐 자기를 팔아 버리고 떠나가 버렸다고 원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원망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분이네 집에서 머슴과 하녀로 살아가던 바우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을 했고, 점점 기울어져 가는 분이네 집에서 더 이상 머슴들을 거느려 살 처지가 되지못하여 머슴과 하녀들을 모두 내보내게 되자 이 곳에 나와서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이 오빠 성구는 아직도 머슴과 하녀를 거느리고 살던 양반 도령 버릇이 남아, 동네 사람들을 하인 거느리듯 하고, 한편으로는 일본 순사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으스대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우는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끈끈한 슬픔이 묻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동안 성구에게서 당한 한도 함께 배어 있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점점 달라지고 있는 겨.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점점 바껴 가고 있는 겨. 바우야, 니는 그런 좋은 세상에서 살게 될 겨.”
방으로 들어가며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바우의 가슴으로 들어와 앉았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바우에게 하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먼 하늘 구름을 잡는 이야기처럼 달빛 가득한 하늘로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바우는 달을 쳐다보았습니다. 거기 분이의 얼굴이 웃고 있었습니다.
‘나……, 어른이 되면 바우에게 시집갈래. 바우도 내 신랑이 될 거지?’
바우는 얼굴이 붉어지며 풀꽃 반지를 꼈던 손가락을 살며시 만져 보았습니다.
‘그래, 분이 니는 내 색시야.’
바우는 달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양반이 뭐고, 상놈이 뭐고 그런 건 바우에게 아무 상관도 없었습니다. 뒷산에서 풀꽃 모자와 풀꽃 목걸이를 주고받으며 했던 약속만이 바우의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구름 때문에 일그러진 달이 무서운 성구의 얼굴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성구의 우악스런 주먹에 얻어맞은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우는 주먹을 그러쥐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3) 슬픈 꽃가마
뒷산 소나무에 하얀 꽃을 피우던 백로들이 계절을 따라 왔다 가기를 몇 번. 바우는 백로들의 날갯짓을 보며 커 갔습니다. 분이도 백로처럼 하얗게 예쁜 처녀로 자랐습니다.
바우와 분이는 이젠 뒷산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물을 길어 오던 분이가 나뭇짐을 지고 가는 바우를 만나면 고개를 살포시 숙이며 눈웃음을 살짝 지었습니다. 바우는 살짝 웃는 분이의 볼우물을 바라보며 한 쪽 눈을 찡긋 감았습니다. 둘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분이의 볼우물이 더욱 깊어 가고, 바우의 눈빛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을 무렵 세상은 점점 험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전쟁 이야기가 오르내렸습니다. 일본 순사들과 면서기들은 “대동아 공영권”이란 말을 앞세우며, 이 땅을 침략한 서양 세력을 몰아 내고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서 새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동아 공영권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 동아시아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이 땅을 침략했다는 서양 사람들은 본적도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리고 순사의 눈을 피하면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전쟁이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했습니다.
얼마 후 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순사들과 면서기들이 군대에 나오라는 징집 영장을 들고 젊은이들의 집을 찾아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한 명씩 한 명씩 군대로 끌려나갔습니다. 일본 군대로 나가는 것이 싫어서 도망쳐 숨어 버리는 젊은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순사들은 눈을 부릅뜨고 숨어 버린 젊은이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분이 오빠 성구가 순사들의 앞장을 서서 숨어 버린 젊은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젊은이들이 붙들리면 그 날로 군대로 끌려가거나 지서로 잡혀가서 반죽음이 되어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끌려가는 건 젊은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처녀들도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는 간호원을 모집한다거나, 군수 공장에서 일하여 돈을 많이 벌게 해 준다거나 하며 데리고 가서 자꾸자꾸 마을을 떠났습니다. 강제로 끌려가는 처녀들도 많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쉬쉬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아, 간호원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는구먼.”
“군수 공장에서 일 시킨다 해 놓고 다른 데로 보낸다더군.”
“아니, 그럼 처녀들을 워디로 데려간디야?”
“군대로 끌고 간다더구먼.”
“뭐여? 그럼 처녀들에게도 총을 들고 싸우라고 하는 겨?”
“이 사람 영 캄캄 절벽이구먼. 정신대란 말도 못 들어 보았남?”
“정신대? 정신대가 뭐여?”
그러다 사람들은 순사들이 멀리 보이기만 해도 입을 다물곤 하였습니다.
시집간 여자는 데려 가지 않는다고 하여 서둘러 딸을 시집보내는 집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느 날, 면서기가 바우네 집에 군대에 나오라는 명령서를 던져 넣고 갔습니다.
바우네 집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우리 집에도 올 것이 왔군.”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아.”
아버지는 뻑뻑 담배를 피워 물고 어머니는 누가 죽기라도 한 것같은 얼굴을 하고 안절부절하지 못하였습니다.
캄캄한 밤, 바우네 집 사립문이 소리 없이 열렸습니다. 아버지가 조심스레 바깥 어둠을 살피더니 집안을 향해 손짓했습니다. 바우가 기어가듯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습니다. 뒤따라 나온 어머니의 손에는 작은 보퉁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바우의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아버지가 바우의 등을 토닥거렸습니다. 바우는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어둠이 바우를 삼켰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바우를 삼킨 어둠을 바라 보다 돌아섰습니다.
바우는 산 속에서 숨어살았습니다.
몰래 한 번 다녀 간 어머니로부터 일본 순사들이 눈이 시뻘개져서 바우를 찾고 있다는 것과, 아버지가 지서로 잡혀가서 매를 많이 맞았지만, 아버지가 작업 반장으로 있는 금광의 노무라 히데끼 사장이 나서서 아버지를 데려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서너 달 전 군대로 끌려갔던 바우 친구 경만이의 전사 통지서가 왔다는 이야기도 해 주면서 절대 마을로 내려오지 말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깊이 숨으라고 했습니다.
바우의 꼭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두 번 째 바우를 찾아 온 어머니로부터 분이의 소식을 들었을 때 바우의 입술에는 피가 맺히고 눈에서는 시뻘건 불이 이글이글 끓었습니다.
분이는 성구가 늘 드나드는 읍내의 부잣집 막내 아들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분이가 시집가는 부잣집 주인은 일본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부자가 된 사람으로, 성구와 같이 주먹이 거친 젊은 사람들이 그 집에 많이 드나들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부자를 쪽발이 반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안돼. 분이는 내 색시가 될 거야.”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숲 속에서 외치는 바우의 목소리에 피가 맺혀 있었습니다.
핏발이 선 바우의 눈에 백로가 날아다니는 뒷산 풀밭에서 풀꽃 가락지 낀 손을 살며시 잡고 이야기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모였습니다.
‘나 ……, 어른이 되면 바우 네 색시가 될래. 바우도 어른이 되면 내 신랑이 될 거지?’
‘응, 으응.’
‘그럼, 약속한다.‘
‘우리 약속을 저 백로들이 알 거야.’
‘그래, 백로들을 보고 약속했어.‘
분이가 시집간다는 날 바우는 몰래 마을 뒷산으로 내려와 숨었습니다. 백로들은 바우와 분이의 어릴 적 약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하얀 날개짓을 하며 마을 위로, 논 위로 훨훨 날아다녔습니다.
뒷산에서는 분이네 집이 훤히 내려다 보였습니다.
분이네 집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이 가득 모여 분이와 쪽발이 반종의 막내 아들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분이는 바우와 약속했던 신식 결혼식을 하지 않고 족두리를 입은 차림의 구식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뒷산에 숨은 바우는 눈물을 삼키며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분이가 탄 꽃가마가 신랑이 탄 말을 따라 읍내로 가고 있을 때 바우는 읍내로 가는 고갯길에 숨어 있었습니다.
바우가 숨어 있는 곳으로 분이의 꽃가마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신랑은 기분이 좋은 듯 말 등에서 흔들거리며 연신 싱글거리고 있었지만, 분이의 꽃가마는 꼭 감고 있는 분이의 눈처럼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바우는 꽃가마 행렬 앞으로 썩 나섰습니다.
“분이를 내려놓아. 분이는 내 색시야!”
행렬이 갑자기 멈췄습니다. 가마를 맨 장정들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뚝 섰습니다.
“이 놈들. 분이는 내 색시가 될 거란 말이다. 꽃가마를 내려놓고 썩 꺼져 버려.”
그제야 사람들은 앞에 버티고 선 젊은이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바우의 목소리를 듣고 분이의 꽃가마 문이 쳐들려졌습니다.
“바우!”
분이의 목소리가 울고 있었습니다.
“분이!”
바우의 목소리도 울고 있었습니다.
바우는 꽃가마 앞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꽃가마를 따라 오던 성구가 바우의 앞을 썩 가로막았습니다.
“이 놈, 바우. 어디 숨었다 이제야 나타났느냐?”
성구는 품 속에서 시커먼 권총을 꺼내 들었습니다.
“바우, 꼼짝 마라. 당장 너를 체포하여 대 일본 제국 군대로 보내 주마.”
“성구, 이 쪽발이의 개야. 쪽발이에게 꼬리를 흔들다 못해 이젠 분이까지 쪽발이 반종네 집으로 보내는구나. 분이와 난 어릴 때 신랑 각시 하기로 했단 말이다. 분이를 내려놓아.”
“이 놈이. 머슴의 자식 주제에 감히 상전의 딸을 넘봐? 게다가 대 일본 제국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고 군대에 가기 싫어 도망쳤다가 이제야 나타나?”
성구의 손에 들린 권총의 총구가 바우를 향했습니다.
바우는 권총을 피해 숲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탕!
권총이 불을 뿜었습니다. 총알이 바우의 귀를 스치듯 날아갔습니다.
“바우!”
분이의 외침이 달아나는 바우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분이! 분이야―!”
바우의 외침이 숲 속에 메아리쳤습니다.
꽃가마가 얼이 빠진 신랑이 탄 말을 따라 다시 움직였습니다.
꽃가마의 문이 다시 닫혀졌지만 분이의 흐느낌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분이야! 분이야!”
바우의 외침이 멀리서 들리다 점점 작아졌습니다.
그 날 이후, 바우의 아버지가 지서로 다시 끌려가서 주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바우를 보았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4) 또 다른 전쟁
전쟁이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식량을 빼앗아 가고, 아들과 딸들을 빼앗아 가고, 심지어는 놋그릇까지 빼앗아 가던 전쟁이 끝났다고 모두들 좋아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순사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성구네 집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성구네 식구들은 어느 새 도망쳤는지 큰 기와집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구에게 분풀이하듯 집안 물건들을 마구 때려부수고 더러는 다투어 가져가 버렸습니다. 누군가가 전하는 말로는 읍내에서는 쪽발이 반종이 읍내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군수 공장에 일하러 갔던 만득이 아버지, 남태평양 어느 섬에 징용으로 끌려갔다던 영순이 아버지, 군대에 나갔던 덕자 오빠까지 모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신대로 끌려갔던 동네의 이쁜 딸들은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사람들 속에 바우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읍내 쪽발이 반종네 집으로 꽃가마 타고 갔던 분이가 돌아 온 것은 돌아올 사람이 거의 다 돌아오고 난 막바지였습니다. 시집이 폭삭 망해 버리자 남산만한 배를 하고 돌아온 분이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기와집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혼자서 외롭게 살고 있던 바우의 어머니는 바우가 돌아온 것 마냥 반가워 분이네 집을 가끔씩 드나들며 만삭이 되어 몸이 불편한 분이를 도와주었습니다.
뒷산에 단풍이 붉게 익어 갈 무렵 분이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분이의 아기를 바우 어머니가 받아 주었습니다.
둥구나무 집에서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렸지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아기가 죽어 버리자 정신이 돌아 버린 분이는 헝클어진 머리,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베개를 업고 다니며 히히덕거리기도 하고 훌쩍훌쩍 울기도 하였습니다.
“성구 제 놈이 일본 놈들의 앞잽이 노릇을 하며 우리를 못살게 굴더니 식구들이 천벌을 받은 게야.”
사람들은 분이를 보며 쯧쯧쯧 혀를 찼습니다.
바우의 어머니만이 가끔 분이네 집을 드나들며 미쳐 버린 분이를 돌보곤 할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조용하던 마을에 다시 총성이 울렸습니다.
“전쟁이 났대.”
“뭐, 전쟁?”
일본이 일으켰던 전쟁 때문에 온갖 궂은 일을 다 겪었던 사람들에겐, 그 전쟁이 끝나 평화롭게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전쟁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니, 심장이 멎을 듯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엔 누구하고 누가 싸운다는 거야?”
“글쎄, 저 삼팔선 북쪽 사람들이 쳐들어 왔대요.”
“아니. 그 놈들이 왜 자기네 형제들하고 싸우러 왔다는 거야?”
“난들 아오? 그나저나 빨리 보따리 싸 들고 피난을 갑시다. 그 놈들이 벌써 서울을 빼앗고 대전 쪽으로 밀고 내려온답니다. 읍내 정거장에는 피난민을 가득 실은 열차가 줄을 이어 내려 간 대요.”
“그래도 설마 이 시골 구석에까지 그놈들이 올려구요? 더구나 모내기가 끝난지도 얼마 되지 않는 저 논들을 팽개치고 어떻게 피난을 간답니까? 복동이네나 내려가시구려. 우린 그냥 있겠어요.”
“그 놈들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다는데 그대로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 다오. 어서 보따리를 쌉시다.”
“피난을 가 버리면 우리 누렁이는 어떻게 하란 말이오? 우리 집 큰 재산인데 누가 여물을 주고 물을 먹여 준단 말이오. 난 안 갈라오.”
마을 사람들은 입씨름을 하면서 더러는 피난 보따리를 꾸리고, 더러는 호미를 들고 여전히 밭으로 논으로 가곤 하였습니다.
몇 몇 가족들이 피난을 떠났습니다. 읍내에 다니러 갔던 사람들이 전쟁 소식을 가지고 오고, 먼 천둥인 듯 간간이 대포 소리가 들려 오곤 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집 굴뚝에선 여전히 아침이면 밥짓는 연기가 솟아오르곤 하였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짙어져 가는 매미 울음과 함께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의 어느 이른 새벽, 총을 든 인민군 한 무리가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인민군들은 곧바로 분이네 둥구나무집으로 오더니 집을 포위해 버렸습니다. 따발총을 든 병사들 몇 명이 대문을 걷어차며 집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분이의 팔목을 잡고 나온 인민군들은 둥구나무 아래 버티고 서 있는 군관에게로 분이를 끌고 왔습니다.
“군관 동무, 집안엔 이 계집년밖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시요.”
“분이!”
군관의 입 안에서 가느다란 외침이 터졌지만 아무도 그 외침을 듣지 못했습니다.
미쳐 버린 분이는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 채 안고 나온 베개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아가야, 뒷산으로 가자. 꽃모자 만들 꽃들이 활짝 피었을 거야.”
히죽 히죽 웃는 분이의 얼굴에는 어린 아이와 같은 평화가 깃들이어 있었습니다.
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군관의 눈이 활활 불타오르며 그 불을 끄려는 듯 찔끔 물이 고였습니다. 군관은 뒤로 돌아서며 모자를 꾹 눌러 썼습니다.
“놓아주어라.”
“예, 군관 동무.”
놓여난 분이는 뒷산으로 오르는 어름에 서서 백로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껑충껑충 뛰며 외쳤습니다.
“백로야, 백로야, 넌 아직도 신랑 각시 약속을 알고 있니? 풀꽃 목걸이 약속 말이야아─.”
그러더니 갑자기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습니다.
“백로야, 내 신랑 찾아 줘. 꽃 목걸이 걸어 줄 내 신랑이 날 두고 가 버렸단 말이야아.”
훌쩍 훌쩍 울던 분이는 베개를 쓰다듬으며 또 중얼거렸습니다.
“아가야, 꽃 목걸이 만들 꽃들이 다 말라 버렸구나. 우리 오빠가 총을 쏘아 다 말라 버리게 해 버렸단다. 아가야, 집으로 들어가자.”
더운 여름 아침인데도 분이가 들어간 기와집으로 찬바람이 휘잉 불어 가는 듯했습니다.
탕탕!
인민군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아 대고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온 인민 전사들이외다.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둥구나무 아래로 모두 모이라우.”
그러나 겁이 난 사람들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탕탕!
또 다시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먼젓번 총소리에 푸드덕 날아올랐던 백로들이 미처 다시 앉을 새도 없이 총소리에 하얗게 흩어졌습니다.
“이 동네에 사는 인민들은 모두 귀가 먹었음매? 날래 날래 나오라우.”
사람들은 그제야 쭈뼛쭈뼛 둥구나무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둥구나무 밑 쉼돌 바위 위에는 권총을 찬 인민군 장교가 모자를 눌러 쓴 채 떠억 버티고 서 있었고, 따발총을 든 병사들이 주욱 서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깨를 한껏 오그리고 오돌오돌 떨며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섰습니다. 바우 어머니도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몸을 웅크린 채 오돌오돌 떨며 서 있었습니다.
인민군 병사 하나가 마을 사람들 앞으로 나섰습니다.
“동무들, 우리는 남조선 인민들을 미 제국주의의 노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인민 전사들이외다. 우리 북조선의 인민군들은 여러분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용감히 싸워서리, 지금 대전을 해방시키고 추풍령을 넘어 대구를 향해 진격하고 있시요. 우리들은 해방 지구의 인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리 이곳으로 온 것이야요.”
인민군 병사의 이야기가 길게 계속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따발총을 들고 서 있는 인민군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웅성거릴 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이곳의 책임자가 되실 군관 동무를 소개하갔시오. 군관 동무 말씀하시라요.”
마을 사람들의 눈이 둥구나무 아래의 인민군 군관에게로 모아졌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 썼던 군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의 눈이 소 눈보다 더 커졌습니다.
“저, 저건 …….”
“바, 바우 …….”
그렇습니다. 분이 오빠 성구에게 쫓겨 마을을 떠났던 바우가 인민군 군관이 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온 것입니다.
“바우야!”
바우의 어머니는 마을을 떠난 후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던 아들이 돌아 와서 너무나 기뻐 앞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너무나 달라진 아들의 모습과 총을 들고 서 있는 인민군들을 보고는 다시 멈춰 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우는 어머니를 보고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듯하다 다시 모자를 쓰고는 마을 사람들을 향했습니다.
“동무들, 나 바우입니다. 여러 동무들과 함께 지내던 나 바우는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반동들을 잡아 없애고, 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여러 인민들을 보호하고자, 인민군 군관이 되어 다시 이 곳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미 제국주의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인민 군대와 함께 미 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끝까지 몰아내고, 위대한 공산주의 국가 건설에 힘을 모읍시다.”
마을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바우의 태도는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도 원체 체구가 크고 힘이 세어서 마을의 힘든 일은 거의 도맡아 하다시피 하던 바우였지만, 인민군 군관복을 입고 권총을 찬 모습으로 떡 버티고 서 있는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기가 질렸습니다.
“저 사람이 정말 바우가 맞는 겨?”
“글씨.”
“근데 저 놈이 제 에미도 있고, 마을 어른들도 있는디 우리들을 보고 동무라고 해쌌는디 소갈머리가 없구먼.”
“원래 종자가 머슴 놈의 종자라 그련가벼.”
“쉬,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말아. 이젠 저놈들 시상인디 입이 있다고 그 딴 소릴 함부로 하다간 큰일날 거구만.”
두런거리던 사람들은 큰일 난다는 말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 정말 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5) 떠나가는 백로
부하들을 풀어 성구를 찾아다니던 바우가 끝내 성구를 찾지 못하자, 일본의 앞잡이들을 처단한다고 하며 인민 재판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성구를 쫓아다니던 이웃 동네 용팔이네 패거리들과, 지서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덕칠이, 그리고 면서기로 있다가 전쟁이 나자 피난을 가 버린 아들을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영감님이 밧줄에 묶인 채 줄줄이 둥구나무 아래로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재판이란 것은 말 뿐, 각본에 짜여진 대로 있지도 않은 죄를 늘어놓고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일본에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일본에 있는 군수 공장에 일하러 갔다 돌아 온 만득이 아버지, 남태평양 어느 섬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돌아 온 영순이 아버지, 일본 군대에 나갔던 덕자 오빠가 끌려 나와 처형당했습니다.
그 때마다 바우 어머니는 바우를 말리며 마을 사람들을 살리려 했지만, 이미 빨간 물이 잔뜩 들어 버린 바우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 놈아, 동네 사람들은 왜 죽이는 겨? 너하고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냐? 이 사람들이 아무 죄가 없다는 건 하늘이 알고 너도 알고 이 에미도 아는데 왜 함부로 죽이는 겨? 차라리 이 에미를 먼저 죽여라!”
어머니가 목에 피가 맺히도록 말렸지만 바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 보기가 부끄럽다며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바우네 인민군들과 마을 사람들은 집 뒤 백로 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흔들거리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너풀거리는 하얀 소복이 백로가 되어 훨훨 하늘로 날고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서는 분이가 깔깔거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백로다. 큰 백로다. 백로야, 내 신랑 바우를 찾아 줘. 꽃 모자 쓰고, 꽃 목걸이 걸고 결혼해야 한단 말이야.”
바우는 목을 맨 어머니와 그 아래에서 깔깔거리며 웃다가 훌쩍거리며 울곤 하는 분이를 보며 울부짖었습니다.
“어머니!”
바우의 울부짖음에 놀란 백로들이 하얗게 날아올랐습니다.
바우는 도끼를 찾아 들고 백로 나무를 찍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쿵쿵 울리는 도끼질에 솔잎들이 부스스 떨어져 내리고, 백로 둥지가 흔들리며 알들이 떨어졌습니다.
바우의 부하들이 바우를 말리며 도끼를 빼앗았지만 미친 듯 휘두른 도끼질에 밑동이 절반이나 잘려 나간 백로 나무가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몸짓으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도끼를 빼앗긴 바우는 권총을 빼 들었습니다.
탕탕탕탕.
백로 나무를 향해서 무차별 쏘아 댄 총알들이 두 마리 백로의 하얀 깃털을 빨갛게 물들이며 땅으로 떨구었습니다.
“안 돼! 백로를 죽이지 마.”
분이가 바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뛰어 들어 총을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분이, 이 총 놔!”
“내 백로, 내 백로야. 바우와의 약속을 지키게 해 줄 내 백로를 죽이지 마!”
총을 빼앗으려는 분이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바우의 실랑이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탕!
총성이 울리며 분이의 몸이 낙엽처럼 부스스 쓰러졌습니다. 분이의 가슴에 빨간 장미 꽃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분이!”
쓰러져 내리는 분이를 붙들고 바우는 찢어지는 소리로 분이를 불렀습니다.
가슴을 움켜쥔 분이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습니다.
“바우, 바우야, 돌아왔구나!”
“분이!”
분이를 부르는 바우의 목소리에도 생기가 돌았습니다.
“바우, 난 기다렸어. 바우가 돌아…… 오기를. 날마다 저…… 백로들을 보며 바우의 색시가 되는 꿈을…… 꾸었어. 저 백로들은 알 거야. 꽃 목걸이…… 걸고, 꽃 모자 쓰고…… 신랑 각시 하기로…… 했던 약…… 속을. 그런데…….”
분이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말을 다 맺지도 못하고 바우의 가슴에 안겨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러나 분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분이─. 분이야아─.”
바우는 분이를 부둥켜안은 채 분이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분이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분이를 부둥켜안은 바우도 분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일어설 줄을 몰랐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 씩 둘 씩 백로 나무 밑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우의 도끼질과 총소리에 놀라 날아 올라간 백로들도 다시는 백로 나무로 돌아오지 않고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들어 왔는지, 국군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우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분이를 안고 울며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분이야, 내 색시 분이야, 이제 돌아왔는데 왜 먼저 가니? 나를 두고 왜 먼저 간단 말이냐? 나쁜 놈! 바우, 이 나쁜 놈! 내 손으로 백로 같은 분이를 쏘다니……. 분이야, 네 가슴에 피어나는 빨간 핏빛 장미로 이젠 내 가슴에 꽃 모자와 꽃 목걸이를 만들어 고이 간직하마. 분이야, 저기 뒷산에서 백로들을 보며 한 약속 영원히 잊지 않으마.”
(6) 그리고, 그 후
바우는 마을을 포위한 국군들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어느 새 유엔군과 국군들은 인천으로 상륙하고, 낙동강 쪽에서도 밀고 올라왔던 것이었습니다.
바우는 어머니와 분이를 가슴에 묻은 채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갇혀 지냈습니다.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바우의 가슴 속에서는 커다란 폭풍이 휘몰아쳤습니다. 어머니가 만들고 간 폭풍, 분이가 만들고 간 폭풍이 걷잡을 수 없이 몰아쳐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습니다. 가슴을 찢어 놓은 폭풍은 바우의 눈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반공 포로가 되어 석방된 바우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지냈습니다. 서울 역 앞에서는 지게꾼이 되고, 공사장에서는 막노동꾼이 되었습니다. 다리 아래 거적데기를 치면 잠자리가 되었고, 떠돌다 발이 서는 곳이 집이 되었습니다.
바우는 고향에서 먼 도시로, 마을로만 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향 쪽에서 멀리 떠돌아 다녀도 가슴 속 깊이 생긴 상처는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할아버지가 된 바우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고향에는 아무도 반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우 할아버지는 백로 나무 밑 다 쓰러져 가는 옛집을 손질하여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분이가 죽던 날, 백로 마을을 떠나갔던 백로들도 허연 수염의 바우 할아버지가 마을로 돌아오기 몇 년 전부터 다시 돌아와 소나무에 둥지를 틀어 살고 있었습니다.
바우 할아버지는 해가 뜨면 둥구나무 아래 앉아 훨훨훨 날아다니는 백로들을 쳐다보며 지냈습니다. 백로들을 쳐다보는 바우 할아버지의 눈에는 뒷동산에서 꽃 목걸이를 만들고 꽃 모자를 만들며 노는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만이 보이는 듯 허연 수염에 덮인 입가에 웃음을 만들어 띄워 보내고 있었습니다.
옛 일을 알고도 일부러 다 잊어버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미촌 마을 사람들에게 바우 할아버지와 분이, 백로의 이야기는 점점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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