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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아이의 글밭/동화

<창작동화> 달 뜨는 언덕

 < 창작 동화 >

달 뜨는 언덕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경이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문이 작은 소리로 삐꺽 울었다. 경이는 가슴이 작은 문소리처럼 콩콩 뛰어 얼른 뒤돌아보았다. 할머니는 몸을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경이는 수야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경이의 까닥거리는 손가락을 따라서 수야가 살그머니 일어났다.

“할머니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나와.”

속삭이듯 말하는 경이를 향해 수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야가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오고, 방문은 또 삐꺽 작은 소리를 냈다.

쿨룩쿨룩.

할머니의 신음 소리에 경이는 신을 신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나 방안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경이는 호- 하고 숨을 내뱉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할머니가 깨시면 뭐라고 하실 지는 뻔했다.

“늙은 에미도 버리고, 어린 자식도 버리고 나가 소식도 없는 것들을 기다려 뭐 하니? 가지 말아. 오지 않는다. 에구 망할 것들. 망할 것들.”

그러나 경이는 그러는 할머니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망할 것들, 망할 것들’ 하면서도 요즘 들어 밤마다 달이 커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무도 몰래 한숨을 쉬곤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이는 수야의 손을 잡고 동네 밖으로 나왔다. 동네라고 해봐야 대여섯 집이 띄엄띄엄 있을 뿐이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면 포장도 안 되어 있는 길을 30 분이나 걸어 내려가야만 했다. 그 사이엔 사람 사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

“누나, 오늘 정말 엄마, 아빠가 오시는 거야?”

“그래. 추석 전날 달이 언덕 위로 떠오르면 오신다고 했단 말이야.”

“에이, 작년에도 안 오시고, 재작년에도 안 오셨잖아.”

“그렇지만 오늘은 꼭 오신단 말이야.”

경이는 수야에게 큰 소리 쳐 놓고도 속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여섯 해 동안이나 추석 때만 되면 언덕 위로 떠올라 커지는 달을 보며 엄마, 아빠를 기다렸지만 오시지 않았다. 올해까지 일곱 해 째 기다리는 것이다.

경이는 엄마, 아빠의 얼굴을 희미하게 밖에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경이가 다섯 살 때, 수야가 두 살 때 헤어졌으니까 수야는 기억이 전혀 없을 것이다.

“수야, 너 엄마, 아빠 얼굴 기억 나니?”

“아니. 누나는?”

“조금.”

“어떻게 생겼어? 엄마 얼굴이 나랑 닮았어?”

“그래. 넌 엄마 얼굴 닮았고, 난 아빠 얼굴 닮았어.”

“빨리 엄마, 아빠 보고 싶다. 빨리 가자, 누나야.”

빨리 가자고 서두르는 수야의 걸음은 더욱 비틀거렸다.

경이는 수야의 걸음이 무척 안타까웠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수야.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는 수야. 그래서 경이는 늘 수야의 발이 되곤 했다.

“자, 업혀.”

경이는 쭈그리고 앉아 수야에게 등을 돌려댔다.

“누나, 미안해.”

수야도 늘 하는 말을 하고는 경이의 등에 업혔다.

둘이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언덕 숲 속에서 이름 모를 밤새가 울었다. 가까운 풀숲에서 작은 새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누나, 조금 무섭다.”

“바보야, 무섭긴 뭐가 무섭니?”

“누난 안 무서워?”

“그래.”

“저 캄캄한 숲 속에서 도깨비가 나올 것 같아.”

“얘는 갑자기 도깨비 소리를 하고 그러니?”

경이는 수야를 업은 채로 수야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거 봐. 누나도 도깨비를 무서워하면서. 그런데 누나, 이렇게 달이 안 떴는데도 엄마, 아빠가 오시는 거야?”

“달이 안 뜨긴 왜 안 뜨니? 구름이 많이 끼어 달을 가리고 있을 뿐이지, 아주 둥그런 달이 떴단 말야.”

둘은 다시 아무 말없이 걸었다.

캄캄한 숲 속에서 커다랗고 시커먼 것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아 겁이 나기도 하고, 등에 업은 수야가 무거워서 경이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더구나 수야 말대로 달이 구름에 가려 깜깜하니까 엄마, 아빠가 오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경이의 발은 계속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기만 했다. 그것은 다섯 살 적에 엄마, 아빠와 헤어질 때 엄마가 한 말 때문이었다.

“경이야,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수야를 잘 돌봐야 한다. 엄마, 아빠가 돈 많이 벌어 와서 경이 예쁜 옷도 사 주고 수야 다리도 고칠께.”

경이는 예쁜 옷 같은 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엄마, 아빠와 함께 살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야의 다리만 고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야는 어느새 경이의 등에 코를 박고 잠이 들어 있었다. 잠이 든 수야를 업고 걷기란 경이에게는 무척 힘 든 일이었지만, 이제 버스 정류장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을 하며 무거운 것을 참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10 분쯤 기다리니 두 눈에 불을 달고 마지막 버스가 경이 앞으로 달려와 섰다.

경이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한 사람 씩 살펴보았다. 7 년이나 지났다고 하지만 엄마, 아빠의 모습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랫동네에 사는 아주머니가 마지막으로 내릴 때까지 엄마,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버스 종점이니까 더 이상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버스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떠나고 주위는 깜깜했다.

경이는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등에 업힌 수야가 무거워 이젠 견딜 수가 없었다.

경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구름에 가린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속에 가려 보이지 않는 달이 원망스러웠다.

‘너 때문이야. 네가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리니까 엄마, 아빠가 오시지 않는 거야.’

경이의 원망하는 마음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이 구름 속에 가렸던 달이 천천히 얼굴을 내밀었다. 주위가 갑자기 밝아졌다.

달은 더 이상 숨지 않겠다는 듯이 언덕 위에 둥실 떠올라 경이를 환히 비추었다.

경이는 다시 버스 정류장 쪽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버스가 떠나버린 길로 택시 한 대가 환한 불빛을 달고 달려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