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놀이터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12 층 아파트에는 창문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창문들은 모두 꼭꼭 닫혀진 채로 열리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파트 사람들은 아무리 무더운 여름에도 결코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원한 에어콘 바람이 새어나갈까봐 더욱 꼭꼭 창문을 닫곤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아파트 놀이터의 나무에서 씨암 씨암 매미 소리가 들렸지만 창문들은 닫혀진채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12 층 아파트의 꼭 가운데 있는 707 호의 창문만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 창문으로 작은 얼굴이 고개를 내밀고 아래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벌써 한 시간 동안을 작은 얼굴은 창가에서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동안에 다른 얼굴은 창문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열려진 창문 안 방안에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작은 얼굴은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열 번 쯤은 울린 후에야 작은 얼굴은 창문에서 사라져 전화벨이 울리는 곳으로 갔습니다.
“ 여보세요. ”
-준호니 ? 아직 학원 안 갔구나. 뭘하고 있니 ? 빨리 가야지. 컴퓨터 학원이 열 한 시부터 시작하잖니. 컴퓨터 학원이 끝나면 식당에 가서 엄마가 준 만원으로 뭐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먹도록 하고, 두 시부터는 속셈 학원에 가도록 해라. 그리고 피아노 학원에 가서는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하고, 원장 선생님께 엄마가 내일 찾아 뵙는다고 말씀 드려라. 피아노 끝나면 놀지 말고 곧장 집으로 돌아 와서 공부해야 한다. 과외 선생님이 여섯 시에 온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숨 쉴 새 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준호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습니다.
“ 어, 엄마 ……. ”
-왜 그러니 ? 또 학원 가기 싫단 말이니 ? 엄마가 저녁에 들어갈 때 백만원 짜리 로보트 하나 사고 들어갈께 학원에 빠지지 말고 다녀 오너라. -
“ 엄마, 전 그런건 안 가져도 좋단 말예요. 엄마가 나하고 같이 있어주기만하면 된단 말예요. ”
-왜 ? 706 호 영철이랑 708 호 민수가 다 백만 원 짜리 로보트를 가졌는데, 우리가 영철이네나 민수네 보다 못한게 뭐 있니 ? 그리고 엄마가 부녀회 활동과 동창회 일로 바쁘다고 했는데, 준호가 그런 것 쯤은 이해를 해 줘야지. 엄마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은 다 준호를 위한 일이야. -
“ 엄마 ……. ”
-아뭇소리 말고 빨리 학원에 가도록 해. 엄마도 지금 바쁘단 말야. 전화 끊는다. -
전화가 찰칵 끊겼습니다.
준호는 힘 없이 수화기를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학원 가방 두 개를 들고 아파트 문을 열었습니다.
햇볕에 데워진 여름 한낮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준호의 얇은 옷 속으로 파고 들어 땀을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엘리베이터의 벨을 누르자 1 층을 표시하고 있던 표시등이 2 층, 3 층을 차례로 가리키더니, 금 세 7 층을 가리키며 ‘ 땡 ’ 하는 소리와 함께 스르르 문이 열렸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던 준호는 그냥 돌아서서 바로 옆에 있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준호의 발걸음은 터덜터덜 무겁기만 하였습니다. 손에 든 학원 가방은 오늘 따라 더욱 무겁게만 느껴졌습니다.
7 층 부터 1 층 까지 엘리베이터로는 금세 내려갈 수 있었지만, 계단을 내려가려면 꼬불꼬불 몇 번을 꼬부라져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준호는 엄마나 아빠하고 함께 오르내릴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렸지만, 혼자 다닐 때는 계단을 이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준호는 엘리베이터가 싫었습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가기 싫은 학원을 억지로 가야 할 때는 엘리베이터가 더 싫었습니다.
준호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밖에는 뜨거운 햇볕이 가득 내려서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준호는 햇볕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햇볕이 짧은 옷을 입은 준호의 목덜미와 팔다리에 달려들어 학원 가는 발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습니다.
아파트 놀이터 옆을 지나다 말고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놀이터 저 편 나무 밑을 바라보았습니다.
또 그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벌써 10 일 째 준호가 학원으로 갈 때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학원에서 돌아올 때는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곤 했습니다.
처음엔 별 관심없이 그냥 지나쳤지만 닷새가 지나면서 부터는 학원에 갈 때 올 때 마다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전처럼 그냥 지나쳐 가려던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쭈글쭈글한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이 어느 한 곳 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준호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습니다. 표정이 없던 할아버지의 얼굴에 봉숭아 씨앗같은 작은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의 미소에 이끌리듯 준호의 발이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쪽으로 움직여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앉았던 자리를 조금 움직여 준호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눈가에 더욱 깊은 주름을 만들며 웃어 보이고는 다시 조금 전에 바라보던 곳으로 눈을 향했습니다.
준호도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116 동과 117 동 사이의 작은 틈으로 얕으막한 산이 푸른 옷을 입고 앉아 있고, 흰구름이 그 위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 할아버지, 무얼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세요 ? ”
“ 고향을 보고 있지. ”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치 축축하게 젖어있는듯 했습니다.
준호는 더욱 궁금했습니다.
“ 고향요? 할아버지의 고향이 어디인데요 ? ”
그제야 할아버지는 준호를 보았습니다.
“ 네 이름이 뭐지 ? ”
“ 준호요. 박준호. ”
“ 준호는 고향이 어디지 ? ”
“ 서울이예요. 강북에 살다가 얼마 전 여기 강남으로 이사와서 살게 되었어요. 할아버지 고향은 어디세요 ? ”
“ 고향 ? 저 산과 저 구름이 내 고향이란다. ”
할아버지는 다시 116 동과 117 동 사이로 눈을 옮겼습니다.
“ 예 ? 산과 구름이 고향이라구요 ? ”
준호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알쏭달쏭하기만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준호의 손을 잡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지만 참 따뜻했습니다.
“ 네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로구나. 이제 내게 고향이 없단다. ”
준호는 할아버지의 눈을 빤히 올려다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도 준호의 눈을 내려다 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이 할애비의 고향은 작은 산과 넓은 바다가 어울어진 바닷가 마을이었단다. 난 거기서 산비탈 밭에 농사도 짓고, 조그만 배로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아가곤 했단다. 그런데 우리 마을 옆에 해수욕장이 있고 폭포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세 논밭들을 밀어젖혀 우뚝우뚝 호텔들이 들어서고, 콘돈지 큰독인지 하는 것들이 생겼단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단다. 파랗게 보리가 자라던 밭에는 보리 대신 잔디를 심어 놓더니 쬐그만 공을 막대기로 치는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 버리고 말았단다. ”
할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후- 한숨을 쉬며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 이 할애비도 돈을 많이 주겠다는 바람에 아들 놈 대학 공부 시킬라고 호텔을 짓겠다는 사람에게 논과 밭을 팔아버렸단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와서는 동네에 있는 초가집들을 큰 돈을 주고 막 사버리는 것이었단다. 그러나 집만은 조상들로 부터 물려 받은 것이라 절대 않으려 했지만, 다른 집들이 모두 팔리고 우리 집만 남아 있었으니 아니 팔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이렇게 아들네 집으로 와서 살고 있는 것이란다. 저기 흘러가는 저 구름과 저 산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은 잃어버린 고향에 있는 듯 하거든. ”
준호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조금은 어려웠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은 알 수 있었습니다.
“ 할아버지, 그런데 왜 매일 혼자 여기 나와 앉아 계시는 거예요 ? ”
“ 으응.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단다. 애 에미 애비는 모두 회사에 나가고, 하나 있는 손주는 놀이방에 가 버리기 때문에 나는 늘 혼자란다. 그래서 아이들 노는 모습이나 보려고 이 놀이터에 앉아 있곤 했지만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별로 없구나. ”
“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 시간이 거의 없어요. ”
“ 그래 ? 조그만 아이들이 뭘 하느라고 놀라고 하는 방학 때인데도 놀 시간도 없이 그렇게 바쁜지 원. ”
할아버지는 끌끌끌 혀를 찼습니다.
“ 컴퓨터 학원, 속셈 학원, 피아노 학원, 학원만도 여러 군데를 다녀야 해요. 거기다가 과외 공부까지 해야 해요. 그러니 놀 시간이 어디 있다구요 ?”
“ 준호는 놀고 싶지도 않니 ? ”
“ 왜요. 공부하는게 얼마나 지겹다구요 ?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해요. 학원을 한 번이라도 빼먹었다가는 엄마한테 혼나요. 그리고 학원이 쉬는 일요일에는 우리 엄만 공부 공부 하면서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하게 해요. 잠깐 놀 때에도 집에서 컴퓨터 오락을 하면서 놀라고 해요. 밖에 나가서 놀면 안 된대요. ”
할아버지는 준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쓸쓸히 웃었습니다.
“이 할애비하고 준호는 같은 점이 많구나. 준호야, 이 할애비하고 친구해 줄래?”
준호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 보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이마의 깊은 주름 속에 할아버지가 이야기한 고향 앞 바다가 잔잔한 파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준호는 그 속에서 또 시골 외할아버지 댁 뒷산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웃음이 이 할아버지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습니다.
“ 그래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꼭 저의 외할아버지 같으세요. ”
준호는 할아버지에게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준호의 조그만 손가락과 할아버지의 마디 굵은 손가락이 하나가 되어 얽혔습니다. 얽힌 손가락을 통하여 준호의 마음과 할아버지의 마음이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 참, 지금 사귄 어린 친구에게 보여줄 것이 있단다. ”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풀며 말했습니다.
“ 뭔데요, 할아버지 ? ”
“ 나를 따라 가보면 알게 될거야. ”
“ 그럼 어서 가봐요. ”
준호는 학원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할아버지의 팔을 붙들고 재촉했습니다.
“ 너 지금 학원에 가던 길이구나.”
할아버지가 준호의 가방을 보았습니다.
“ 괜찮아요. 시간이 조금 남았거든요. ”
“ 그래 ? 그럼 같이 가보자. ”
준호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습니다. 할아버지는 아파트 맨 끝 동을 돌아 아파트 울타리를 따라 걸어갔습니다. 울타리가에 심은 나무마다 한 무리 씩 매미들이 앉아 시원한 소리로 여름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 여기가 내 놀이터란다. ”
“ 할아버지 놀이터요 ? ”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곳은 아파트 단지 맨 뒤편 구석진 곳이었습니다. 그곳엔 울타리가를 따라 조그만 꽃밭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 그래. 여기다 내 고향 집의 꽃밭을 옮겨다 놓았단다. 고향을 떠나면서 가지고 왔던 씨앗들과 알뿌리들을 모두 여기다 심었단다. 이건 봉숭아, 이건 채송화, 여기 노란 건 금잔화, 저기 키가 작은 풀은 민들레인데 꽃은 벌써 져버렸구나. 그리고 저것은 수선화인데 겨울에 눈 속에서 눈보다 더 하얀 꽃을 피운단다. ”
할아버지는 준호의 손을 잡고 이 꽃, 저 꽃 하나 하나 자세히 가르쳐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꽃마다 모두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구석진 아파트 울타리가가 올망졸망 크고 작은 꽃들로 환해 보였습니다.
“ 할아버지, 이 꽃들이 모두 할아버지께서 가꾸신 꽃들이예요 ? ”
“ 그래, 고향이 보고 싶으면 여기 와서 꽃을 가꾸곤 한단다. 이 할애비의 아들은 집 안에서 편안히 놀라고 하지만, 어디 집안에 혼자 있으면 몸도 편하지 않고 갑갑해서 견딜 수 있어야지. 이렇게 꽃을 가꾸면서 지내는 게 노는 것이란다. ”
곱게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는 준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 할아버지, 저도 할아버지의 놀이터에서 함께 놀고 싶어요. 아무도 놀지 않는 아파트 놀이터보다 할아버지 놀이터가 더 좋아요. 컴퓨터 오락을 하는 것 보다, 비싼 로보트 장난감 보다 꽃을 가꾸는 것이 더 즐거울 거예요. ”
“ 그래라. 새로 사귄 어린 친구의 부탁인데 거절할 수야 없잖니. 우리 준호 같은 어린 친구들이 많이 와서 이 꽃밭 놀이터에서 함께 꽃을 가꾸며 놀았으면 좋겠구나. ”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활짝 펴지고 있었습니다.
“ 할아버지, 학원 시간이 되어서 이젠 가야 되겠어요. ”
준호는 학원 가방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 그래, 어린 친구. 내일 또 만나자. ”
준호는 할아버지 놀이터를 떠나서 학원으로 가면서 조금 전 집에서 나올 때 짜증났던 마음이 싹 사라져 버린 것을 느꼈습니다. 옷 속으로 파고들던 더위도 한결 가신 듯했습니다.
이젠 혼자가 되어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회사 일로 언제나 바쁜 아빠, 부녀회 일로 동창회 일로 여기 저기 다니느라 함께 있어줄 시간이라고는 아침 식사 때와 저녁 늦게 밖에 없는 엄마. 그러나 이젠 외로운 준호에게도 친구가 생겼습니다.
조금전 까지만 해도 무겁게만 느껴지던 학원 가방이 이젠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매미 소리가 씨암 씨암 시원스러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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