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야, 아리야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사스레피나무 작은 숲을 확 헤친 선정이는 온 몸이 진득거리는 더위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허벅소의 맑은 물이 왈칵 선정이의 가슴으로 밀려들어와서 더위를 모두 쫓아버렸다.
내 건너편 숲의 터주대감인 구실잣밤나무 고목의 가지 사이를 휘파람 불며 뛰놀던 바람도, 내를 건너 선정이에게로 불어와서 머리카락을 나풀나풀 날렸다.
“아이, 시원해!”
선정이의 입에서 탄성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누나, 가막골 바람이 모두 여기에만 모여 있나 봐.”
동철이의 재미있는 말에 선정이와 선영이가 깔깔 웃었다.
허벅소의 물은 맑기도 하지만 한여름인데도 시원했다. 물 속에 몸을 담근 선영이는 후텁지근한 바람만 나오는 선풍기나, 에어컨 공기로 늘 시원한 은행보다도 허벅소의 물이 훨씬 시원하다고 생각하였다.
선정이와 동철이는 여름방학이 되어 가막골 큰댁에 다니러 왔다.
오늘은 장마 뒤끝이라서 그런지 유난히도 덥고 몸이 끈적거렸다. 사촌 언니 선영이가 허벅소의 물이 시원하다고 멱감으러 가자고 해서 같이 따라왔다.
허벅소는 물이 고인 웅덩이 모양이 물허벅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리야~, 아리야~.”
갑자기 내 서편 숲에서 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 아리 할아버지야. 선정아, 동철아, 빨리 나와서 옷 입어.”
선영이가 급히 외치며 옷을 벗어둔 곳으로 갔다.
선정이는 선영이가 서두르는 바람에 무엇이 어떻게 되는 지도 모르는 채 급히 물에서 나와 옷을 입었다. 그러나 급한 마음과는 달리 젖은 몸을 닦지도 않고 입으려니 옷이 몸에 달라붙어서 잘 입어지지 않았다.
“빨리 입어, 빨리.”
선정이가 아직 절반도 안 입었는데 선영이는 벌써 다 입고 재촉을 했다.
“아리야~, 아리야~.”
숲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숲 밖으로 나와 슬픈 목소리로 아리를 부르며 허벅소로 걸어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머리가 허연 칠순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선정이네가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보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선정이와 동철이는 다 입지 못한 옷을 움켜잡고 선영이를 따라 얼른 사스레피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천천히 옷을 입으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멍석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허벅소에 대고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리야, 빨리 나오너라. 산에 비가 와서 물이 불었어. 큰물이 내려온다. 빨리 나와.”
선정이는 그 할아버지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모두 이상하게 여겨졌다.
“언니, 저 할아버지가 누구야?”
“으응, 아이들이 아리 아리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할아버지야.”
“아리 아리 할아버지? 아리 아리가 누구야?”
“저 할아버지의 손녀 이름이야.”
“그런데 왜 아무도 없는 허벅소에 대고 혼자 이야기하는 거야?”
이번에는 동철이가 사뭇 궁금한 듯 물었다.
“3 년 전 여름에 우리 반이었던 아리가 이 허벅소에서 멱감다가, 산에 비가 와서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려 죽었어. 그래서 그 때부터는 가끔 미쳐서 이곳에 와서 아리를 부른단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리야, 빨리 빨리! 저것 봐. 큰물이야. 빨리 피해!”
할아버지는 내 위쪽을 가리키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얼른 높은 바위로 올라갔다.
선정이는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그러나 큰물은커녕 바위 사이로 가는 물줄기가 졸졸 흘러 내려올 뿐이었다.
“아리야~, 아리야~. 빨리 나오라고 할 때 안 듣더니 기어코 물에 휩쓸렸구나. 아리야~, 아리야~.”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슬픈 메아리가 되어 냇가 바위에 부딪혔다가 구실잣밤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할아버지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허벅소만 망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비 한 마리가 저공 비행으로 날아와 허벅소 물을 차고 쏜살같이 날아오르고, 숲에서 바람이 불어와서 잔물결을 만들어 놓았다.
선정이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올라옴을 느꼈다. 그 덩어리가 눈으로 올라가서 눈물샘을 건드렸다.
한참을 앉아있던 할아버지는 천천히 일어나서 바위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슬픈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할아버지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선정이네가 숨어있는 걸 본 것이다.
“아리야, 너 거기에 있었구나. 이리 온. 내 귀여운 아리.”
할아버지가 선정이를 보며 불렀다.
“선정아, 동철아, 빨리 달아나.”
선영이가 동철이의 손을 잡고 숲을 헤치며 달렸다. 선정이도 따라 달렸다.
“아리야, 어디 가니? 할애비야!”
할아버지가 아리를 부르며 선정이네를 쫓아왔다.
선정이의 발은 급한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쫓아오는 할아버지를 돌아보며 달리던 선정이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경사진 숲길을 데굴데굴 구르는 선정이의 의식 속으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리야~, 아리야~.”
선정이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낯선 방에 누워 있음을 알았다. 무릎이 아파서 얼른 일어나 아픈 곳을 살펴보았다. 무릎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문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저 애는 아리가 아니에요.”
“아니야, 내가 허벅소에서 데려온 내 손녀야.”
“글쎄, 아버님. 아리는 3 년 전에 죽었어요. 이제는 제발 아리 생각을 하지 마시고 아이들을 데려오지 마세요.”
“아리는 안 죽었어. 아리는 저렇게 돌아왔어.”
“아버님, 제발 진정하세요. 왜 전들 아리 생각이 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아리는 돌아오지 않아요. 저 애는 동백나무집 손녀예요.”
선정이의 가슴에서 다시 큼직한 덩어리가 눈으로 올라왔다. 선정이는 아픔을 참고 일어섰다. 생각한 것보다는 걷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방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어이구, 내 귀여운 손녀 아리가 깨어났구나.”
할아버지가 웃으며 다가와 선정이의 손을 잡았다.
“이제 깨어났니? 불편할 텐데 더 누워 있지 않고…….”
아리 엄마가 얼른 선정이를 부축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만하길 다행이다. 너희 큰댁에도 연락했으니까 너희 큰아빠, 큰엄마가 곧 오실 거야.”
“두 분이 하시는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아줌마가 아리 엄마세요?”
“그래. 우리 아리가 허벅소에서 멱감으며 놀다가 죽은 후에 할아버지께서 정신이 이상해지셔서 가끔 그러는 구나. 네게 참 미안하구나.”
할아버지는 연신 웃으시면서 선정이의 손을 잡기도 하고 뺨을 어루만지기도 하셨다. 허벅소에서 아리를 부를 때의 슬픈 얼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줌마,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아리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단다. 동네 여자아이들을 보고도, ‘아리야, 아리야.’ 하시며 억지로 데리고 오시곤 한단다.”
아리 엄마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선정이의 눈에도 이슬방울이 반짝였다. 슬픔이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아줌마, 제가 여기 있을 동안이라도 아리가 되면 안 될까요?”
뜻밖의 선정이의 말에 아리 엄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허락하셨다.
“할아버지, 저 아리예요.”
선정이는 할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의 가슴은 따스했다.
“그래, 내 귀여운 새끼 아리야!”
선정이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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