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아이 한 천 민
남이는 오늘도 혼자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습니다. 1년 전부터 남이에게는 학교에 갈 때나 집에 돌아올 때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혼자 다니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버릇이라기 보다는 혼자 다니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남이가 사는 동네에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없기 때문이라구요? 아닙니다. 이웃 집 혁이랑 철이랑 숙이가 모두 남이와 같은 3학년입니다.
그런데도 왜 남이가 혼자서만 학교에 다니느냐구요?
제 얘길 들어보면 남이가 혼자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이네가 이 산골 마을인 학골로 이사온 것은 남이가 2학년이 되던 해 봄이었습니다.
남이 아빠는 서울에서 조그만 회사를 경영하시던 사장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잘 되던 회사가 사기꾼에게 속아 사업에 실패하게 되고, 남이 아빠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집까지 팔아 빚을 갚은 다음, 거의 빈털터리가 되어 아빠의 고향인 이곳 학골로 오게 된 것입니다.
남이 아빠는 학골로 온 후로는 조그만 논마지기가 있었지만 농사를 지을 생각은 않고, 매일 매일을 술만 마시며 주정을 부리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빠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쓰곤 했지만, 그럴수록 아빠는 더 큰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어떤 때는 고함을 지르다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기도 하곤 했습니다.
남이 아빠가 술을 잡수시면 낮이고 밤이고 구별이 없었습니다. 한밤중에도 온 동네가 떠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러한 남이 아빠를 아예 상대하려고 하지도 않고, 아이들은 남이 아빠만 보면 겁이 나서 모두 숨어버리거나 달아나 버리곤 했습니다.
남이는 그런 아빠가 미웠습니다.
오늘 남이는 옆집 혁이가 새로 산 축구화를 신고 와서 친구들 앞에서 으쓱대며 자랑하는 걸 보았습니다. 뒷집 철이도 아빠가 읍에 가서 동화책을 사오셨다고 자랑을 하며 큰 소리로 읽는 걸 들었습니다.
남이는 혁이와 철이가 부럽기도 하고 밉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보다는 축구화나 동화책을 사다줄 생각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며 소리를 지르곤 하는 아빠가 미웠습니다.
운동장에서는 친구들이 혁이와 같이 축구를 하며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남이는 운동장 구석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공을 쫓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빠 미워! 아빠 미워! 왜 아빤 혁이 아빠나 철이 아빠처럼 축구화나 동화책을 사다 줄 생각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는 거야? 아빠, 혁이와 철이가 부럽단 말야.”
남이가 혼자 울고 있는 곳으로 혁이가 공을 차며 다가왔습니다.
“남이야, 이것 봐라. 우리 아빠가 새로 사 주신 축구화야.”
혁이는 축구화를 자랑하며 공을 몰고 남이의 앞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씨, 우리 아빠는 그런 것보다 더 좋은 축구화를 사 주신댔어. 피, 그깟 축구화 갖고 자랑이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희 아빤 주정뱅이라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돈도 못 벌어온대. 축구화도 못 사 주실 거야.”
남이는 주정뱅이라는 말이 혁이의 입에서 나오자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습니다. 그렇찮아도 술만 마시는 아빠가 미웠고, 축구화를 자랑하는 혁이에 대해서 은근히 부아가 올라오려던 참이었습니다.
“뭐, 우리 아빠가 주정뱅이라고?”
남이는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쥐어 허리에 대고 혁이에게 다가섰습니다.
“그래, 너희 아빤 주정뱅이야. 너희 아빠가 주정뱅이니까 너도 주정뱅이지. 하하하하.”
“뭐라고? 이게.”
남이는 혁이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힘껏 떠밀었습니다.
“이게 엇다 덤비는 거야?”
남이가 떠미는 바람에 쓰러졌던 혁이도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습니다.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이 금새 몰려들어 남이와 혁이를 둘러쌌습니다. 둘이 엉겨 붙어 싸우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말리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오히려 더 신이 나서 혁이를 응원했습니다.
“혁아, 그 꼬마 주정뱅이를 막 두들겨 줘라. 주정뱅이는 흠씬 때려줘야 해.”
“내가 왜 주정뱅이야? 울 아빠가 술을 많이 잡수신다고 내가 주정뱅이야?”
남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혁이를 응원하는 아이들의 응원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지만 혁이보다 힘이 센 남이이기 때문에 그래도 혁이를 밑에 깔고 앉았습니다.
선생님이 오셨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혁이를 싫건 때려주었을 것입니다. 혁이는 코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싸운 벌로 반성문을 쓰고, 교실 청소를 하면서도 남이와 혁이는 마주 보며 식식거렸습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며 남이는 혁이와 주정뱅이라고 놀리며 혁이만을 응원하던 아이들이 미워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보다는 아빠가 더 미웠습니다.
“씨, 내가 왜 주정뱅이야? 아빠가 술을 많이 잡수신다고 나도 주정뱅인가? 혁이 녀석, 또 다시 주정뱅이라고 하면 가만 안 둘 테야. 그리고 아빠도 미워. 아빠는 다른 애들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동네 사람들이 비웃는 것도 모르고 술주정만 하니 도대체 뭐야!”
남이는 돌멩이를 툭툭 차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남이는 가방을 마루에다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빈터에서 숙이랑 동네 애들이 꼬마야 꼬마야 노래를 부르며 긴줄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이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 숙이네가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같이 어울려 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놀자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같이 놀자고 해도 끼워 주지 않을 건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물끄러미 턱을 고이고 쭈그리고 앉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남이가 앉아 있는 곳으로 숙이가 왔습니다.
“남이야, 미안해. 난 너하고 놀고 싶은데 엄마가 같이 놀지 말랬어. 주정뱅이와 같이 놀면 안 된 댔어.”
남이는 숙이의 입에서 주정뱅이란 말이 나오자 화가 벌컥 났습니다.
“그래, 난 주정뱅이라서 너같은 계집애하고는 안 논다. 혁이하고 철이하고나 잘 놀란 말이야.”
남이는 숙이를 확 떠밀고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남이야,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말을 잘못 했나 봐.”
숙이는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진 채 달려가는 남이를 다급하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남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치며 달려가 버렸습니다.
“난 주정뱅이란 소리가 듣기 싫단 말야. 주정뱅이가 아닌 애들하고나 놀란 말야.”
남이는 슬펐습니다. 학교에서 짝꿍인 숙이마저도 주정뱅이란 말이 입에서 나오다니…….
집으로 돌아온 남이는 마루에 엎드려 엉엉 울었습니다. 혁이가 미웠습니다. 숙이도 미웠습니다. 애들이 모두 미웠습니다. 아빠는 더욱 미워졌습니다.
학교 가기가 싫어졌습니다. 내일도 학교에 가면 애들이 주정뱅이라고 놀릴 것입니다. 미운 숙이의 옆자리에 앉기도 싫어졌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니 자꾸자꾸 눈물이 솟아올라 방울져 떨어졌습니다.
“남이야, 왜 울고 있니?”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이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뒤돌아보았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사립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엄마!”
남이는 얼른 달려가 엄마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설움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엄마, 애들이 날 보고 주정뱅이라고 놀린단 말예요. 혁이와 숙이도 날 보고 주정뱅이라고 했어요. 술만 마시는 아빠가 미워요.”
남이는 엄마의 가슴을 두드리며 엉엉 봇물을 터뜨렸습니다.
“자, 자. 우리 남이 착하지? 아빠를 미워하면 안돼요. 그만 울고 아빠를 보렴. 아빠가 다시는 술을 안 잡수시겠대.”
남이는 엄마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고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아빠를 보았습니다. 눈물 때문에 아빠의 얼굴이 어른거려 보였습니다.
“남이야, 그 동안 아빠가 미웠지? 아빤 이젠 술을 안 마시고 남이한테 좋은 아빠가 되기로 했단다.”
아빠가 다가와서 남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남이는 얼른 눈물을 닦고 아빠를 다시 보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매일 술만 잡수시며 환할 날이 없었던 아빠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엄마도 환히 웃고 계셨습니다.
“남이야, 아빠를 속여 회사를 망하게 하고 달아났던 사람이 경찰에 잡혔대. 아빤 회사를 다시 일으킬 수 있게 되셨어. 그렇지만 아빤 서울에 가서 회사를 경영하시지 않고 엄마랑 남이랑 같이 이 곳에서 사신대.”
“엄마, 그게 정말야?”
“그럼, 아빠에게 여쭤봐.”
남이는 얼른 아빠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빤 말없이 남이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얼굴에는 햇살 같은 미소가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남이는 아빠의 웃는 모습만으로 아빠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 이건 아빠가 남이에게 용서를 비는 뜻으로 주는 거야.”
아빠의 손에서는 번쩍번쩍 새 축구화와 축구공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남이는 얼른 받아 들어 축구화를 신어 보았습니다. 발에 꼭 맞았습니다. 혁이의 축구화보다 더 멋있어 보였습니다.
“아빠, 고맙습니다.”
남이는 신이 나서 축구화를 신은 채 공을 들고 밖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숙이네가 놀고 있을 빈터로 달려갔습니다. 숙이에게 가서 떠민 것을 사과할 생각이었습니다. 혁이에게는 내일 학교에 가서 손을 내밀어 사과할 작정입니다.
이젠 애들이 주정뱅이라고 놀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아빠를 미워했던 마음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젠 아빠가 더 없이 좋아졌습니다.
축구화를 신은 발이 하늘로 붕붕 날아올랐습니다. 새 축구화를 신은 발로 축구공을 힘껏 차올렸습니다. 남이의 마음도 축구공처럼 하늘로 치솟아 올랐습니다.
빈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느티나무 밑에 앉아 울고 있는 숙이도 보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밉던 아이들이 모두 정답게 보였습니다.
남이는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느티나무 가지에서 까치가 깍깍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마악 지려는 저녁 해님이 남이를 비추며 남이의 얼굴처럼 환히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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