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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아이의 글밭/동화

<창작동화> 사랑의 빚

 <창작 동화>

사랑의 빚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눈은 이미 나뭇가지를 휠 정도로 가지 위에 내려 쌓이고, 산길을 덮어버렸습니다.

“하, 이거 참 큰 일인 걸. 이런 눈 속에서 집에까지 제대로 갈 수 있을지 걱정인 걸.”

젊은이는 중얼거리며 눈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걸을 때마다 무릎께까지 눈에 푹푹 빠졌지만 젊은이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눈길을 헤치며 걸었습니다.

“차라리 최 선비님 말씀대로 그 댁에서 하루 밤 지내고 올 걸 그랬나? 아니야. 그러다가 오늘 밤 더욱 눈이 쌓여 집으로 돌아가기가 곤란해질지도 몰라. 집에 사흘치 양식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머님을 걱정시켜 드릴 수는 없어.”

젊은이는 발에 더욱 힘을 주어 눈길을 헤쳤습니다. 젊은이의 등에는 큼직한 쌀자루가 지워져 있었습니다.

산짐승을 사냥하여 모아 두었던 털가죽을 장에 가서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서 지고는 깊은 산 속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장이 서는 마을은 젊은이가 사는 깊은 산 속 외딴 오두막집에서는 한나절을 꼬박 걸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날이 새기도 전부터 털가죽을 짊어지고 집을 나서서 장터 마을에 도착한 것은 점심녘이 다 될 무렵이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돌아갈 일이 걱정이 된 젊은이는 서둘러 털가죽을 돈사고 쌀을 사서 집으로 길을 떠났지만, 산아래 최 선비님 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젊은이의 발목까지 파묻힐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은인인 최 선비님은 돌아갈 일을 걱정하며 자기 집에서 자고 날이 밝은 후 가라고 했지만, 혼자 계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도저히 머물러 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눈이 이렇게 계속 내리면 내일이나 모레도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그대로 눈길을 헤치고 길을 재촉했던 것이었습니다.

눈은 산을 덮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더욱 기세를 부리며 퍼부었습니다.

벌써 해가 진 듯 했습니다. 눈이 쏟아지는 하늘에서 해가 언제 뜨는지 언제 지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주위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 깔린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얀 눈빛으로 가까운 곳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눈이 쌓인 산 속에서 길을 찾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젊은이는 자주 오가는 길이라 쉽게 길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젊은이의 마음은 어머님이 기다리는 집으로 줄달음질치고 있었지만 걸음은 더욱 느려지기만 했습니다. 손발은 점점 시려오고, 이제는 털가죽 옷으로 감싼 가슴까지도 시려오고 있었습니다. 눈구덩이에 빠져 나둥그러지기를 몇 번. 이제는 등에 진 쌀자루가 무거워지기만 했습니다.

범바위가 눈을 이고 저만치 앞에 다가왔습니다. 최 선비님 댁에서 젊은이의 집까지 이제야 절반쯤 온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산길은 더욱 험해지는 것입니다.

쌀자루를 추스르며 범바위를 마악 돌아서려는 젊은이의 귀에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음, 으음, 으으으…….”

깜짝 놀란 젊은이가 둘레를 살펴보았지만 사람의 모습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못 들었겠지. 이런 눈 오는 산 속에 사람이 있을리가 없지.’

젊은이는 다시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번에는 범바위의 저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살려주세요.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제발 저를 좀 구해 주세요.”

애원을 가득 담은 목소리는 작지만 안간힘을 쓰며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젊은이는 어쩐지 두려운 생각이 들면서도 조심스럽게 범바위를 돌아갔습니다. 범바위 뒤에는 말 한 마리가 눈 위에 길게 누워 있고, 그 옆에 한 사람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양반들이나 입을 수 있는 비단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젊은이처럼 산 속에서 사는 사람은 아닌 듯 했습니다.

“거기 누구요?”

“사냥을 나온 사람입니다. 노루를 쫓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말과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저의 하인들이 저를 찾아다닐 터인데 뉘신지 모르지만 저를 좀 구해 주시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애원하는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힘이 솟아나는 듯 했습니다.

젊은이는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눈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온 몸이 눈에 하얗게 덮여 있었습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젊은이는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몸에 가득 덮인 눈을 털어 내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자, 제 등에 업히십시오.”

젊은이는 쌀자루를 내려놓고 등을 돌려대었습니다.

“으윽. 으으윽.”

팔을 올려 업히려던 그 사람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다시 주저앉았습니다.

젊은이는 돌아서서 얼른 다시 부축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눈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얼굴을 보는 순간 젊은이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너, 너는…….”

꿈에도 잊지 못하던 얼굴, 생각만 해도 이가 부드득 갈리는 바로 그 얼굴이었습니다.

“용이!”

다리를 다친 사람이 젊은이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듯 젊은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래, 나를 알아보는군. 태호, 너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요, 용이, 자네 살아 있었구먼. 지난 일은 미안하게 됐네.”

용이는 태호를 팽개치듯 눈 위에 내려놓고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하하하, 태호, 자네는 이 용이가 살아 있어서 실망한 것 같군. 지난 일이 미안하다고? 그래, 내 아버지와 형님들이 누구 손에 돌아가셨는데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려는가?”

“용이…….”

서슬이 퍼런 용이의 말에 태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러진 다리가 무척 아팠지만 신음 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 자기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아세워 온 식구가 몰살당해 죽게 했던 김판서의 막내아들 용이가 자기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한참 동안 태호를 내려다보고 있던 용이는 쌀자루를 다시 짊어지고 태호를 내버려 둔 채 돌아섰습니다.

태호는 눈길을 헤치고 멀어져 가는 용이를 보면서 살려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 소리가 더 이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길을 걷는 용이의 가슴속에는 더욱 세찬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태호와 함께 서당에서 공부하던 즐거웠던 기억조차도 가슴을 쓰리게 했습니다. 책씻이를 용이가 먼저 했을 때에 부러움으로 보던 태호의 눈빛. 진사과에 장원 급제를 했을 때는 친하던 태호가 일부러 용이를 멀리 하기 시작했었습니다.

장안을 떠르르하게 울리던 용이의 아버지 김판서의 집에 어느 날 커다란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임금님을 받들고 백성들을 위해 온갖 힘을 다하던 김판서에게는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습니다. 임금님이 드시는 수랏상에 독이 든 음식이 올려져 있어서, 임금님을 헤치려는 역적을 찾아내려고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의 사랑을 받는 김판서를 시샘하던 태호의 아버지 정참판이 독이 든 수랏상을 올리도록 뒤에서 조종한 역적은 김판서라고 거짓 밀고를 한 것이었습니다.

포졸들이 김판서의 집을 포위하고 포도대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렸습니다.

“어명이오. 역적 김판서는 나와서 오라를 받으시오!”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하인들이 어쩔 줄 몰라 이리 저리 몰려다니고, 용이의 어머니와 형님들은 어찌된 까닭인지를 몰라 새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김판서가 식구들을 모았습니다.

“어쩌다가 내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는지, 누가 내게 누명을 씌웠는지는 모르지만 어명이라니 나가야 되겠다. 한 번 역적의 누명을 쓰면 끝까지 나를 해치려는 자들 때문에 누명을 벗기가 어려운 법. 차라리 떳떳하게 죽자. 그러나 우리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만은 없으니 용이는 어머니를 모시고 멀리 달아나서 이 누명이 벗겨질 때까지 숨어살거라.”

“아버님!”

김판서의 말을 듣는 식구들이 모두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명이오!”

대문 밖에서 포도대장의 외침이 다시 들렸습니다.

“시간이 없다. 용아, 어서.”

용이는 쓰러지려는 어머니를 부축하고 뒷문 곁 어둠 속에 숨었습니다.

김판서가 포도대장의 앞에 나서자 집을 포위하고 있던 포졸들이 포위를 풀었습니다. 그 틈에 용이는 어머니를 업고 어둠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한양을 빠져나와 사람 사는 마을들을 피해 도망 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던 두 모자는 겨울날 어느 산기슭에서 배고픔과 추위로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용이의 어머니는 깊은 병까지 들어있었습니다.

용이 모자가 정신이 다시 들었을 때는 지금 용이네가 살고 있는 산기슭에 있는 최 선비님 댁이었습니다.

최 선비님 댁 식구들의 따뜻한 보살핌 덕택으로 어느덧 용이 어머니의 병도 다 낫고 두 모자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장터 마을에 다녀온 최 선비님이 두 모자를 불렀습니다.

“두 분을 찾는 방이 장터 마을에 붙어 있었습니다. 두 분 부디 몸조심하시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용이 모자는 최 선비님 앞에 꿇어앉았습니다.

“저의 어머님과 저의 목숨은 최 선비님께 달려 있습니다. 부디 저희 모자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서 용이는 집안의 내력과 역적의 누명을 쓰고 아버지와 형들이 죽음을 당한 이야기, 도망쳐 떠돌아다니며 고생한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걱정 마시고 저의 집에서 언제까지라도 맘 편히 계십시오. 청렴하고 충성된 김판서님이 누명 쓰게 된 사실은 백성들은 다 알고 있으니, 이 나라 백성이면 어느 누군들 두 분을 도와드리지 않겠습니까?”

“최 선비님,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은혜랄 것까지야 있습니까?  저도 제가 지고 있는 사랑의 빚을 두 분을 통해서 갚게 된 걸요.”

용이는 최 선비님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사랑의 빚이라니요?”

“몇 해 전 저도 두 분처럼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이름 모를 노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노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를 갚고 싶거든 자기에게 갚지 말고 또 다른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빚을 갚으라고 하더군요. 그게 바로 사랑의 빚이라면서요.”

“사랑의 빚, 사랑의 빚.”

용이는 사람들을 피해서 깊은 산 속에 오두막을 짓고 산짐승을 사냥하며 지내면서도 최 선비님의 말씀이 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머리 속에 늘 떠오르는 이가 갈리는 얼굴은 아버지를 역적으로 모함한 정참판과 그 아들 태호의 얼굴이었습니다. 도망을 다니던 중에 나중에야 아버지를 모함한 사람이 정참판이라는 것을 알고 용이는 치가 떨렸습니다.


용이의 가슴속에 몰아치는 눈보라에 지지 않겠다는 듯 차가운 눈발이 용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리쳤습니다. 용이의 코끝과 두 귀가 빨갛게 얼고 있었습니다.

‘아버님과 형님들을 억울한 누명으로 돌아가시게 하고 우리 가문을 몰살시킨 원수의 아들. 내가 구해줄 이유가 없어. 그대로 놔두면 이가 갈리는 원수가 하나 얼어죽겠지.’

고통과 놀라움으로 일그러지며 파랗게 질리던 조금 전의 태호의 얼굴이 떠올라왔습니다. 그 얼굴과 몸, 부러진 다리 위에 눈이 하얗게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태호의 일그러지는 얼굴 위에 최 선비님의 얼굴이 겹쳐져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었습니다.

용이는 눈 위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왜?”

아무도 없는 눈밭을 향해 외쳤습니다.

“난 지금 내 원수를 갚고 있는 거야. 아버지와 형님들의 원수, 우리 가문의 원수를 말이야아!”

용이의 외침이 눈보라 속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태호의 얼굴은 사라져 버리고 용이의 눈앞에는 최 선비님의 얼굴만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최 선비님, 난 어찌 해야 한단 말입니까? 태호는 내 원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용이는 눈 위에 엎어졌습니다. 용이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몇 방울이 눈을 조그맣게 녹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엎드려 있던 용이는 쌀자루를 내려놓고는 범바위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범바위까지 눈길 속을 뛰어간 용이의 몸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태호는 벌써 움직이지 못하고 내려 쌓이는 눈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눈을 걷어치우고 손을 잡아 보았지만 벌써 몸이 얼어가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가까이 대어 보았지만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헤치고 손을 넣었습니다. 싸늘해지고 있는 가슴 위로 가느다랗게 심장이 뛰고 있었습니다.

용이는 태호를 들쳐업었습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눈밭을 헤치며 정신없이 걸었습니다. 발이 미끄러져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업고, 무거워도 쉬지 않았습니다.

용이가 걸어가는 앞에서 최 선비님의 웃는 얼굴이 용이에게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용이의 이마에서는 더운 땀방울이 솟아나 얼굴에 몰아치는 눈송이를 녹이고 있었고, 등에서는 더운 김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처음 업었을 때는 온통 싸늘하기만 했던 태호의 몸에서 용이의 등에 댄 가슴이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