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비가 내리는 마을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벌써 며칠째 내리는 비인지 모릅니다. 하늘 문에 구멍이 뚫린 듯 좍좍 쏟아지던 빗줄기가 부슬부슬 가늘어지는 듯 하다가도 다시 후드득거리며 내리기를 며칠 동안이나 계속하였습니다.
아무리 장마철이라지만 햇볕 구경을 한 지가 언제인지 사람들은 기억에도 없습니다. 아니, 햇볕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잊어버렸습니다. 봄가뭄으로 시들어가던 꽃들은 장마철로 접어들어 비가 오기 시작하자 좋아라고 잎을 활짝 벌렸었지만 이젠 햇빛을 보지 못하여 꽃잎이 마를 새가 없어 썩어 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슬비네 동네 고산은 비가 잘 안 오는 동네라고 소문이 난 곳인데, 이번 장마는 어찌된 일인지 슬비네 동네에 엄청나게 비를 퍼부어대고 있었습니다. 한라산 북쪽 제주 마을에는 비가 많이 오지 않고 햇빛도 가끔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작은 제주섬에서 뭐가 다른지 슬비네 동네 근처에만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슬비 아빠는 오늘도 논에 나가서 물꼬를 손질하며 비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곤 하였습니다. 그 눈에는 하늘을 향한 한숨과 원망의 말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휴, 하늘은 왜 우리 농민들 마음을 몰라주고 이렇게 비만 내려 보내나 그래!”
슬비 아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논들은 논이라고 해야 할지 수영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물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물의 바다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벼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었고, 물살에 휩쓸려 허리가 휘어진 벼들은 물 아래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한숨을 쉬던 슬비 아빠는 다시 논둑 아래로 내려서서 삽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슬비 아빠의 삽질은 내리는 비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가늘게 내리던 비가 갑자기 장대비로 변하여 퍼붓기 시작하였습니다. 물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었던 벼이삭들이 금세 물속에 잠겨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논물을 빼내려고 애쓰던 슬비 아빠는 삽질을 멈추고는 사방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는 논둑 위로 올라왔습니다.
“이번 비에 금년 벼농사는 끝나버렸구나!”
한숨을 폭폭 쉬던 슬비 아빠는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길가 도랑물이 길 위로까지 흘러넘쳐 도랑과 길의 구분이 없어져버렸습니다. 철철 흐르는 빗물을 철벅철벅 밟으며 어깨에 삽을 메고 힘없이 걸어가는 슬비 아빠의 모습이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패잔병의 모습 같았습니다.
논밭들이 끝나고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쯤, 퍼붓던 비가 가늘어져서 부슬부슬 가는 비로 바뀌었습니다. 슬비 아빠는 다시 논이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서 가려다가 고개를 흔들곤 마을길로 들어섰습니다.
마을로 들어서는 슬비 아빠의 발걸음이 휘청거렸습니다. 비가 오는 며칠 동안 논이 물에 잠길까 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비 오는 논에서 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부슬부슬 부슬비 하루 종일 내리는 비
무엇을 하려고 하루 종일 내리나
구슬구슬 구슬비 밤새도록 내리는 비
무엇이 구슬퍼서 밤새도록 내리나
비틀거리며 힘없이 걷고 있는 슬비 아빠의 귀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노랫소리는 슬비 아빠가 걸어가고 있는 마을 어귀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들리고 있었습니다. 슬비가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입니다.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아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슬비 아빠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비는 가늘어졌다가 굵어졌다가 하면서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슬비 아빠는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방안에 퍼질러 앉았습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려서 방안이 칙칙하였습니다. 칙칙한 방안처럼 슬비 아빠의 얼굴도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수염도 깎지 않아 덥수룩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칙칙한 얼굴이었습니다.
“슬비 아빠, 물꼬는…… 다 트셨어요?”
어느 새 슬비 엄마가 들어와 곁에 앉아 슬비 아빠의 어두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하늘이 원망스러워! 하늘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아.”
“그러게 말이에요. 평생에 이렇게 여러 날 동안 그치지 않고 내리는 장맛비는 처음인 것 같아요.”
슬비 아빠와 엄마는 박자를 맞추듯이 한숨을 푹푹 쉬다가 한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이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만 바라보았습니다.
텔레비전을 틀어 뉴스를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소식은 지루한 장맛비로 논밭이 물에 잠기고 있는 농촌의 소식들이었습니다.
슬비 아빠는 신경질적으로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드러누워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물꼬를 손보느라고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도 잠은 찾아오지 않고, 감은 눈 속으로 빗물이 넘치는 논의 모습만 아른거렸습니다.
하늘을 가득 덮은 먹구름 때문에 시간이 얼마만큼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밖에서 또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구슬구슬 구슬비 하루 종일 내리는 비…….
“아휴, 신경질 나! 얘, 너희들, 우리 집 앞에까지 따라와서 계속 그럴 거니? 엄마, 얘네들 혼 좀 내 주세요.”
슬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습니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슬비를 따라오며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이 돌아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의 놀리는 노래를 뒤에 따라 붙이고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슬비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습니다. 우산을 썼지만 허리 아랫부분은 쫄딱 젖어버린 슬비는 가방을 팽개치고 젖은 옷과 신발을 벗어 던졌습니다.
“어휴, 이놈의 비, 언제 그치나?”
슬비의 입에서 어른들의 말을 흉내낸 듯한 말이 거칠게 나왔습니다. 요즘은 비 때문에 식구들의 말도 차츰 거칠어지고 있었습니다.
“엄마, 친구들이 자꾸만 놀려요. 구슬비, 부슬비, 이슬비. 비, 비, 비……. 엄마, 왜 제 이름을 슬비라고 지었어요?”
슬비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신경질과 짜증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얘, 슬비야, 조용히 해! 아빠가 깨실라.”
엄마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하고 방 안을 힐끔거렸습니다. 요즘 아빠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알고 있는 슬비는 엄마의 이야기에 더 이상 심술을 부리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잠이 든 것처럼 보였지만 눈만 감고 잠이 들지 않은 슬비 아빠는 방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작게 끙 소리를 내곤 몸을 뒤척여 돌아누웠습니다.
잠시 후 슬비는 조용히 방을 나와 비옷을 입고, 그 위에 다시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습니다.
길 옆 도랑에는 빗물이 콸콸 소리 내어 흐르고 있었고, 도랑물은 길 옆으로 작은 시내를 이루어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치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을 밖으로 펼쳐져 있던 논밭은 물로 가득 덮여 있어서 큰 호수가 마을 옆에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슬비는 들판 가운데로 곧게 난 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슬비네 논도 호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논두렁에 삽과 괭이가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속상해 하는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슬비의 마음도 내리는 비처럼 더 울적해졌습니다.
슬비가 걸어가고 있는 들판 너머에는 야트막한 작은 오름 수월봉이 있었습니다. 수월봉 꼭대기에는 멀리서도 작고 둥근 돔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슬비는 산꼭대기의 돔을 향해서 비를 맞으며 곧장 걸어갔습니다. 빗물로 가득 덮인 넓은 들판에서 노란 작은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는 슬비의 모습이 물 위에 떨어뜨린 노랗고 작은 고무공 같았습니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소나무들이 들어선 시멘트길을 따라 꼭대기 가까이 이르자 둥근 돔 뒤쪽으로 다른 건물들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좀 더 올라가자 길다란 나무판에 멋들어지게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 제주지방기상청 고산기상대 -
슬비는 기상대의 정문으로 들어섰습니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는 작은 돔이었는데, 가까이서 본 기상대의 둥근 돔은 커다란 풍선 모양이었습니다. 축제날 플래카드를 매달고 하늘에 띄우는 커다란 애드벌룬을 건물 옥상 위에 올려놓은 것 같았습니다.
“아저씨!”
슬비는 기상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작업을 하던 기상대 직원들이 몸을 돌렸습니다.
“어, 넌 누구니? 어떻게 왔니?”
“전 저 마을에 살고 있는 슬비예요. 아저씨, 이 장마 언제 그치는 거야?”
슬비는 다짜고짜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슬비의 갑작스런 물음에 직원들은 어리벙벙하여 슬비를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습니다.
한참 만에 직원 한 명이 입을 열었습니다. 짤막한 대답이었습니다.
“몰라.”
“기상대 아저씨들이 모르면 어떻게 한다는 거야! 아저씨들은 기상대에서 일하잖아! 아앙-. 아저씨, 비가 오지 않게 해 줘.”
슬비는 신경질을 부리며 말하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어, 어, 스, 슬비야.”
갑작스런 슬비의 출연과 갑작스런 울음에 삼촌과 기상대 직원들은 난감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얘, 얘, 왜 그러니?”
“슬비야, 울음 뚝.”
“아무리 우리가 기상대에서 일한다고 하지만 오는 비를 막을 방법은 없는데 어떡하란 말이야.”
너도 나도 한 마디 씩 하며 슬비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 했지만 슬비의 울음은 더 커질 뿐이었습니다.
“비가 싫단 말이야. 우리 논이 다 떠내려간단 말이야. 우리 아빠가 비 때문에 힘들어 하신단 말이야. 아이들이 날 보고 ‘이슬비, 구슬비, 부슬비’ 하면서 놀린단 말이야.”
슬비는 마음속에 담아 두고 온 말을 펑펑 쏟아내었습니다.
아저씨들이 쩔쩔 매고 있을 때 기상대 대장님이 슬비의 울음소리를 듣고 사무실로 들어오셨습니다. 대장님은 직원들로부터 슬비가 울고 있는 까닭을 가만히 듣더니 빙긋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잠시 후 울음을 그친 슬비는 대장님 앞 소파에 앉아 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직원들도 일을 하며 귀를 대장님과 슬비의 이야기 쪽으로 쫑긋 세웠습니다.
“슬비야, 장맛비가 너무 많이 내리지?”
“예.”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대장님의 물음에 울음을 내려놓은 슬비는 다소곳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도 이 비가 너무 싫단다. 빨리 그쳤으면 좋겠어.”
“그런데 아저씨들은 기상대에서 일하잖아요. 비를 그치게 하면 되잖아요.”
“하하하, 슬비야. 기상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비가 오게 하고 그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란다.”
슬비는 눈이 동그래지며 고개를 가만히 갸웃거렸습니다.
“이상하네. 텔레비전에서 일기예보를 하는 것을 볼 때 엄마가 일기예보는 기상대에서 한다고 가르쳐 주셨는데…….”
“하하하, 그랬구나. 그래서 비가 그치게 해 달라고 기상대에 찾아온 것이구나. 그렇지”
“예.”
“슬비야, 그런데 어떡하지? 기상대에서는 비가 그만 오게 할 수 없는데.”
“그래요?”
슬비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며 울상이 되어갔습니다.
“비가 빨리 그쳐야 되요. 우리 논과 밭이 다 떠내려가요. 아빠도 엄마도 비 때문에 속상해 하셔요. 친구들도 내 이름을 가지고 놀린단 말예요.”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 슬비가 참 속상하겠네. 아저씨들도 비가 너무 오래 와서 속상하단다.”
울상을 짓던 슬비는 눈에 눈물을 담은 채로 고개를 들고 대장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비를 그치게 해요? 누구에게 얘기하면 비가 그치는지 얘기해 주세요. 아저씨들보다 높은 사람이에요?”
슬비의 물음에 대장님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여졌습니다. 사무실 안의 아저씨들의 이마에도 작은 주름이 하나씩 생겨났습니다.
한참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슬비는 아저씨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이 아저씨, 저 아저씨의 눈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아저씨들은 슬비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바닥을 내려다보거나 천정을 올려다보곤 하였습니다.
“흠. 흠.”
아저씨들은 억지로 내는 듯한 헛기침을 하였습니다.
대장님의 주름이 다시 펴졌습니다.
“그래. 비를 그치게 할 수 있는 분은 아주 높은 분이란다.”
슬비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습니다.
“아주 높은 분이요? 우리 어린이집 원장선생님보다도요?”
“그럼.”
“별을 단 장군보다도요?”
“그러엄.”
잠시 생각하던 슬비는 손뼉을 탁 쳤습니다.
“아, 맞다. 대통령님이구나.”
“아니, 대통령님도 비가 오게 하고 그치게 하고 할 수 없단다. 대통령님보다 더 높은 분이시지.”
슬비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누구지? 대통령님보다 높은 분은 없는데.”
“있어. 그 분은 비가 오게도 하고, 햇빛이 쨍쨍 비치게도 하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게 할 수도 있는 분이란다.”
“아저씨, 빨리 말씀해 주세요.”
슬비의 애타는 마음을 알면서도 대장님은 빙그레 웃기만 하였습니다.
“아저씨이─.”
대장님은 슬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슬비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슬비야, 너 교회 다니니?”
“예. 나 예수님을 믿어요.”
“그럼 잘 됐네. 슬비야, 너 이제 집에 돌아가면 교회에 가서 비가 그치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렴.”
“어떻게 기도하면 되요?”
“이렇게 하렴. 예수님, 우리 마을에 비가 너무 내려서 아빠 엄마가 속상해 해요. 비를 그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예수님께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단다.”
“알았어요. 나 그렇게 기도할 수 있어요. 아저씨, 나 이제 집에 갈래요. 얼른 교회에 가서 기도하겠어요.”
슬비는 아저씨들게 인사를 하고 비가 내리는 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비도 계속 내리는 것이 지쳤는지 그쳐 있었지만 슬비가 집에 돌아와서 방으로 들어가자 다시 세차게 퍼붓기 시작하였습니다.
슬비는 저녁을 먹고 교회에 가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섰습니다.
“엄마, 나 교회에 가서 비가 그치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올게요.”
“그래, 오래 있지 말고 빨리 와야 한다.”
“예, 엄마.”
슬비는 다시 집을 나와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는 슬비네 집 옆에 있었기 때문에 뛰어가면 금방 갈 수 있었습니다.
교회로 들어간 슬비는 텅 비어 있는 교회당의 맨 앞자리에 앉아 손을 가지런히 모았습니다.
“예수님, 우리 마을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논이 물에 잠겼어요. 아빠가 물에 잠긴 논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고생하고 있어요. 예수님, 비가 그만 내리게 해 주세요.”
슬비의 작은 목소리가 작은 교회당 안에 조그맣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슬비는 계속해서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드렸습니다.
“예수님, 우리 마을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 비가 그만 내리게 해 주세요.”
슬비는 기도를 잘 할 줄 몰랐지만 기상대장님이 가르쳐 준 대로 같은 내용으로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러다 하루 종일 피곤했던 슬비는…….
슬비는 어느새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슬비가 걸어가고 있는 산길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슬비는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마냥 높은 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가고 올라가고 하였습니다.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하면 예수님은 내 소원을 더 잘 들어주실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슬비의 걸음은 지칠 줄을 몰랐습니다.
산길 세 굽이 쯤 돌았을 때 작은 아이 하나가 길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슬비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우산도 쓰지 않고 우비도 입지 않았지만 빗물에 젖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가 내리다가 아이의 머리 위에서 옆으로 비껴 떨어져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네.’하고 생각하며 슬비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주변의 모습도 이상했습니다. 둘이 있는 숲속은 비가 오고 있는데도 밝은 햇빛이 환히 비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내리는 빗물이 그냥 물빛이 아니라 금빛이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슬비를 향해 방긋 미소 지었습니다. 슬비도 작은 아이에게 빙긋이 웃어보였습니다.
“얘, 어디를 급히 가고 있니?”
“응, 저 산 꼭대기에 올라가.”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예수님께 기도하려구. 이 비가 그치게 해 달라고…….”
“너 이름이 슬비구나.
“응, 그래.”
“잘 됐다. 슬비야, 이젠 산꼭대기에 올라가지 않아도 돼.”
“안 올라가도 된다고? 왜? 그리고 너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아니?”
슬비는 눈이 동그래져서 작은 아이에게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난 예수님이 보내서 여기 앉아 있거든. 여기 앉아 있으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를 만나려는 슬비라는 아이가 올 거라고 했거든.”
“그래? 예수님은 같이 안 오셨니?”
슬비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릴 뿐 작은 아이와 자기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응 예수님은 같이 안 오셨어. 금집에 계셔.”
“히힝, 예수님 만나고 싶은데…….”
“슬비는 착한 아이니까 나중에 만날 수 있을 거야. 예수님이 슬비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있어.”
“뭔데?”
“비가 그치게 하는 방법 말이야.”
“어떤 방법인데?”
슬비는 작은 아이에게 한 발 더 다가섰습니다.
“음. 그것은…….”
작은 아이는 뜸을 들이며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았습니다. 슬비는 작은 아이의 입술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그것은…, 비가 그치게 하고 싶다면 슬비의 고운 목소리와 바꾸어야 된다고 했어.”
“내 목소리와?”
슬비는 말을 하다 말고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작은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작은 아이도 슬비도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아빠의 지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엄마의 근심어린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물에 가득 덮인 논과 밭들이 보였습니다. 또 다른 장면들도 떠올랐습니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해 주시던 어린이집 선생님 모습과 어린이집 발표회 때 무대에서 노래 부르던 모습도 행각이 났습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들이 떠돌던 슬비의 머릿속에 다른 모습들은 차차 희미해지면서 아빠 엄마의 모습이 점점 뚜렷하게 커졌습니다.
슬비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습니다.
“알았어. 내 목소리와 바꿀게. 어서 비가 그치게 해 줘.”
“악속 한 거다. 손가락 걸어.”
슬비와 작은 아이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을 꼬옥 붙였습니다. 뜨거운 바람 같은 것이 작은 아이의 손가락에서 슬비의 손가락으로 옮겨와서 배로 들어오더니 다시 가슴으로 올라와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집에 가 봐. 비가 그쳤을 거야.”
“고마워, 작은 아이야.”
말을 하는 순간 슬비의 목소리는 어느새 꽉꽉 잠기고 쉬어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와 헤어진 슬비는 오르던 산길을 되돌아서 내려갔습니다.
‘아 참, 그 아이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네.’
뒤돌아서 바라보았을 때 작은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굴까, 그 아이? 예수님이 보내서 왔다는데…….’
내려가는 숲길 주위의 나무들이 금빛 햇빛과 금빛 비를 받아 싱그럽게 반짝였습니다. 그랬습니다. 내리던 비는 슬비가 지나가는 곳마다 금빛으로 바뀌어 떨어지고 있었고, 칙칙하던 숲은 금빛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살랑이며 노래하는 듯 하였습니다.
마을 어귀에 이르렀습니다. 마을 쪽으로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슬비가 서 있는 동구밖에는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내리던 비는 물방울 비가 아니라 노랫가락을 담은 음표로 변하여 땅에 떨어질 때마다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슬비는 마을 길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노래비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슬비가 지나가는 곳마다 내리던 물방울비가 노래비로 변하였가곤 하였습니다. 온 마을이 비가 그치고 환해졌습니다.
슬비는 이제 논으로 나갔습니다. 슬비가 논둑길을 걸어갈 때마다 내리던 비가 노래비로 변하고, 환하고 밝은 햇빛이 호수로 변한 논에 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슬비네 논에도 이웃집 논에도, 온 마을의 논들에 햇빛이 비쳐들었습니다.
슬비는 신이 났습니다. 마을로 논둑으로 뛰어다니는 슬비의 발걸음이 날개가 달려 날아가는 듯 가벼워졌습니다.
비 때문에 꼼짝 못하고 집에만 들어앉아 있던 마을 사람들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지겹던 비가 그치고 햇빛이 비치자 얼굴들이 햇빛처럼 환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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