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약속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산길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조금씩 내리던 눈이 산길을 올라 갈수록 점점 굵은 송이로 변하여 내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없는 탓인지 내리는 눈은 나뭇가지 위에 살포시 앉아 눈꽃을 만들고 있어서 오히려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숲이 우거져 나뭇가지들이 길을 가득 덮고 있어서 좁은 숲길 땅 위까지는 아직 쌓인 눈이 많지 않아 별로 미끄럽지 않은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라고 선생님은 생각하였습니다. 땅 위까지도 눈이 잔뜩 쌓였다면 산길을 올라가기가 어려워 20년 전 아이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숨이 가빠진 선생님은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바위의 눈을 입으로 후후 불어내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선생님의 머리 위에, 몸 위에 눈송이가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내려와 앉았습니다. 선생님은 눈송이를 맞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선생님의 감은 눈 속으로 눈이 펄펄 내리는 운동장을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주먹만큼 조그만 분교, 손바닥만한 조그만 운동장, 그 작은 운동장에서 세 명의 작은 아이들이 눈 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눈 위를 달리는 아이들 틈에는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작은 분교의 마지막 졸업식 날, 이제 이 세 명을 졸업시키면 이 분교는 아주 문을 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가슴에서는 문을 닿는 분교와 졸업을 하고 떠나는 아이들의 생각에 슬픔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지만, 그 슬픔을 꾹꾹 눌러 담고 외쳤습니다.
“얘들아, 누가 제일 큰 눈사람을 만드는지 내기하는 거다.”
“예, 선생님.”
아이들은 입을 모아 대답하고는 신나게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굴리는 눈덩이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커지는 눈덩이를 따라 아이들의 마음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하얀 눈이 그치지 않고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의 온 몸에 하얗게 눈이 쌓였습니다. 아이들이 눈사람인지, 눈사람이 아이들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눈사람 만들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운동장 구석에 네 개의 크고 작은 눈사람이 세워졌습니다. 이젠 눈사람 아이들과 눈사람 선생님까지 여덟 명이 눈 내리는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앞장서서 달리던 선생님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습니다.
“얘들아,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자!”
“와!”
조그만 입들이 큰 외침을 외치고는 교문을 빠져나가 학교 뒷산 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분교의 뒤에 있는 산은 산이라고 하기조차 우스운 분교처럼 조그만 언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작은 산에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져 있고,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들이 우뚝우뚝 서 있어서 제법 산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20 분이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작은 산이어서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매일 뒷산을 오르곤 하였습니다. 아침 조회를 하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와서야 수업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이 쌓인 산길을 오르기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20 분이면 오르던 것이 10 분쯤의 시간이 더 걸려야 겨우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동네가 내려다보이고, 멀리 버스가 다니는 길이 보이고, 더 머얼리로 바다가 보였습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입김을 호호 불며 모두들 말없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승민이네 집이 하얀 눈을 쓰고 오두마니 앉아 있었고, 세훈이와 신형이네 집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내리는 눈을 거슬러서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도시로 이사 가버린 여러 채의 집들은 눈을 그대로 덮어 쓴 채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바로 발 아래로는 세 아이들의 분교가 내려다 보였습니다. 운동장에는 눈사람 아이들과 눈사람 선생님만이 폐교가 될 분교를 지키려는 듯 우뚝 서 있었습니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승민이가 솟아 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쓱 문질러 닦은 후 힝 하고 코를 풀고는 머얼리로 눈을 돌렸습니다.
“오늘은 바다가 안 보이네.”
“멍충아, 눈이 오기 땜에 안 보이는 거잖아.”
“그, 그렇지.”
세훈이의 핀잔에 머쓱해진 승민이는 목을 움츠리고서도 바다가 있는 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전 어른이 되면 바다로 갈 거예요. 넓은 바다에서 큰 배를 타고 큰 고기를 잡을 거예요.”
“그래, 승민이는 세상에서 제일 큰 고래를 잡을 수 있을 거야.”
공부가 조금 모자라는 승민이는 산골 아이 답지 않게 무척이나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바다를 그리고, 배를 그리고, 고기를 그렸습니다. 승민이에게는 바다가 꿈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세훈이와 신형이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세훈이의 꿈은 아직도 비행사니?”
“예, 선생님, 전 비행기를 조종하여 저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어요.”
“그래, 언젠가는 선생님이 세훈이가 조종하는 비행기에 타 볼 수도 있겠구나.”
“예, 그 때는 선생님은 공짜로 태워 드릴게요.”
“고맙다. 제자 잘 둔 덕분에 공짜 비행기 타 보게 되겠구나.”
세훈이는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음 짓고 있었습니다.
“신형이는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소원이지?”
“예.”
신형이는 별로 말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없는 눈 속에는 언제나 많은 말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신형이의 꿈도 꼭 이루어질 거야.”
선생님은 세 아이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습니다.
세 아이들은 각각 바다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분교를 내려다보면서 자기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눈들은 이제 곧 헤어질 선생님과 폐교가 될 분교 생각에 눈 오는 하늘만큼이나 잔뜩 찌푸려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 씩 머리에 새기면서 아이들의 꿈도 함께 새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세훈이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늘 기발한 것을 생각해 내는 세훈이라 뭔가 또 다시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었습니다.
“선생님, 우리 넷이 20 년 후 오늘 여기서 다시 만나요.”
“……?”
모두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세훈이의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습니다. 세훈이는 언젠가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 O . 헨리의 소설 “30년 후”를 떠올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 우리 20 년 후에는 우리의 꿈들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여기서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래요, 좋아요. 선생님.”
선생님과 세 아이들이 서로 손을 포개어 잡았습니다. 포개어 잡은 손들이 내리는 눈을 녹이듯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습니다.
20 년 전의 일을 회상하던 선생님은 이윽고 다시 일어나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휴, 나도 이젠 많이 늙었어. 전엔 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라도 숨이 차지 않았는데…….’
정년 퇴직한지 벌써 10 년이 더 지난 선생님의 얼굴에는 굵은 주름과 검은 점들이 많았고, 흰머리가 머리의 반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눈은 세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어린아이답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위로 올라갈 수록 산길엔 눈이 더욱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눈길 위에 두 개의 큰 발자국과 작은 발자국 하나가 찍혀 있었습니다.
산꼭대기까지 거의 다다랐습니다.
큰 나무 아래에 세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서른을 갓 넘었을 세 명의 젊은이의 모습을 생각해 왔는데, 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은 한 명의 젊은이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 그리고 그들의 아이인 듯한 꼬마 한 명이었습니다.
“선생님!”
젊은이가 선생님을 보고 달려 내려왔습니다. 선생님은 젊은이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자네는……. 승민이?”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 승민이입니다.”
승민이는 선생님의 주름진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선생님, 많이 늙으셨군요.”
“그래, 벌써 20 년의 세월이 흘렀구먼.”
선생님은 굵은 주름에 웃음을 가득 담고 승민의의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선생님, 제 식구들입니다. 오늘 선생님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듣고 함께 오겠다고 하여 올라왔습니다.”
“선생님,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잘 왔네.”
승민이네 식구들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에 더욱 큰 미소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세훈이와 신형이는?”
“아직 안 왔습니다. 그러나 곧 오겠지요.”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네 사람이 서 있는 큰 나무 그늘만이 거뭇하게 눈이 쌓여 있지 않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하얀 눈으로 온통 덮이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그 동안 이룬 꿈을 이야기하기로 했었지.”
“예, 선생님.”
“자네의 꿈은 바다로 나가 배를 타는 것이었어.”
승민이는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습니다.
“전 꿈을 좇아 바다로 나갔지요. 큰 배를 타고, 큰 고기도 잡았어요. 그러나 사방이 훤히 트인 바다 가운데에서 지내다 보니 고향이, 산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몇 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럼 지금은?”
승민이는 말없이 산 아래를 가리켰습니다. 승민이의 손가락 끝 산 아래에는 조그만 목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전에는 바위와 풀들만이 무성했던 곳이 깨끗이 가꾸어진 목장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저 황무지를 목장으로 바꾸었습니다. 산에서는 바다가 그리워 바다로 나가도, 바다에서는 산이 더 큰 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어요. 이젠 이 곳에서 목장 바다를 가꾸렵니다.”
“잘 했네, 잘 했어.”
승민이의 손을 잡은 선생님의 늙은 손에 힘이 더 주어졌습니다.
“선생님, 세훈이와 신형이의 꿈도 이루어졌을까요?”
“글쎄다. 아마도 꿈을 이루어 살다 보니 오늘 작은 약속을 지키러 올 틈이 없는 거겠지.”
“선생님, 이 약속은 작은 약속이 아니에요. 제겐 너무나 크고 소중한 약속이었어요.”
“그래, 세훈이와 신형이도 승민이처럼 이 약속이 크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곧 이리로 달려올 거야.”
선생님은 두 아이들을 기다리는 듯 산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산길에는 눈이 펑펑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그 길로 올라오는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20년 전에도 여기 올라온 사람은 네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네 사람이 되긴 했구먼.”
선생님은 아직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듯 서글픈 눈으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아래, 이미 과수원으로 변해 버린 분교 운동장에는 눈을 쓴 나무들이 눈사람처럼 우뚝 우뚝 서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멀리로는 승민이의 새로운 꿈이 하얀 눈에 덮여 자라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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