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동화>
바람이 사는 집
꿈꾸는 아이 한천민
봄바람이 강을 건너고 들판을 지나 천천히 달려왔습니다.
봄바람이 달려오는 들판에는 바람의 발 아래로 광대나물이 보랏빛 작은 꽃을 피우고 있었고, 냉이도 겨우내 땅바닥에 납작하게 눕혀 놓았던 잎을 세워가며 하얀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낮은 언덕배기로 올라가서 소나무 가지 사이를 맴돌다 언덕 아래 작은 집을 기웃거렸습니다.
작은 집 창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본 바람은 얼른 그 틈으로 들어가 작은 거실을 감돌았습니다.
“솔이야, 봄바람이 이제 제법 따뜻해졌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엄마가 열린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을 느끼고 솔이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솔이의 대답을 들으려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거실에 들어온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듯 두 손을 올려 손바닥을 폈습니다. 바람이 엄마의 손가락 사이를 간질이며 거실을 맴돌다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솔이야, 마당으로 나가서 봄바람을 더 느끼고 싶구나. 엄마 손을 잡아 줄래?”
“예, 엄마.”
솔이는 읽던 동화책을 덮어 두고 엄마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습니다. 엄마는 솔이의 손에 한 손을 이끌리고 다른 손으로는 빈 곳을 더듬으면서 신발을 찾아 신고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거실에 들어왔다 나간 봄바람이 마당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솔이는 마당 가 나무 아래 놓여있는 벤치로 엄마의 손을 이끌어 가서 엄마를 앉혔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봄바람이 내려와 살며시 엄마의 머리카락을 날리며 코끝을 간질였습니다.
엄마는 가볍게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바람을 잡으려는 듯 빈손을 머리 위로 올려 가만히 쓸어보았습니다. 머리 위로 올린 엄마의 손가락 사이로 봄바람이 감겨들었습니다. 봄바람과 함께 따스한 봄 햇살도 감겼습니다.
벤치에 앉아 봄바람과 봄 햇살을 즐기는 엄마를 바라보다 솔이도 엄마처럼 손을 머리 위로 휘저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솔이의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손을 크게 벌려 휙휙 저어보았지만 그저 빈 손 그대로였습니다.
“엄마, 뭘 잡으려는 거예요? 제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아요.”
솔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조금 섞여 있었습니다.
“솔이야, 눈을 뜨고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만지지도 못한단다. 엄마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느껴봐. 봄바람이 손에 만져지지 않니?”
짜증이 섞인 솔이의 목소리와는 달리 엄마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웠습니다.
솔이는 엄마의 말씀에 따라 눈을 감고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조몰락거렸습니다. 그러나 역시 손가락에 느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아무 것도 잡을 수가 없어요.”
솔이의 목소리에는 조금 전보다 더 짜증이 묻어 있었습니다.
봄바람을 손에서 느끼는 엄마와는 달리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솔이는 거실로 들어가서 읽던 동화책을 다시 펴들었습니다.
솔이네는 이곳 시골로 오기 전에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서울에서도 공장이 많이 몰려있는 지역에 솔이네 집과 솔이 아빠의 공장이 있었습니다.
솔이 아빠는 일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이 있는 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20년 전쯤에 작은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한 아빠는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일하여 차차 공장의 크기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는 예쁜 사람을 만나 결혼하여 솔이를 낳았습니다.
솔이 아빠와 엄마는 부지런히 일하면서 그 지역에서는 제일 큰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솔이를 키우면서 이젠 행복만 계속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불행이 찾아온 것은 재작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사장 부인이면서도 집에만 있지 않고 공장에 나가 솔이 아빠와 같이 일하시던 솔이 엄마는 어느 날 두 눈이 아파 견딜 수가 없어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사의 말을 듣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고 아픈 눈이 더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눈이 점점 나빠져서 그대로 놔두면 얼마 못가서 두 눈이 모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의사의 말씀에 따라 공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입으면서 눈이 낫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눈의 아픔이 사라지자 또 다시 공장에 가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며칠이 못 가서 다시 눈이 아프고 이번에는 정말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엄마의 눈은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눈이 아픈 원인은 과로와 공장에서 나온 나쁜 먼지들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곧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눈을 수술한 솔이 엄마를 공기가 맑은 시골에서 요양하게 하면 좋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공기가 맑은 시골 마을에 마당이 있는 작은 집을 사서 엄마와 솔이를 거기서 살도록 하였습니다.
엄마와 솔이의 시골 생활은 매일 똑 같은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는 거실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는 쪽으로 마주 앉아 해를 기다려 해바라기를 하였습니다. 엄마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해가 뜨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검정색을 칠한 것 같이 깜깜하던 눈앞이 해가 뜨면 불그레해지며 해가 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엄마의 시신경은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밝고 어두운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용히 앉아 떠오르는 아침 해를 향해 해바라기를 하던 엄마는 해가 더 올라와 따뜻해지면 거실 문을 열어놓고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거나 마당으로 나가 오랫동안 앉아 있곤 하였습니다.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토요일. 오늘도 엄마는 거실 문을 열어놓고 들어오는 바람을 느껴보다가 솔이의 손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바람이 간들간들 불면서 엄마의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고,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엄마의 눈에서, 손등에서 작은 간지럼을 태웠습니다.
오늘은 솔이 엄마에게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눈을 수술한 후 시골로 내려와서 오랫동안 요양을 하고난 후 아버지가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오는 날이었습니다. 눈이 불편한 엄마를 위해서 의사 선생님이 가끔씩 내려와서 살펴보고 가시곤 하였는데, 오늘 드디어 눈에 대고 있던 안대를 떼어내는 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설렘이 있어서 그랬던 것인지, 엄마는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몸을 곱게 단장하고 따스한 햇빛과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마당으로 나와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멀리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엄마는 발자국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향해 소리를 세었습니다.
자박 자박 자박 자박…….
조금 큰 발자국이 솔이네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또박 또박 또박 또박…….
조금 작은 발자국이 조금 큰 발자국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발자국들은 솔이네 집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훈이 어머니, 오셨어요?”
솔이 엄마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나왔습니다.
“예, 솔이 어머니, 오늘은 좀 어떠세요?”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이 차갑지 않아 그런지 참 기분 좋은 아침이네요.”
“호호호. 봄이 성큼성큼 걸어서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 몸이 봄이 온 것을 먼저 알아차리네요.”
훈이 엄마와 기분좋은 인사를 나눈 엄마는 거실 쪽을 향해 소리를 높였습니다.
“솔이야, 훈이 왔다.”
거실에서 동화책에 빠져 있던 솔이는 엄마의 목소리에 눈을 들어 마당을 향했다가 동화책을 덮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훈이야, 안녕?”
“그래, 솔이도 잘 있었어?”
훈이 엄마는 솔이와 인사를 하며 엄마 곁 벤치에 앉았습니다.
“훈이야, 우리는 나가서 놀자. 엄마, 훈이와 밖에서 놀다 올게요.”
엄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솔이는 훈이의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나섰습니다. 손을 잡힌 훈이가 쭈뼛거리며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놀다 오너라.”
“호호호. 솔이가 혼자서 심심했나 봐요. 훈이 데리고 더 자주 와야겠어요.”
대문을 나서는 두 아이의 뒤로 솔이 엄마와 훈이 엄마의 웃음소리가 따라 나왔습니다.
훈이 엄마는 솔이네가 살고 있는 마을의 이웃 마을에서 살고 있는 솔이 아빠의 먼 친척이었습니다. 솔이네가 서울에 살 때는 왕래가 거의 없었지만, 솔이 엄마가 요양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온 후부터 훈이 엄마는 매일 한 번씩 와서 눈이 보이지 않는 솔이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면서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훈이는 오늘같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엄마를 따라 몇 번 솔이네 집에 오곤 하면서 처음에는 조금 서먹서먹했지만, 시골로 내려와 친구가 없던 솔이에게 이끌려 둘이는 금세 친해졌습니다. 솔이는 훈이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동화책과 그림책들을 보여주었고, 훈이는 솔이에게 집 근처의 작은 산과 시내로 데리고 다니면서 서울에서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경험들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솔이는 동화책을 읽거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보다 시골 생활의 재미에 점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시냇물 속에서 가재를 잡기도 하였고, 나뭇잎으로 배를 만들어 시냇물에 띄워 놀기도 하였고, 곱게 물든 단풍잎들을 모아 도화지에 붙여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훈이는 풀과 나무 이름도 많이 알았습니다. 솔이가 보기에는 저 나무와 이 나무가 같은 나무 같기도 하고, 이 풀과 저 풀이 그게 그거 같기도 하여 비슷비슷하게 보였였지만, 훈이는 척척 구분하여 이름을 이야기 해 주곤 하였습니다.
오늘도 솔이와 훈이는 시냇가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새 잎은 피워내어 연둣빛과 초록빛으로 한참 키워내고 있는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작은 나무들이 햇빛을 받으려고 바람에 작은 가지를 이리 저리 흔들고 있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는 노란 꽃들이 무더기를 지어 피어 있었습니다.
“이 꽃은 양지꽃이라고 하고, 저 꽃은 가락지나물이라고 하는 거야.”
훈이가 가리키는 꽃을 서로 비교하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솔이에게는 알쏭달쏭하기만 하였습니다.
“난 잘 모르겠다. 꽃이 모두 노란 게 똑 같이 보이네 뭐.”
“그래도 잘 보면 알 수 있어. 양지꽃은 땅에 누워서 자라고 가락지나물은 서서 자라잖아. 그리고 잎을 비교해 봐. 양지꽃은 잎이 조금 둥근데 가락지나물은 양지꽃보다 길쭉하거든.”
훈이가 말하는 대로 다시 살펴보아도 솔이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훈이가 가르쳐 주는 꽃 이름들이 들을수록 재미있었습니다.
“양지꽃은 양지쪽에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
“그럼 가락지나물은?”
“응, 그건……. 뭐라더라? 잎이 손을 닮았는데 꽃이 피면 손에 가락지를 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나 봐.”
식물 이름에 대해서도 척척 가르쳐주는 훈이가 솔이의 눈에 갑자기 어른처럼 보였습니다.
“와. 훈이는 식물박사 같애. 어떻게 그렇게 잘 아니?”
“뭐, 그런 걸……. 잘 알지 못해. 우리 이웃집 아저씨가 생태해설사라나 봐. 그 아저씨에게 들은 것 몇 가지 밖에 없어.”
훈이는 쑥스러워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솔이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둘이는 언덕 위 상수리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 봄들판을 바라보았습니다.
초록빛 물결을 가볍게 일렁이는 보리밭 위로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봄바람이 마을 뒷산에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를 들판 넘어 작은 언덕 위 두 아이의 귀에까지 실어다 주었습니다.
“훈이야, 너 바람을 만져보았니?”
갑작스런 솔이의 물음에 훈이는 뚱한 눈으로 솔이를 쳐다보았습니다.
“바람 말이야. 우리 엄마는 바람을 만질 수 있대. 오늘도 바람을 만진다고 하면서 마당으로 나가게겠다고 해서 마당 벤치에 앉혀드렸어.”
훈이는 눈을 한 곳으로 모으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고개를 끄덕이며 솔이에게 눈을 향했습니다.
“음. 어쩌면 만질 수 있을 지도 몰라. 어쩌면 난 바람을 만져본 것도 같아.”
“바람을 만져 보았다고? 어떻게?”
훈이는 바람을 잡으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언덕 위에 올라가서 시원하게 펼쳐진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으면 바람이 손으로 감겨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어.”
“애걔. 그게 바람을 잡는 거야?”
솔이는 실망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아니, 그건 내가 바람을 잡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내게 와서 잡히는 걸 거야.”
훈이는 이제 눈을 빛내며 확실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훈이의 큰 고갯짓에 입을 삐죽거리던 솔이의 얼굴도 다시 조금 펴졌습니다.
“그럼 나도 바람을 잡을 수 있을까?”
“응. 잡을 수 있고말고.”
“얼른 바람을 잡으러 가자. 어디로 가면 되는 거야?”
솔이는 훈이의 손을 잡고 흔들며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훈이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서 가자니까.”
“그냥 여기서도 바람을 잡을 수 있을 거야.”
“여기서도? 높은 언덕에 가야 바람을 잡을 수 있다면서?”
“꼭 그렇지만도 않아. 여기 이 아래로도 바람이 불어오고 있잖아. 이 바람을 잡을 수 있을 거야. 자, 이렇게 해봐.”
훈이는 상수리나무 아래 서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섰습니다. 손바닥도 활짝 펼쳤습니다.
솔이는 훈이가 하는 모양을 멀뚱하게 보다가 마지못한 듯 훈이처럼 팔을 벌리고 섰습니다.
한참 동안 서서 바람을 잡으려고 해 보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는 있었지만 벌린 팔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괜히 짜증만 일었습니다.
“뭐야? 아무 것도 잡히지 않잖아! 어떻게 하면 바람을 잡을 수 있다는 거야?”
솔이의 짜증에도 훈이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솔이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훈이를 보았습니다. 훈이는 허수아비마냥 팔을 벌리고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은 훈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짜증이 일던 솔이는 훈이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슬그머니 먼젓번의 자세로 돌아와서 훈이처럼 팔을 벌리고 눈을 감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솔이야, 바람을 잡으려고 하면 잡히지 않아. 엄마가 팔을 벌리면 아기가 와서 안기는 것처럼 바람이 다가오도록 가만히 기다려 봐. 바람이 다가와서 손을 잡아달라고 마음 속으로 바라면서 기다려 봐. 그러면 바람이 친구처럼 손을 잡아줄 거야.”
“훈이도 똑 같은 말을 하는구나. 우리 엄마도 눈을 감고 가만히 느껴보라고 하셨어. 그러면 바람을 잡을 수 있다고 하면서…….”
솔이는 다시 팔을 활짝 벌리고 서서 눈을 감았습니다. 이번에는 먼젓번보다 팔을 더 활짝 벌렸습니다. 손바닥도 더 활짝 벌렸습니다.
‘바람아, 어서 오렴. 어서 와서 내 손을 잡아 주렴. 나는 네 친구가 되고 싶단다.’
가슴 속의 말이 바람에게 전해진 것일까요? 솔이의 손가락 사이로 간질간질 무엇인가가 느껴지더니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살랑이며 감돌았습니다. 그러더니 바람이 솔이의 손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바람이 온 몸을 휘돌면서 머리카락도 쓰다듬고 옷자락을 잡아 흔들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훈이야, 바람이 내 손을 잡았어! 나도 바람을 잡을 수 있어!”
솔이의 들뜬 목소리가 바람이 되어 상수리나무 잎사귀를 흔들었습니다.
“그래, 축하해. 솔이도 이젠 바람의 친구가 되었구나.”
훈이가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둘이는 다시 팔을 벌리고 서서 바람의 손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먼젓번보다 더 쉽게, 더 빨리 바람이 솔이의 손을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바람의 말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바람의 말소리는 상수리나무 잎사귀들을 와사삭거리는 소리로 들려주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쏴아 불어오는 소리로 들려주었습니다. 앞산에서 노래하는 뻐꾸기 노래도 전해주었습니다. 들판 너머 남쪽 바다의 소식도 솔이의 귀에 전해주었습니다.
솔이와 훈이가 언덕 위에서 바람의 친구가 되어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와 있었습니다.
모두들 조심스럽게 의사 선생님의 손길을 따라 지켜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머리에 감았던 붕대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안대를 떼어냈습니다.
안대를 떼었는데도 엄마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천천히 눈을 떠 보세요.”
엄마는 눈가의 잔주름을 파르르 떨면서 천천히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뭐가 보이세요?”
아빠와 솔이가 엄마 앞으로 더 바짝 다가섰습니다.
“여보, 내 얼굴 보여? 우리 솔이 얼굴 보여?”
눈을 뜨던 엄마는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솔이는 안타까워 엄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습니다.
“엄마, 엄마, 눈을 떠 봐. 내가 보여?”
눈을 감았던 엄마가 다시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우리 솔이 예쁜 얼굴이 보여. 희미하게 보이긴 하지만 당신 얼굴도…….”
눈이 부신 듯 엄마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지만 다시 눈을 감지는 않았습니다.
“엄마!”
솔이는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엄마의 가슴에 솔이의 눈물이 떨어져 옷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훈이와 훈이 엄마가 손뼉을 치며 기뻐해 주었습니다.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젠 안심하셔도 됩니다. 공기 맑은 이곳에서 좀 더 요양을 하시면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엄마는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습니다.
“난 당신이 눈이 나으면 다시 서울에서 같이 살려고 했는데 이곳에 있는 게 당신을 위해서 더 좋겠구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빠도 기쁜 표정이었습니다.
“아니에요. 전 눈을 감고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서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을 느꼈어요. 자연이 주는 행복이라고 할까요?”
엄마의 말에 솔이도 얼른 끼어들었습니다.
“아빠, 저도 이젠 이곳이 좋아요. 오늘은 바람과도 친구가 되었어요.”
“허허, 이것 참. 나만 서울 외톨이가 된 느낌이네. 그렇다고 서울에 있는 공장을 놔두고 여기로 올 수도 없고. 할 수 없지 뭐. 엄마와 내가 주말부부가 되는 수밖에. 허헛 참.”
허허 참, 허헛 참을 연발하면서도 아빠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바람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마당을 한 바퀴 돌더니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거실로 들어가 이것저것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이젠 솔이의 눈에 바람의 손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아빠, 우리 집은 바람이 사는 집이야. 엄마도 바람을 만질 수 있고 나도 바람의 손을 잡고 친구가 되었어.”
“바람이 사는 집?”
아빠는 솔이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지만, 솔이와 엄마는 서로 마주보며 가만히 웃음을 지었습니다.
거실에 들어갔던 바람이 다시 마당으로 나와 솔의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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