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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아이의 글밭/동화

<창작동화> 불과 샘

 < 창작동화 >


불과 샘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 1 >


고요만이 함빡 배어있던 산기슭에서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들들들들 -- . 슬슬슬슬 -- . 들들들들 -- . 슬슬슬슬 -- .

그러나 그 소리는 매일 아침 숲 속 마을을 깨우는 정겨운 소리였습니다.

나뭇가지에서 잠자던 새들도 그 소리를 들은 후에야 잠에서 깨어 아침을 준비하고, 토끼도 굴 속에서 나와 귀를 쫑긋 세우곤 했습니다.

“아, 벌써 날이 밝았군.”

숲 속 마을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굴뚝으로 연기를 뿜어 올리고 밭에 나갈 준비를 하곤 했습니다.

숲 속 마을은 언제나 이렇게 아침이 밝곤 했습니다.

들들들들 -- .  슬슬슬슬 -- .  들들들들 -- .  슬슬슬슬 -- .

얕으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숲 속 마을 불뫼골에서는 거의 매일 이런 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아침을 깨우는 들들들들 슬슬슬슬 소리는 산기슭 옹기집 안에서 들리고 있었습니다.

옹기집 넓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옹기마다 담겨 있는 물 속에는 작은 하늘이 하나씩 들어 있었습니다. 그 작은 하늘에 하얀 조각 구름이 흐르고, 불뫼봉 그림자가 어른거리면, 숲 속의 새들과 작은 짐승들이 모여들어 옹기집 마당에서 놀곤 했습니다.

옹기집 주인은 머리와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하얀 한복을 입고 하얀 헝겊으로 이마를 질끈 동이고 지냈습니다. 옷에 흙이 묻어 더러워지면 곧 다른 옷으로 갈아입곤 하여, 늘 하얀 옷차림이 변함이 없었습니다. 흙을 만지고 다루는 옹기장이로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희지 않는 부분은 얼굴과 손발 뿐이었습니다.

옹기집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이 곳에 들어와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지금까지 여기에서만 살아왔습니다. 옹기집 할아버지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옹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이웃 섬나라 사람들이 이 땅에서 물러가고, 총소리와 대포 소리가 땅을 온통 흔들던 큰 싸움이 끝난 다음 해였습니다.

“바로 이 곳이야. 커다란 나의 죄를 씻고 죄의 댓가를 치를 수 있는 곳은. 이 곳에서 옛날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다시 태어났어.”

마을에 들어오던 날, 할아버지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무도 할아버지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불뫼골 아이들은 옹기집 할아버지를 산신령님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옹기 가마 만들 자리를 고른 끝에, 불뫼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터를 골라 작은 초가집 한 채를 짓고, 그 옆에 가마를 만들었습니다.

옹기집의 또 한 옆에는 한여름에도 차가운 물이 퐁퐁 솟아나는 맑은 샘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새벽이면 샘으로 가서 맑은 물로 몸을 씻고 불뫼봉으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불뫼봉 꼭대기에서 동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면 할아버지의 눈 앞으로 활동 사진이 돌아가듯 옛날의 모습들이 차르르 스치고 지나가곤 했습니다.

“하늘이여, 내 지은 죄를 갚으려 하오니 도와주소서.”

할아버지의 기원이 새벽 공기에 섞여 하늘로 올라가면, 동쪽 지평선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려고 붉은 빛살을 뻗히기 시작했습니다.


               < 2 >


샘은 오랜 세월을 홀로 살아왔습니다.

자기가 언제 땅 위로 나와 흐르게 됐는지조차 이젠 기억이 아련하였습니다.

땅 속 작은 터널을 이리 굽고 저리 돌아 흐를 때, 샘물의 소원은 밝은 태양이 비치는 땅 위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샘물은 어둠의 터널을 헤치며 땅 위로 나가는 길을 무수히 찾아다녔습니다.

불뫼봉 기슭 땅 밑에 까지 왔을 때 샘물은 작은 틈새로부터 땅 속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샘물은 빛을 따라 작은 틈새를 비집고 힘껏 솟아올랐습니다.

아 !

저절로 감탄의 소리가 나왔습니다.

밝은 햇빛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 휘어진 가지와 가지 사이로 솔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오고 있었습니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봉우리가 햇빛을 받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횃불 같았습니다.

“바로 이곳이야. 내가 자리 잡아 살면서 맑은 물을 품어 올릴 곳은.”

샘은 물을 뽑아 올려 깨끗한 바위로 둘러 싸인 오목한 웅덩이에 채우며 중얼거렸습니다.

샘은 한동안 행복했습니다.

낮에는 밝은 햇빛과 소나무 그늘이 어울어져 추는 춤을 바라보며 산새들과 작은 짐승들의 목을 축여 주었고, 밤에는 까만 하늘에 점점이 찍힌 별들의 도란거림을 듣곤 했습니다.

산새들과 작은 짐승들이 자기에게 와서 물을 마시며 마른 목을 적실 때에 샘의 마음에는 기쁨이 솟았습니다. 기쁨이 솟을 때마다 샘은 더욱 맑고 시원한 물을 품어올렸습니다.

세월이 한없이 흘러갔습니다. 불뫼봉을 하얗게 덮은 눈이 녹고 두견새 울음따라 진달래가 붉게 피고 지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샘은 가슴 한 쪽이 점점 비어감을 느꼈습니다. 처음엔 잘 알지 못했지만 빈 가슴의 넓이가 넓어져감에 따라 그 곳에 더 큰 기쁨을 채워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샘은 빈 가슴에 기쁨을 채워줄 누구인가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푸른 숨을 쉬던 초록 잎새들이 온통 붉게 물들어 불뫼봉이 타오르는 횃불같이 되기를 수 백 번.

어느 날,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소 등에 노인들을 태우고 불뫼봉 기슭에 들어왔습니다.

“딱콩총을 가진 섬나라 놈들도 여긴까진 들어오지 못할 거예요.”

“산이 깊고 맑은 샘이 솟는 이곳에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사람들은 아름드리 나무들을 베어내어 집을 짓고, 밭을 일구기 위해 숲을 태웠습니다.

타오르는 숲의 불길을 바라보며 샘은 이제 저 사람들이 빈 마음에 큰 기쁨을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숲을 태운 사람들이 샘의 물을 마시고 그 손자가 샘의 물을 마시고, 또 그 손자의 손자가 샘의 물을 마시곤 했지만 샘의 가슴은 여전히 비어있는 채 기쁨이 채워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샘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 맑은 물을 품어 올리며 기쁨을 채워 줄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 3 >


임진 난리를 피해 불뫼봉 기슭에 들어온 사람들이 숲을 태울 때 불은 그곳에서 처음 피어났습니다.

부싯돌 속에서 튕겨져 나올 때는 수줍게 수줍게 피어났지만 곧 힘을 내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옮겨주는 대로 여기에 붙고 저기에 붙고 어디에든 덤벼들어 활활 타올랐습니다.

불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에 불뫼봉 아래쪽 숲을 온통 삼켜버렸습니다. 참나무, 상수리나무, 단풍나무, 오리나무, 소나무, ……. 어느 나무든지 불의 위력 앞에 맞서지 못했습니다.

불은 신이 났습니다. 마구 할퀴고 삼키며 숲의 나무들을 모조리 태웠습니다.

사흘 낮 사흘 밤을 기세를 부리다 불은 기세를 낮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모양없는 기운만을 연기에 싣고 위로 위로 올라갔습니다.

불의 기운은 구름을 타고 여기 저기 떠다녔습니다. 그러나 세차게 타오르려는 힘을 억누르지 못하여 우릉 우릉 울부짖으며 태울 것을 찾아 여기 저기 살펴보았습니다.

가을 어느 날, 먼 바다까지 흘러갔던 구름이 다시 불뫼봉 곁을 지날 때 불의 기운은 불뫼봉이 빨갛게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봉우리를 온통 물들인 붉은 단풍이 저녁 햇빛을 받아 활활 타오르는 횃불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불의 기운은 갑자기 힘이 뻗쳐올랐습니다.

“우르릉 우르르릉, 저기에 내 힘을 쏟아 붓자 !”

우릉 우릉 거리던 불의 기운은 구름이 불뫼봉을 시커멓게 덮는 순간 번쩍이는 번개가 되어 불뫼봉에서 제일 큰 참나무를 들이쳤습니다.

참나무 커다란 둥치가 우지끈 부러지며 마른 잎에 불이 붙었습니다.

불은 한동안 억눌렀던 힘을 온통 쏟아서 힘차게 타올랐습니다. 단풍 든 마른 잎이건 싱싱한 푸른 잎이건 가리지 않았습니다.

삽시간에 불뫼봉 전체가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습니다. 이름 뿐인 불뫼봉이 아니라 진짜 불이 붙은 횃불처럼 타오르는 불뫼봉이 되었습니다.

산새들은 벌써 다른 산으로 날아 가고 작은 짐승들은 허둥지둥 불길을 피해 달아났지만 짐승들의 달음질보다 불이 번지는 속도가 빨라 타 죽는 짐승들이 많았습니다.

사슴 두 마리와 토끼 세 마리가 샘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샘아, 우릴 살려 줘 !”

“그래, 얼른 내 속으로 들어 와라.”

샘은 사슴과 토끼들을 품에 안아 콩콩 뛰는 가슴들을 시원한 물로 식혀주었습니다. 그러자 샘의 빈 가슴 한쪽이 작은 기쁨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야. 사슴과 토끼가 나의 품 속에 뛰어들었을 때 내게 작은 기쁨이 생겼어.’

샘은 사슴과 토끼들을 더욱 꼬옥 품어주었습니다.

다람쥐 두 마리가 또 샘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샘은 다람쥐들도 품어 주었습니다.

사슴과 토끼와 다람쥐들은 시원한 샘물 속에 몸을 담그고 눈과 코만을 내놓고는 타오르는 불길을 두려운 모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얘들아, 이제 안심해. 내 품에만 있으면 너희들은 안전해. 불도 나를 이기지는 못하거든.”

샘은 불길 때문에 뜨거워진 작은 짐승들의 몸을 시원한 물로 적시며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불은 사나운 힘으로 불뫼봉의 모든 것을 태워버렸습니다. 풀들이 모두 탔습니다. 나무들도 모두 타서 재가 되었습니다. 많은 작은 짐승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불의 기세 앞에 전혀 겁내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샘이었습니다.

불은 화가 나서 샘가의 소나무들을 태우며 샘물을 말려 버리려 했습니다.

“하하하, 감히 누가 내 앞에 나서겠느냐 ? 내 앞에 나서는 것은 무엇이든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샘에 가까이 다가갈 수록 불의 기운은 꺾이어 사그라지려고만 하였습니다.

“불아, 쓸데 없이 힘을 쓰지 말고 내 앞에서 사라지거라.”

샘은 불의 기운 때문에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뜨거움을 참고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아니, 넌 누구냐 ? 누군데 나의 힘을 빼앗는 거냐 ?”

“난 샘이라고 한단다. 늘 맑고 시원한 물을 품어 올려 산새들과 짐승들의 마른 목을 적셔주곤 하지.”

“그래 ? 난 무엇이든 태워버리는 불이야. 누구든 나의 힘을 뺏지 못해. 어디 내 힘을 견디어 봐라.”

불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호르르 호르르 샘을 삼키려 들었습니다.

샘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졌습니다. 샘의 품에 안겨 있던 사슴과 토끼, 다람쥐들도 샘의 뜨거워짐에 따라 몸을 비틀며 허우적거렸습니다.

‘내가 불에게 져선 안되지. 그래, 저 불이 활활 타오를 수록 나는 더욱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해.’

샘은 짐승들을 꼬옥 끌어 안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땅 속에서 시원한 물이 계속 솟아 올라와 뜨거움을 식혀주었습니다.

불길은 호르르 호르르 샘을 삼키려 들고, 샘은 뜨거움을 견디면서도 끄떡도 않고 조용히 있기를 한 동안이 지났습니다.

샘가의 나무들을 모두 태우고도 샘물을 말리지 못한 불이 조용히 사그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샘이 조용히 눈을 뜨고 불에게 말했습니다.

“불아, 너는 굉장히 센 힘을 가지고 있구나. 내가 땅 속에서 계속 물을 품어 올리지 못하고 고여 있는 물이었으면 너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다 말라버렸을 거야.”

“아니야, 샘아. 너의 힘이 더 세더구나. 내가 아무리 기운을 내어 너를 이기려고 했지만 너에게 다가갈 수록 나의 기운이 점점 꺾이기만 하더구나.”

“그럼 우린 서로 비겼구나.”

“샘아, 내가 활활 타오를 수록 너는 조용히 눈을 감고 움직이지를 않던데 너와 난 성격이 서로 다른 것같구나.”

“그래, 난 진달래가 피고 지기를 수 백 번씩이나 보면서도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왔지.”

“난 가만히 있으면 못 견디는 성미야. 무엇에든 붙어서 힘을 뻗치고만 싶어지거든. 넌 수 백 년 동안 한 곳에만 가만히 있어도 지겹지 않니 ?”

불이 태우던 소나무 굵은 가지를 우지끈 뚝딱 꺾어내리며 물었습니다.

“왜 안 그렇겠니. 한 동안은 지겹기도 했지. 그러나 난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지내고 있어.”

“기다리는 즐거움이라니 ?”

“나의 빈 가슴에 기쁨을 채워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야.”

“…….”

불이 붙은채 꺾어져 내린 나무가지가 샘에 떨어져 푸시시 흰 연기를 내며 꺼져버렸습니다.

“이 사슴과 토끼와 다람쥐들이 너를 피해 나의 품으로 뛰어들었을 때 나의 빈 가슴에 조그만 기쁨이 생겼어.”

불은 기세를 줄이며 샘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내 가슴에 온통 기쁨을 가득 채워 줄 누군가가 꼭 올 거야.”

“샘아, 너는 참 훌륭한 마음을 가졌구나. 나는 지금까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태워버리기만 하는 못된 마음을 가졌는데, 다 태워버리고 나면 재 밖에 남지 않았어. 재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엔 기쁨이 없고 늘 허전했거든. 나도 너처럼 기다림을 배우면 기쁨이 생길까 ?”

“생길 거야. 너에게도 기쁨을 줄 누군가가 꼭 찾아올 거야.”

“그래, 그럼 나도 너처럼 조용히 기다릴께. 난 처음에 부싯돌에서 나왔으니 다시 부싯돌 속으로 들어갈 거야. 샘아, 고마워. 안녕. 다시 부싯돌 밖으로 나올 때 만나자.”

불은 남은 기운을 모두 모아 부싯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불이 꺼진 불뫼봉은 곳곳에 흰 연기가 오르고 타다 남은 나무들이 꺼멓게 되어 밑둥치만 남아 있었습니다.

샘의 품에 들어가서 살아난 사슴과 토끼와 다람쥐들은 이제 샘에서 나와 먹이와 새 보금자리를 찾아나섰습니다.

샘은 시원한 물을 품어 올리며 땅 속에서 불길을 견디어낸 풀뿌리, 나무뿌리를 적셔 주었습니다.

하얀 눈으로 덮였던 겨울이 지나고 눈 녹은 물이 흐를 때 풀뿌리, 나무뿌리들은 다시 새싹을 뾰족히 내밀고 힘차게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 4 >


달도 별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덥석부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길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등에는 삽과 괭이등 몇 가지 연장을 지고 있었습니다.

먹물을 칠한 것같은 캄캄한 어둠 속이었지만 덥석부리는 무서움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고개를 하나 넘고 얕으막한 언덕이 양 쪽으로 둘려있는 우묵한 골짜기에 다다르자 덥석부리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앞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흐흐, 낮에 보아두었던 무덤이 바로 저것이로구나.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한 이런 명당 자리에 양반의 무덤이 없을 턱이 없지. 덥석부리, 너 오늘 한 몫 잡았다.”

덥석부리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면서 등에 진 연장을 내려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불빛 한 점 보이지 않고 우뚝우뚝 서있는 것은 나무들 뿐이었습니다. 귀를 기울여보았습니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시냇물 흐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덥석부리는 괭이로 무덤의 한 쪽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돌덩이는 하나도 없이 부드러운 흙으로만 쌓은 무덤이라 파헤치기가 쉬웠습니다.

덥석부리가 무덤을 파헤치는 동안 건너편 산에서 부엉이가 여나믄 번 울었을 뿐 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새까맣던 동녁 하늘에 붉으레한 빛이 희미하게 비치기 시작할 때 쯤에 덥석부리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덕지덕지 흙이 묻은 덥석부리의 손에는 금과 옥, 비취로 만든 패물들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습니다.

“후후, 이것을 처분하면 한 동안은 싫건 쓸 수 있겠어.”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산길로 덥석부리는 바람처럼 휭 사라져갔습니다.

얼마 후 덥석부리는 우리 땅에 들어와 살고 있는 섬나라 사람의 집 방안에서 섬나라 사람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콧수염을 기른 섬나라 사람이 앉아 있는 뒤에는 길다란 섬나라 칼 두 자루가 X 자로 걸려 있고 한쪽 벽에 만들어 놓은 진열장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 구로다상.”

구로다상이라고 불린 섬나라 사람은 얼굴을 찌푸린 채 앞에 놓인 패물들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구로다상, 마음에 안 드십니까 ?”

덥석부리는 초조한 얼굴로 섬나라 사람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섬나라 사람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이런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므니다. 이런 것들은 여자들의 노리갯감이나 하면 알맞겠스므니다.”

섬나라 사람을 쳐다보는 덥석부리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구로다상께서는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

“바로 저런 것들이므니다.”

섬나라 사람의 손가락을 따라 얼굴을 돌린 덥석부리의 눈에는 하얀 도자기들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건 하얀 빛깔의 자기들 뿐인데, 비취빛 푸른 자기를 구해 오면 값을 후하게 쳐드리겠스므니다.”

“푸른 자기를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구할 수는 있겠지만.”

섬나라 사람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앞으로 당겨 덥석부리의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안암골 김대감 집 안방에 목이 긴 푸른 항아리가 있으므니다. 그러니 그걸…….”

“그러면 그 커다란 집에 숨어 들어가 그걸 슬쩍 …… ?”

되묻는 덥석부리에게 섬나라 사람은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것은 당신 재주에 맡기겠스므니다. 그것만 가져오면 이 패물 값의 스므 배는 쳐드리겠스므니다.”

섬나라 사람의 말에 덥석부리도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럼, 수 일 후에 …….”

가지고 갔던 패물을 싸들고 덥석부리는 섬나라 사람 구로다상의 집을 나왔습니다.

덥석부리가 비취빛 푸른 자기를 싸들고 몰래 섬나라 사람의 집을 찾아간 것은 며칠이 지난 후의 한밤중이었습니다.


               < 5 >


불이 기운을 모아 부싯돌 속으로 들어가서 연못가에 머무른 후 다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두견새가 울고 진달래가 피고 지기를 벌써 수 백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불에 타서 사라졌던 숲도 다시 무성하게 되어 많은 짐승들과 새들이 보금자리를 만들어 살았습니다.

조용히 기다림을 배우던 불과 샘의 귀에 어느 날 천둥이 치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멀리서만 들리던 그 소리들은 점점 불뫼봉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그믐밤이라 불뫼봉의 주위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남쪽 멀리 솔뫼봉에서는 펀듯펀듯 환한 빛이 비치기도 하고 꼬리를 단 불덩어리가 하늘로 쭉 치솟았다가는 주위를 대낮같이 밝히며 푸들푸들 천천히 내려오곤 하였습니다.

불빛이 치솟아오르는 걸 본 불은 그동안 모아 두었던 기운이 부쩍부쩍 생기는 것같았습니다.

“샘아, 이게 무슨 일이지 ?”

불과는 달리 샘은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였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인간들의 일이야.”

“샘아, 나 몸이 불끈거려 견디지 못하겠어. 저기로 달려가 활활 타오를까 ?”

불은 당장에 부싯돌 속에서 뛰쳐 나올 기세였습니다.

“아니야, 지금 뛰쳐 나가면 그 동안 기쁨을 기다린 보람이 없어져. 저 소리는 기쁨을 주는 소리가 아니라 아픔을 주는 소리로 느껴져.”

“그래,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더 참자.”

한동안 요란하던 소리와 불빛들이 사라지고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다시 고요를 즐기려던 샘의 곁으로 총을 든 사람들이 비틀비틀 걸어왔습니다.

총을 든 사람들은 불안한 얼굴로 둘레둘레 주위를 살피더니 샘으로 달려가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고는 샘가에 쓰러졌습니다.

한참을 쓰러져 있던 그들 중에서 허리에 작은 총을 찬 사람이 몸을 일으켰습니다.

“야, 덥석부리 동무. 아랫마을에 내려가 량식을 구해오라우. 배 속에 든게 있어야 도망이라도 치디.”

“옛, 군관 동무.”

덥석부리는 벌떡 일어나 작은 총을 찬 사람에게 경례를 붙이고는 총을 들고 아랫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총을 찬 사람의 옆에 쓰러져 있던 또 다른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군관 동무, 어제 밤 싸움터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마을에 내려갔다가 국방군이래 만나면 우린 어캅네까 ? 배 고픈 것이래 조금 참았다가서리 어두워진 후에 내려가 량식을 빼앗아 먹고 밤을 타서 후퇴하디요 ? 더구나 저 덥석부리 동무래 사상이 불손한 의용군이니까니 혼자 보냈다가는 도망이래 쳐버릴 수가 있습네다.”

“기래, 기렇디. 기렇게 해야갔어. 덥석부리 동무, 돌아오라우.”

마을로 내려가던 덥석부리는 되돌아와서 샘가에 주저앉았습니다.

덥석부리는 샘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맑은 샘 속에 하늘이 담겨 있었습니다. 횃불같이 생긴 봉우리의 그림자가 샘가의 소나무 그림자와 어울어져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

샘도 덥석부리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시커먼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칼 속에 감추인 얼굴은 때와 먼지로 새까맸습니다. 새까만 얼굴 속의 눈에는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샘은 문득 수 백 년 전 불을 피해 자기 품으로 뛰어들었던 사슴과 토끼와 다람쥐들의 눈을 떠올렸습니다. 샘을 내려다보고 있는 덥석부리의 눈은 그 때의 작은 짐승들의 눈이었습니다.

샘은 이 덥석부리가 늘 기다려 오던 기쁨을 가득 채워줄 사람같이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덥석부리가 작은 짐승들과 같은 눈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탕. 타당.

갑자기 총성이 울리며 총탄 하나가 덥석부리의 귓가를 쌩 스치고 샘에 떨어졌습니다. 덥석부리는 기겁을 하고 얼른 몸을 낮추어 납짝 엎드렸습니다.

“모두 총을 버리고 손을 들라.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주위의 숲 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작은 총을 찬 사람이 소리나는 쪽을 향해 작은 총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사방에서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덥석부리는 움푹 패인 샘가에 웅크린채 머리를 감싸쥐었습니다. 총탄이 덥석부리가 웅크려 있는 주위의 흙 속으로 팍팍 들어와 박혔습니다.

“샘아, 이 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같아. 뛰어나가 타오를까 ?”

“아니야. 이건 기쁨을 주는 소리가 아니야.”

불은 탕탕 쏘아대는 총소리에 몸이 근질거려 뛰쳐 나가 타오르고 싶었지만 조용히 타이르는 샘의 말에는 성질이 누그러지곤 하였습니다.

작은 총을 쏘던 사람이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총소리가 그쳤습니다.

“총을 버렸우다. 살려주기요.”

남은 모든 사람들이 총을 버리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엔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손을 들고 나가는 덥석부리의 시커멓던 머리칼과 수염이 어느 세 허옇게 새고 있었습니다.

총을 쏘아대던 군인들에 끌려 샘가를 떠나면서 덥석부리는 샘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요하기만 한 샘 속에 비취빛 푸른 하늘이 산 그림자와 소나무 그림자를 안고 한가득 들어있었습니다.


               < 6 >


새벽 기원을 마치고 내려온 할아버지는 맑은 샘물을 떠다 반죽해 놓은 흙을 떼어들고 틀 앞에 앉았습니다.

들들들들 --.  슬슬슬슬 --.  들들들들 --.  슬슬슬슬 --.

할아버지의 발과 손놀림에 맞추어 틀이 돌아가며 매일 되풀이 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할아버지의 손에서는 지금 투박한 항아리가 아니라 목이 길고 허리가 잘록한 도자기가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오전 일을 마치고 빚은 도자기를 그늘에 갖다 놓은 할아버지는 늘 하던 습관대로 샘가로 갔습니다. 샘가에 앉아 불뫼봉 그림자와 소나무 그림자를 안고 고요히 떠 있는 비취빛 푸른 하늘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머리칼과 수염이 허옇게 새던 날의 물 속에 비친 하늘 빛깔과, 지금 내려다 보는 물 속의 하늘 빛깔이 젼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 이 비취빛 푸른 하늘 빛깔을 나의 손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

중얼거리며 일어서는 할아버지의 눈에 조그맣고 단단한 돌이 비쳐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돌을 주워 들었습니다.

“ 음, 부시로 쓸 수 있는 돌이야. ”

할아버지는 중얼거리며 돌을 들고 가마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샘에 비친 하늘이 더욱 푸르러지고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