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꿈꾸는 아이의 글밭/동화

<창작동화> 난 왜 엄마 아빠 얼굴을 그릴 수 없는 거야?

 <창작동화>

난 왜 엄마 아빠 얼굴을 그릴 수 없는 거야?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자, 오늘 미술 시간에는 엄마 아빠 얼굴과 꿈 그리기를 하겠어요. 도화지를 한 장씩 가져가도록 하세요.”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우르르 선생님 앞으로 몰려 나와 도화지를 받아 갔다.

“어제 선생님이 이야기한 대로 엄마 아빠 얼굴을 자세히 보고 왔지요?”

“예-.”

아이들은 신이 나서 재잘거리며 책상 위에 도화지를 펼쳤다. 벌써부터 슥슥 도화지에 연필을 대는 친구들도 있었다.

어제 학교 공부가 다 끝나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선생님께서는 오늘 미술 시간에 활동할 내용에 대해서 미리 말씀해 주셨다.

“이제 며칠 있으면 가을 운동회가 돌아와요. 이번 가을 운동회에 우리 학교에서는 만국기를 다는 대신 도화지에 엄마 아빠 얼굴과 여러분의 꿈을 그려서 달기로 했어요. 그래서 내일 미술 시간에는 엄마 아빠 얼굴 그리기를 할 것이니까 오늘 집에 돌아가면 엄마 아빠 얼굴 모습을 잘 관찰해 오세요.”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신이 나서 엄마 아빠 모습과 자기들의 꿈을 이야기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슬기는 다른 아이들처럼 신이 나지 않았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슬기는 책상 위에 가방을 팽개쳐 두고 방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엄마 아빠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엄마 아빠 얼굴을 떠올리려 애를 써 보았지만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다. 요즘 점점 엄마 아빠 얼굴을 떠올릴 수 없는 데 왜 그럴까?’

문득 눈을 들어 책상 위 벽에 붙어있는 연예인 사진의 달력을 보던 슬기는 달력의 숫자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것이었다.

그 때 눈물 한 방울이 손등 위로 똑 떨어졌다. 그제야 슬기는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 때문에 엄마 아빠 얼굴이 흐려져 보이는 것일까?’

슬기는 소매로 눈물을 쓱 훔치고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방에는 한 쪽 벽에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큰 액자가 있었다. 그 액자 속에는 슬기와 동생 로운이의 돌 사진과 할머니의 사진들이 외삼촌들의 사진들과 함께 끼워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엄마 아빠의 결혼식 사진도 함께 있었는데 그 사진은 할머니가 어딘가로 치워버려서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슬기와 로운이가 엄마 아빠 생각을 너무 자주 한다고 보지 못하게 치워버린 것이었다.

“자식들도 다 버리고 가서 몇 년이 지나도록 소식도 없는 에미 애비를 찾아선 어쩔 거여. 에구, 무정한 것들. 지 자식들이 이렇게 이쁘게 자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쯧쯧쯧.”

쯧쯧 혀를 차는 것이 손녀들을 위해 하는 것인지, 할머니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어도 그런 말끝에는 꼭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덧붙이곤 하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처럼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어디 가서 죽지는 않은 모양이여. 이젠 빚쟁이들고 찾아오지 않는데 전화라도 한 번 주지 않구서.”

아버지 어머니가 슬기와 로운이를 외할머니께 맡기고 떠난 것은 슬기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을 하고 로운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때였다.

외삼촌이 해주시는 말에 따르면 과수원 농사만 짓던 아버지는 무슨 사업을 같이 하자는 친구의 말을 듣고 집과 과수원을 모두 팔고 은행에서 큰돈을 꾸어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잘 될 줄만 알았던 사업이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슬기 아버지가 하는 사업도 잘 되지 않았고, 같이 사업을 하던 친구가 아버지 몰래 회사를 팔아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아버지 혼자서 빚을 다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악착같이 벌어서 빚을 다 갚겠다는 말과 함께 슬기와 로운이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어딘가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슬기가 6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소식 한 번 없었다.

외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많이 울기도 하였지만 이젠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로운이가 울면 오히려 로운이를 달래곤 하였다.

또렷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엄마 아빠의 얼굴은 한 해  두 해가 갈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곤 하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씩 사라지는 듯 하였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지나고 초등학교 졸업을 앞 둔 6학년 2학기가 되어서는 다시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면 날수록 머리 속에 기억해 주었던 엄마 아빠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은.

부모님의 결혼 사진이라도 걸려 있으면 환히 기억날 텐데 할머니는 그 사진을 어디로 숨겨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재잘거리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벌써 눈, 코, 입을 다 그리고 색칠을 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슬기는 우두커니 앉아서 친구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친구들은 부모님 모습을 그리는 데 열중하느라고 슬기의 도화지가 하얀 색 그대로 남아 있는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슬기는 눈을 꼭 감고 부모님 얼굴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윤곽은 잡히면서도 눈, 코, 입이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는 것이었다.

슬기는 눈을 뜨고 기억해낸 얼굴 윤곽을 도화지에 그렸다. 그러나 더 이상 크레파스를 댈 수가 없었다. 다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떠올리려는 얼굴은 점점 멀어져 가기만 하고 귀 속으로 친구들의 히히덕거리며 웃고 떠드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야, 다정이. 너의 엄마 완전 여고생이여.”

이건 눈을 뜨고 보지 않아도 가람이의 목소리였다.

“그래? 우리 엄마 그렇게 어리게 보여?”

“어. 머리가 여고생 머리처럼 그렸네.”

“그러면 조금 파마한 머리로 조금 뽀글뽀글하게 고쳐야지.”

슬기는 기억을 접고 눈을 떠서 친구들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람이가 여기 저기 다니며 다른 친구들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너의 아빠 멋있다. 정말 이렇게 생겼어?”

“아니. 그런데 그림으로 그려보니까 우리 아빠 이렇게 멋있을 줄 몰랐어.”

가람이는 얼른 동혁이의 그림을 들고 의자 위로 올라갔다.

“얘들아. 이것 봐. 동혁이 아빠 정말 멋있게 그렸지?”

동혁이는 친구들의 시선이 자기 그림에 집중되자 쑥스러운지 가람이가 들고 있는 그림을 빼앗으려 들었다.

“줘이. 다 안 그렸단 말이야.”

그러나 키가 작은 동혁이는 키가 큰 가람이가 의자 위에 올라서서 들고 있는 그림에 손이 닿지 않았다.

한참을 동혁이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구경시키던 가람이는 이번에는 원희에게로 갔다.

“역시 원희 그림 솜씨는 알아줘야 해.”

가람이의 칭찬에 원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그림 솜씨 덕분에 우리 엄마 10년은 젊어졌다.”

“너의 엄마 이 그림 보면 굉장히 기분 좋아하겠다.”

“그런데 가람이 넌 다 그렸니?”

“응. 대충 그렸어. 우리 엄마 운동회 날 와서 이거 보지도 안 해.”

슬기는 친구들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도화지 위에 엎드려 버렸다.

‘난 왜 엄마 아빠 얼굴을 그릴 수 없는 거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설움의 덩어리들이 눈가로 밀고 올라오려고 했다.

이리 저리 눈을 돌리던 가람이는 슬기가 도화지 위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다가왔다.

“슬기야. 그림 다 그렸어?”

“아니.”

슬기는 올라오려는 덩어리를 간신히 눌러 버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런데 왜 그러고 있니?”

“그냥.”

“어디 보자.”

가람이는 슬기의 도화지를 뒤집어 보았다. 그러나 슬기의 도화지에는 동그란 얼굴 모양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거의 다 그렸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빨리 그려야지.”

가람이의 재촉에 슬기는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엄마 아빠 얼굴이 생각이 나지 않아.”

“슬기야…….”

가람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기의 두 손을 끌어다 잡았다. 슬기도 가람이에게 손을 잡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 참이 지난 뒤 가람이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슬기야. 난 네 기분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물어보았어.”

“아니야. 괜찮아.”

가람이를 보며 괜찮다고 하는 슬기의 얼굴이 웃고 있었지만 어느새 눈에는 눈물을 담고 있었다.

“슬기야. 부모님 얼굴이 생각나지 않으면 할머니 얼굴을 그리면 되잖아. 할머니께서 너를 키워주시니까 할머니가 엄마 아빠 대신이잖아.”

“그럴까?”

“그래, 그러자. 내가 도와줄게.”

슬기의 도화지가 드디어 선과 색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슬기와 가람이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슬기의 도화지에는 태왁을 짚고 푸른 바다 위에 떠서 웃고 있는 주름진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래. 난 더 이상 울지 않을 거야.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이를 악물고 이겨낼 거야. 가람이 말처럼 할머니가 엄마도 될 수 있고 아빠도 될 수 있는 거야.’

그림을 그리는 슬기의 크레파스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슬기는 집에 돌아와 인터넷 학급 카페 ‘독서는 마음의 양식’ 방에 들어가서 어제까지 읽은 책의 주인공 효섭이에게 보내는 독서 편지를 썼다.


독서편지-효섭이에게


효섭아, 안녕?

나는 6학년 슬기라구 해. 너의 이야기가 써있는 책을 읽고 너에게 편지를 쓰는 거야.

너와 나는 닮은 점이 참 많구나. 나도 너같이 아빠가 없어. 그렇다고 엄마가 계신 것도 아니야. 너처럼 동생과 할머니와 지내고 있어.

효섭아, 물론 방학중에 그것도 크리스마스 전날 아버지는 보낸 것은 가슴이 너무 아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매일 아프게 지내지는 마. 나도 아이들이 아빠나 엄마 이야기를 하면 끼어 들고는 싶지만 엄마랑 아빠 이야기를 모르니까 끼어 들 수가 없어. 하지만 꿋꿋하게 참고 이해하며 살면 되는 거야.

오늘 미술 시간에 부모님 얼굴 그리기를 하는데 난 할머니 얼굴을 그렸어. 나를 낳아 주시고 어릴 때 길러 주신 건 부모님이시지만 이젠 할머니께서 우릴 돌봐주고 계시니까 할머니가 엄마나 마찬가지야.

이모랑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어.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아이일수록 더욱더 다른 아이들보다 꿋꿋하게 참고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다른 아이들은 몰라. 우리가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를. 그래도 할머니가 있으니 망정이지. 난 지금이 좋아.

효섭아, 우리 부모님이 없다고 기죽지 말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기죽게 되는 거야. 우리 다른 아이들보다 더 꿋꿋이 살도록 노력하자.

그러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참고 견디며 살수 있을 거야.

나도 늘 그래왔는걸 뭐.

뭐 더 이상 할말은 없을 것 같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 더 이상 우리 눈물은 흘리지 말자.

그럼 이만 쓸게.


운동회 날이 되었다.

가을 하늘이 참 맑고 깨끗했다. 구름 한 조각이 국기 게양대에 걸려있을 뿐이었다.

슬기가 운동장으로 들어섰을 때 운동장은 신이 나서 떠드는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만국기는 그냥 여러 나라의 국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그린 부모님 얼굴과 꿈이었다.

학년별로 한 줄씩 그림이 달려 있었다.

슬기는 6학년 그림 줄에서 자기의 그림을 찾아보았다. 그림들을 하나 하나 살피면서 가고 있는데 줄의 가운데쯤에서 태왁을 짚은 할머니가 슬기를 보며 웃고 있었다. 슬기도 그림 속의 할머니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슬기의 꿈을 그린 그림은 맨 끝 가까이에서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어른이 된 슬기가 엄마 아빠를 찾아 얼싸안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래. 이 그림처럼 어른이 되면 엄마 아빠를 꼭 찾을 거야.’

주먹을 꼭 쥐고 있는데 가람이가 다가왔다.

“슬기야. 여기 있었구나. 얘, 작품을 전시하는 곳에 네 시가 전시되어 있어.”

“내 시? 난 전시할만한 시를 쓴 일이 없는데……”

“가보면 알아.”

가람이의 손에 이끌려 전시장소에 가보니 정말 슬기의 시가 그림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이거 지난번 교내 예능경연대회에서 쓴 시구나. 선생님께서 시화 작품으로 만들어 주셨네.”

가람이가 소리내어 슬기의 시를 읽었다.


어머니


어디계신지

무얼 하시는지

알 수 없는

우리 어머니


그 무얼 해도

어머니 생각만 나고…….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언젠간 오시겠지

우리를 낳고 키운 건

어머니시니까.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

나는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느낄 수 있겠지.


가람이의 읽는 소리를 따라 눈으로 시를 읽으며 슬기의 가슴에서는 다시 눈물이 만들어져 올라오려고 하였다. 그래서 얼른 가람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만 가자. 잘 쓴 시도 아닌데 뭐.”

“얘는. 잘 쓴 시니까 선생님께서 전시해 주셨지. 네 마음이 담겨있는 시잖아.”

슬기와 가람이는 손을 잡고 아이들이 몰려서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가람이의 손이 슬기의 손을 꼬옥 쥐었다. 슬기도 가람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아이를 향해 그림 속의 할머니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