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합창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마루방 구석에 대충 개켜있는 어머니의 시장 옷에서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났습니다. 시장에서 생선 좌판을 놓고 장사하러 나갈 때면 입었다가 집에 돌아오면 벗어 놓곤 하는 옷입니다.
어머니는 비린내나는 시장 옷을 입으면서도 자꾸만 눈길이 방 가운데 조그맣게 접혀져 놓여 있는 학예회 안내장 위에 머물렀습니다.
“아니야. 생선 장사를 나가야지. 하루 장사를 놓으면 얼마나 손핸데…….”
고개를 설레설레 젖는 어머니의 눈으로 안내장이 자꾸만 날아와 박혔습니다. 프로그램이 규형이의 눈빛이 되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오늘 학예회에 꼭 나오셔야 해요.’
‘규형아, 미안하다. 엄만 장사를 나가야 하잖니. 엄마는 눈을 감고도 규형이가 합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엄마가 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렴.’
‘싫어.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엄만 보셔야 한단 말예요.’
떼를 쓰는 규형이를 겨우 달래어 보내면서 아팠던 가슴이 학예회 프로그램이 인쇄된 푸른 안내장이 눈으로 들어 와 가슴에 박히자, 시장 옷을 입던 어머니의 손이 단추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 가 프로그램을 펼쳤습니다. 「합창 - 어머님 은혜 외 1 곡 - 김규형 외 19명」이라는 글씨 위로 세 살 적 규형이의 얼굴이 비쳤습니다.
시장에서 생선을 파느라 집에 있을 틈이 없는 어머니에게 규형이는 너무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세 살 짜리 답지 않게 제법 크고 말 도 또랑또랑 잘 했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엄마가 바쁜 것을 알고 칭얼대지도 않았습니다. 엄마가 장사 나가며 이웃집에 맡겨 두면 이웃 집 친구랑 어울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놀다가 졸리면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곤 하였습니다.
겨울 어느 날, 생선을 다 팔고 늦게 돌아 온 어머니는 힘없이 늘어져 앓고 있는 규형이를 보았습니다. 규형이의 몸은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약을 사다 먹이고 난 후에는 열이 조금 내리고 정신이 나는 듯했습니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 다 낫지 않은 규형이를 이웃집에 맡기고 생선을 팔러 나갔습니다. 규형이와 둘이만 사는 어머니는 생선 장사로 겨우 살아가는 형편이어서 장사를 아니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펄펄 열이 끓는 규형이를 들쳐업고 병원을 찾았을 때, 어머니는 너무 늦게 데리고 왔다고 의사 선생님께 호된 야단을 들어야 했습니다. 규형이는 급성 폐렴이었습니다.
“엄마, 엄마, 시장 가지말고 규형이하고 놀아 줘.”
규형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래. 엄마 여기 있다. 규형아, 정신 차려.”
어머니는 어린 규형이의 손을 꼬옥 쥐고 눈물을 삼켰습니다.
규형이의 폐렴은 빨리 낫지 않았습니다. 규형이는 여러 날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한동안 나가지 못했던 생선 장사를 다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규형이에게 점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누가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귀에 가까이 대고 큰 소리로 부르거나, 얼굴 앞에서 이야기해야 멀뚱히 쳐다보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곤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규형이를 데리고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진단 결과에 놀라 한동안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규형이는 지난번에 앓았던 폐렴 때문에 귀에 장애가 생겨서 전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슴을 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치료하기에는 늦어버린 때였습니다.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며 규형이는 어릴 때 하던 말도 잊어버리고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던 어머니는 시장 옷을 벗고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으며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오늘 하루 생선 못 팔면 어때. 규형이를 돌보지 않고 장사하느라 그 애를 청각 장애아로 만들었는데, 이제 다시 그 애의 가슴을 멍들게 할 수는 없어.”
초겨울인데도 영지 학교에는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멀리 남쪽으로 한라산은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앉아 있었지만, 학교 울타리 가에 심어 놓은 개나리는 잎이 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 꽃을 피우려고 불끈불끈 꽃눈을 부풀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교문을 들어서며 규형이를 영지 학교에 입학시키던 6년 전의 일을 새삼 떠올렸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취학 통지서가 왔을 때 어머니는 규형이를 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남들은 다 가는 초등학교. 그러나 규형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떳떳이 초등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규형이를 영지 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영지 학교는 규형이와 같이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청각 장애 아이들과,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 아이들이 선생님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공부하는 학교였습니다.
규형이는 영지 학교에서 말을 배웠습니다. 비록 소리내어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입술을 움직여서 말하는 것을 배웠고, 손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였습니다. 영지 학교 친구들은 모두 그렇게 입술과 손으로만 말을 하였지만 손을 잡으면 모두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규형이의 영지 학교 6년은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구화와 수화를 배우기 전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막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규형이가 울 때면 어머니는 규형이의 입이 되어 주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파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6년이 흐르고 졸업을 앞 둔 학예회 날입니다.
학예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규형이가 눈이 보이지 않는 영미의 손을 잡고 나와 시작 인사를 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영지 학교의 학예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솜씨를 보고 축하해 주시기 위해 오신 어머니, 아버지와 여러 어른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영미가 인사말을 하면 규형이는 영미의 입술의 움직임에 맞추어 수화를 하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저희들을 지금까지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을 낳고 키우실 때 말을 하지 못한다고, 앞을 보지 못한다고 못난 아들, 못난 딸로 내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아이들보다 더욱 깊은 사랑을 쏟아 주셨습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부모님의 사랑으로 저희들은 장애를 이기고 이만큼 자랐습니다.”
규형이는 수화를 하면서도 관중석을 이리 저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뒷줄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수화를 하는 규형이의 손이 더욱 힘차게 움직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저희들은 비록 불편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불편함을 이기고 꿋꿋이 공부하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자랑스런 아들딸이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마련한 학예회의 순서 순서마다 힘찬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어머니는 있는 힘껏 손뼉을 쳤습니다. 강당이 떠나갈 듯 우렁찬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시각 장애 아이들의 노래는 고운 무지개가 되어 강당을 곱게 수놓았습니다. 청각 장애 아이들은 고운 옷을 입고 선녀가 되어 아름다운 부채춤을 펼쳤습니다.
한 가지 순서마다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솜씨를 펼치는 아이들의 꿈도 둥둥 떠올랐습니다.
마지막 순서로 청각 장애 아이들이 합창을 하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무대에 선 아이들의 눈망울들이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에 가득 박혀 있는 별들을 아이들의 눈에 박아 놓은 듯했습니다.
아이들은 먼저 손을 모아 시 낭송을 하였습니다.
< 수화 >
목소리는 안으로
잠겨 들어도
손끝에 생각 달고
날려 보내면
민들레 꽃씨처럼
날아 오지요
소프라노 고운
순이의 손짓
음정은 없지만
떨리는 리듬
손끝에 달고
올려 보내면
실비처럼 내려 오지요
하느님의 젖은 목소리, 목소리
남들은 몰라도
우리는 알아요
하느님과 나 그리고 순이
셋이 모인 자리에선
맘 먹은 게 모두
말이 되니까
아이들은 시처럼 고운 손짓으로 마음 속 이야기를 하늘로 띄워 보냈습니다.
선생님의 지휘에 따라 합창이 시작되었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무대에 선 아이들의 손이 노랫말을 만들며 똑같이 움직였습니다. 아이들의 입에서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추어 천사의 노래보다 더 고운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음정도 맞지 않고 발음도 맞지 않는 소리였지만,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아버지의 귓속으로, 어머니의 가슴으로 들어와 박혔습니다.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강당 구석 누군가의 입에서 아이들의 손에 맞추어 노래 부르고 있었습니다. 곧 강당 전체에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푸른 하늘 그 보다도 높은 것 같애.”
무대에 선 규형이의 눈에서 굵은 진주 방울이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습니다. 규형이는 손으로 입술로, 그리고 눈으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규형이의 노래를 듣고 있는 어머니도 가슴속의 말을 눈으로 흘려 보냈습니다.
‘규형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무대에 선 아이들의 모든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소리 없는 합창은 어머니, 아버지의 가슴을 흔들며 높은 하늘로 하늘로 고운 소리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
※ 이 동화의 가운데 있는 동시 <수화>는 제주도의 아동문학가 송상홍 선생님의 동시를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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