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동화 >
고시락 불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으슬으슬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털보 아저씨는 세거리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털보 아저씨의 수염은 코와 눈을 빼고 얼굴의 아래 부분을 다 덮은 덥수룩한 구레나루입니다. 그 수염이 가득 덮인 얼굴에서 눈만이 살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와 수염은 마구 헝클어져 있고 얼굴 빛도 병이 든 사람같이 핼슥했습니다.
가끔 손으로 입을 막고는 심하게 기침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아저씨는 정말 병이 들었나 봅니다.
털보 아저씨에게도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훌륭한 이름이 있습니다. 삼대 독자인 아버지가 딸만 넷을 낳은 후에 다섯 번째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늘 안고 다니며 ‘내 복덩이, 내 복덩이.’ 하던 것이 어느 새 ‘복동이’ 라는 이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다음에는 워낙 수염이 많기 때문에, 복동이라는 이름보다는 ‘털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털보 아저씨가 보고 있는 것은 보리를 탈곡하고 남은 보리짚 검불을 태우고 있는 불입니다. 아저씨네 고향에서는 이런 불을 ‘고시락 불 (시락 불)’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저씨가 언제부터 여기에 앉아 있었는지는 잘 모르나, 아마 오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서 신나게 놀던 동네 아이들 중 아무도 아저씨가 이 곳으로 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고시락 불이 빨간 꽃을 활짝 피울 때는 아이들이 이 곳에서 신나게 놀았지만, 불꽃이 시들면서 아이들도 하나 둘 씩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마 아저씨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직후에 이 곳으로 왔나 봅니다.
한 참을 가만히 앉아서 사그라져가는 고시락 불만 바라보고 있던 아저씨가 천천히 일어나 불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는 근처에 떨어져 있는 막대기를 주워 들고 불을 헤집었습니다.
시들던 장미가 빗물을 머금고 활짝 피어나듯 꽃불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러나 금새 또 사그라져 버렸습니다.
아저씨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보리짚을 주워 모았습니다.
갑자기 아저씨의 눈이 커졌습니다. 그리고는 그 커진 눈이 가리키는 것을 주워들었습니다.
마늘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아이들이 여기서 고시락 불에다 마늘을 구워 먹으면서 놀았나 봅니다.
아저씨는 주워 모은 보리짚을 사그라져가는 고시락 불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습니다. 회색 재 위에서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일더니 확 불이 붙으면서 바알간 불꽃을 피워올렸습니다.
아저씨는 그 위에 방금 큰 눈으로 주운 마늘을 던져놓았습니다.
이제 어둠이 가득 내린 세거리는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주위는 온통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오직 고시락 불이 타고 있는 한 귀퉁이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불꽃의 날개 짓에 따라 털보 아저씨의 눈동자 만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매캐한 마늘 냄새가 코에 들어왔습니다. 아저씨는 큰 주먹으로 코를 누르며 실룩거렸습니다.
아!
털보 아저씨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눈물이 맺힌 커다란 눈에 닿을 듯 말 듯한 곳에서 노는 아이들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중에 유난히 눈이 큰 아이가 있었습니다.
“복동아, 이제 다 익었을 거야. 꺼내 먹자.”
고수머리를 한 평식이가 복동이를 재촉했습니다.
“그래, 다 익었을 거야.”
복동이는 막대기로 고시락 불을 헤집어서 마늘을 꺼냈습니다.
이 손 저 손 옮겨 놓으며 뜨거움과 재를 함께 불어내는 두 소년의 얼굴은 고시락 불빛을 닮아 새빨갛습니다.
복동이가 마악 군마늘을 먹으려고 할 때였습니다. 언덕 위의 복동이네 교회에서 종 소리가 울려왔습니다.
데 ~ 엥, 데 ~ 엥, 데 ~ 엥, …….
복동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평식아, 이거 너 먹어. 난 교회 가야 해.”
먹으려던 군마늘을 평식이에게 주고 복동이는 교회 종 소리를 따라 뛰어갔습니다.
“복동아, 복동아, 같이 놀다가 가버리면 어떻게 하니?”
“난 교회 가야 된단 말야. 마늘은 너 혼자 다 먹어.”
“교회에 가지 말고 나하고 놀아. 복동아, 돌아와.”
평식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뒤를 따라왔지만 복동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회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복동아, 복동아 …….”
평식이의 목소리가 어느 새 어머니의 목소리로 바뀌었습니다.
“복동아, 복동아 …….”
털보 아저씨의 커다란 눈에 더욱 굵은 눈물이 맺히며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거친 손으로 털이 수북이 난 아저씨의 팔을 잡고 있었습니다.
“복동아,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자. 응 ?”
아저씨의 팔을 잡고 애원하는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혼자 돌아가세요. 전 안 돌아갑니다.”
“얘야, 제발 …….”
“제발 날 내버려 두고 돌아가시라는데 왜 이러세요 ?”
아저씨는 어머니의 손을 홱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복동아, 할아버지께서 널 애타게 찾고 계시단다. 병석에 누우셔서 4 대 독자 복동이만 계속 부르고 계셔.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 뿐인 손자를 꼭 보고 싶다는구나. 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 집안에서는 네가 집안의 기둥이고 할아버지의 희망이야. 복동아, 어릴 때 너를 안고 얼러주시던 할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자.”
“글쎄, 싫다니까요. 이미 버린 자식이라고 생각하시고 어머니 혼자 돌아가세요.”
“얘야, 넌 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고, 하나 밖에 없는 할아버지의 손자야.”
“전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이런 더러운 몸으로는 할아버지께 가지 못해요. 어머니가 가시지 않는다면 제가 나가버리겠어요.”
아저씨는 방문을 홱 열고 뛰쳐나갔습니다.
“복동아, 복동아 …….”
어머니가 급히 따라나오며 아저씨를 붙들려고 했지만, 아저씨는 어느 새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버렸습니다.
한참 뒤, 고향으로 쓸쓸히 돌아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멀리 숨어서 지켜보다 방으로 다시 들어간 아저씨는, 어머니가 서튼 글씨로 써서 남기고 간 쪽지를 보았습니다.
【복동아, 이 못난 에미 이만 돌아간다. 어릴 때는 종 소리만 들리면 교회로 뛰어가곤 하던 착하기만 하던 네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구나. 부디 죄 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위독하셔서 너만 찾고 있으니까 에미가 간 후에라도 마음을 바꿔서 고향으로 돌아오너라. 고향은 참 따뜻하단다. 이 에미는 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마.】
어머니가 남기고 간 글을 읽는 아저씨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종이를 적셨습니다. 아저씨의 어깨가 들먹였습니다.
“어머니, 저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어린 저를 안고 얼러주시던 할아버지를 뵙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 실컷 울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이젠 안 됩니다. 고향이 따뜻하고 좋은 줄은 알지만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전 이미 죄를 지은 몸이기 때문에 죄값을 치루어야만 합니다.”
“김복동씨. 당신을 조직 폭력 및 공갈 혐의로 체포합니다.”
뒤에 벌써 사복 형사가 수갑을 들고 와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어머니가 남기고 간 쪽지를 소중히 접어서 주머니 속에 깊숙히 넣고는 돌아서서 조용히 손을 내밀었습니다.
눈을 감고 옛 기억을 되살리던 아저씨는 문득 눈을 떴습니다. 아저씨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어서 가끔씩 반짝이며 사그라지는 고시락 불이 마치 경찰차 지붕 위에서 앵앵 돌아가는 빨간 불같이 보였습니다.
아저씨는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징역 7 년을 언도하던 판사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미웁지 않았습니다.
쇠창살을 잡고 하늘을 바라보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털모자를 쓰고 교도소 문을 나서며 돌아서 보던 높은 담장이 보였습니다.
공사장에서 벽돌을 진채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저씨는 다시 눈을 떴습니다.
“그래,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다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저씨는 막대기를 들고 마늘을 던져 놓았던 고시락 불을 헤집었습니다. 고시락 불이 확 피어나며 별똥이 흐르듯 불꽃이 좌르르 하늘로 올라가다 스러지고,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잘 구워진 마늘이 톡 튀어나왔습니다.
아저씨는 군마늘을 이 손 저 손으로 옮겨 놓으며 후후 재를 불어냈습니다. 그리고는 시커먼 수염 속에 꾹 다물어 두었던 입으로 마늘을 가져갔습니다.
아저씨는 천천히 마늘을 씹었습니다. 매콤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우고, 허기진 빈 속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회의 종 소리가 어둠을 뚫고 훨훨 날아 아저씨의 귀로 들어왔습니다.
데 ~ 엥, 데 ~ 엥, 데 ~ 엥, …….
아저씨의 어릴 적 고향 교회의 종 소리 마냥 생생하게 들렸습니다.
아저씨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내게도 고향이 있지. 고시락 불에 마늘을 구워 먹다가 종 소리가 들리면 곧장 교회로 뛰어가곤 했었지. 그 때 구워먹던 마늘 맛이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그래, 고향도 변하지 않았을 거야.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나같은 놈도 고향은 따뜻이 맞아줄 거야. 마늘을 같이 구워먹던 평식이도 만나고, 어머니의 가슴에 묻혀 실컷 울어야겠어.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사죄도 하고, 이제부터라도 정말 ‘복덩이’로 살아가겠어.”
아저씨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습니다.
아저씨의 뒤에서 고시락 불꽃이 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 주 ) 고시락 : 까끄라기의 제주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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