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꿈꾸는 아이의 글밭/동화

<제주도 세시풍습 동화> 수눌음

 <제주도 세시풍습 동화>

수  눌  음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어머니, 재기재기 가게 마씀.”

“기여게. 와리지 말앙 조금만 이시라. 다 촐려사 가주게.”

어머니는 서두르는 려원이의 말에 대답하면서 부지런히 밥을 양푼에 퍼담았습니다.

“아따, 려원이 무사 경 와렴시니? 어떵 다 촐리지 안해영도 가지느냐?”

점심 준비를 같이 하고 있던 희경이 어머니가 나무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려원아, 경 재기 가고 싶으민 고만히 서 있지 말앙 점심 촐리는 거 도우라. 우선 숟가락이영 젓가락이영 서른 개쯤 세영 담으라.”

“예, 알았수다. 경 헌디 점심 먹을 사름들이 경 하수꽈 ?”

“기여. 스물 댓 명 쯤이나 왕 우리 밭에서 보리를 베염신예.”

“경 하영 와그네 일햄수꽈? 경 하민 우리 식구들만 사흘 걸려도 다 베지 못하는 밭의 보리를 낮전이민 다 베어블쿠다 양.”

려원이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일한다는 말에 놀라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어 담았습니다.

“려원아, 우리만 버청 못가졍 가키여. 우리 집에 강 희경이도 오랜 하라.”

희경이 어머니가 점심 담은 소쿠리들을 둘러보며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더니 마침 희경이가 려원이네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희경이는 제라하게 한국산 호랭이로구나.”

“아따, 희경이가 호랭이민 희경이 어멍은 에미 호랭이주게. 자, 이제 점심 구덕들을 들렁 가게.”

려원이와 희경이는 어머니들을 도와서 점심 그릇들을 들고 보리를 베고 있는 밭으로 갔습니다.

고양이 손도 필요하다고 하는 보리 수확 철입니다. 학교에서도 사흘 동안 농번기 방학을 하여 부모님들의 일손을 돕도록 했기 때문에 려원이와 희경이는 보리를 베는 사람들이 먹을 점심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일을 도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남자 아이들은 대부분 밭에 나가서 보리를 베거나 보릿단 묶는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쁜 철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 한 집의 일을 다 함께 해 주고, 또 다른 집의 일도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일이 흥겹고 빨리 되곤 했습니다. 또한 자기 집 일이 다 끝나서 노는 사람이 있으면 「수눌어」다가 바쁜 일들을 거뜬히 해치워버리곤 하였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이렇게「수눌음」하는 풍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인심 좋은 려원이네 마을에서는 수눌음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살던 려원이는 아버지의 고향인 이 마을로 와서 살게 되면서 자기네 마을이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번 보리베기철에는 어른들을 도와서 열심히 일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밭에 도착했더니 희경이네 밭의 보리는 벌써 다 베어져 있었고, 그 옆의 려원이네 밭의 보리를 베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려원이와 같은 반인 근봉이와 종은이도 와서 보릿단 묶는 일을 하고 있었고, 목청 좋은 종은이 어머니가 보리를 베면서 오돌또기 타령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오돌또기 저기 춘향 논다

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꺼나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버리고

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꺼나.


한라산 허리엔 시러미 익은숭 만숭

서귀포 해녀는 바다에 든숭 만숭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버리고

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꺼나.


제주야 한라산 고사리 맛도 좋고 좋고

산지야 축항 끝 뱃고동 소리도 좋고 좋고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버리고

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꺼나.


성산포 일출봉 해돋는 구경도 좋고 좋고

성내야 사라봉 해지는 구경도 좋고 좋고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버리고

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꺼나.


모두들 흥에 겨워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후렴귀를 함께 부르며 일손을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자, 점심밥 가졍 왔수다. 손 그만 놀령 점심 먹곡 쉬멍 쉬멍 일합서.”

“경 헙주. 자, 허리덜 펴주.”

려원이 어머니의 외침에 동네 사람들이 보리베던 일손을 멈추고 밭둑에 있는 나무 그늘로 나왔습니다.

려원이와 희경이는 어머니들을 도와서 어른들이 둘러 앉은 앞에 밥을 담은 양푼과 자리회 사발들을 날라다 놓았습니다.

“려원이하고 희경이가 어멍들 도왕 점심을 잘 촐렸구나.”

“게매. 이젠 다 컹 부름씨도 잘 하는 걸 보난 시집가도 되키여. 우리 집에 데려당 우리 메느리 하렌 하카?”

“어이구 근봉이 아방, 저 사름만 아들 이서? 우리 종은이도 일 잘하는 장정이라. 우리 메느리 하젠 하주 저 사름네 메느리 하젠 안 해여.”

“경 말앙 둘이난 하나씩 데려당 메느리 삼주.”

“경 하는 게 좋으크라.”

려원이와 희경이는 근봉이 아버지와 종은이 아버지의 우스개 소리에 그만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근봉이와 종은이도 얼굴이 빨개진채 못 들은 척하고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습니다.

“난 시집 안 갈 거우다.”

“나도 시집 안 강 평생 혼자 살거우다.”

둘이는 외치듯이 대답하고는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얼른 다른 쪽의 나무 밑으로 가서 그늘에 주저앉았습니다.

나무 그늘이 빨개진 얼굴을 조금 식혀 주었습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바라보는 논밭 풍경들이 한가로왔습니다. 벌써 보리를 다 벤 밭이 머리를 깎은 듯 시원스러웠고, 아직 베지 않은 보리밭에서는 이삭들이 황금빛 파도를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벌써 보리를 다 베고 탈곡을 하는 곳이 있는지 먼 데서 탈곡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려원이는 탈곡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눈을 돌리다가 가만히 한 곳만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다른 밭에서는 수눌음하여 많은 사람들이 왁자하니 몰려들어 보리를 베곤 했지만 려원이가 바라보고 있는 밭에서는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만이 쓸쓸하게 보리를 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바로 려원이네 반인 창수였습니다.

“희경아, 저어기 저 밭에서 보리를 베고 있는 아이 우리반 창수 아니냐?”

“어디? 응, 기라. 창수 맞아.”

“경 헌디 무사 창수네만 우리추룩 수눌음해영 일하지 안해영 지네들만 일햄서?”

“고자 그것도 몰란? 재작년에 경근이 아버지영 현일이 아버지영 주희 오빠가 창수네 배로 먼 바당에 고기 낚으레 갔당 태풍불언 다 죽어블었신예.”

“응, 그건 나도 알아.”

“그 때 창수 아버지가 가기 실픈 사름들한티 막 가겐 해연 데령간 다 죽어블었시난 동네 사름들이 창수네한티 좋아할리가 이시크냐게.”

“그건 창수 아버지 잘못이주 창수 어머니하고 창수 잘못은 아니주게.”

“경 해도 죽은 사름이 다시 살아날리는 어신예. 그 때 사름들이 창수네 집에 몰려강 얼마나 난리 피운 줄 아나.”

“응, 경 해서 창수네한티는 수눌음하는디 안 붙여 주엄구나.”

희경이의 이야기를 듣고 난 려원이는 가슴이 쓰려왔습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말없이 혼자서만 다니는 창수. 그 창수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전에는 모두 다정하게 지내던 동네 사람들이 창수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해서 창수네 가족들을 모두 따돌려 버린다는 것은 그래도 너무한 것 같았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려원이는 동네 어른들이 점심을 다 먹고 나무 그늘에 앉아 한가롭게 쉬고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 옆에서 근봉이와 종은이가 보리짚으로 피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근봉아, 종은아, 너네 잠깐 저레 와봐. 이야기할 거 이서.”

근봉이와 종은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려원이를 따라 갔습니다. 어른들은 더욱 궁금한 얼굴이 되어 아이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먼저 있던 곳까지 온 려원이는 창수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습니다.

“너네 창수네가 무사 수눌음 안해영 자기네만 일햄신지 알메?”

“응, 알아.”

“너네는 어떵 생각해여?”

“뭐 말이라?”

근봉이와 종은이는 려원이의 말에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저추룩 하는 집이 이서도 되크냐?”

“어떵 할 말이냐. 마을 사름들이 저 집만 미워하멍 수눌음하는디 안 붙여주는디.”

“어른들은 경 해도 우리들까지 경 행사 되나? 우리사 창수네영 원수진 일도 어신예.”

“려원이 말이 맞아. 어른들은 창수네를 내몰려도 우리들끼리만이라도 수눌음하게.”

려원이의 말에 희경이가 맞장구를 치면서 거들었습니다.

그러나 근봉이와 종은이는 망설이는 눈치였습니다.

려원이는 종은이가 들고 있는 낫을 빼앗아 들었습니다.

“희경이영 나영 만이라도 창수네 보리 베어 주레 가키여. 희경아, 가게.”

“응.”

희경이도 근봉이의 낫을 빼앗아 들고 려원이를 따라 나섰습니다.

근봉이와 종은이는 창수네 밭으로 가는 려원이와 희경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둘이서 똑같이 손뼉을 마주치며 외쳤습니다.

“좋다. 우리는 어린이 수눌음패다.”

“어려운 친구네 집의 일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둘이는 어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아버지의 낫을 가지고 창수네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려원이와 희경이는 벌써 서투른 낫질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려원아, 희경아. 우리도 같이 보리 베키여.”

“기여 저 오라.”

생각치도 못했던 네 아이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창수와 창수 어머니는 보리베던 손을 멈추고 어리둥절하여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던 창수 어머니의 눈에서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이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동네 어른들이 창수네 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창수 어머니보다 더 굵은 눈물을 가슴속으로 흘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창수 아버지와 같이 바다에 나갔다가 아들이 죽어버렸던 주희 아버지였습니다. 재작년 그 사건이 있었을 때, ‘우리 아들 살려내어. 우리 금상 아들 살려내란 말이여.’ 하며 창수 어머니에게 제일 크게 난리를 피웠던 주희 아버지의 가슴속에서는 태풍 부는 바다보다 더 큰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주희 아버지가 말없이 낫을 들고 창수네 밭으로 갔습니다.

“저, 저, 주희 아방이 무신 난리를 또 피우젠 낫을 들고 저레 감신고?”

동네 사람들이 당황하며 걱정을 하는 가운데 창수네 밭에 다다른 주희 아버지는 보리 베는 아이들 틈에 끼어 썩썩 보리를 베었습니다. 그리고 창수 어머니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눈물을 섞으며 말을 하였습니다.

“창수 어멍, 지난 일은 내가 미안했수다. 사름 목숨은 하늘에 달려이성 맹이 다 되난 우리 아들이 죽은 것을, 창수 아방 때문이렌 해영 그 난리를 피우멍 저들른 거 용서해 줍서.”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던 말을 쏟아 놓는 주희 아버지의 목소리는 말이 아니라 바로 울음이었습니다.

“으흑, 으허엉.”

창수 어머니의 입에서도 대답 대신에 커다란 울음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졌습니다.

이 모습들을 바라보던 근봉이 아버지가 창수네 밭으로 향했습니다. 모두들 근봉이 아버지를 뒤따라갔습니다.

두 모자만이 외롭게 일하던 창수네 밭에서는 때아닌 보리 베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보리를 베는 사람들의 눈에는 모두가 그득그득 눈물이 담겨 있었지만, 또 그 눈들은 모두 웃고 있었습니다.

“경 허난 애기업개한티도 배울 것이 이신덴 했주.”

“저 아이들 아니어시민 우리 마을 인심이 점점 사나와질 뻔 해신게.”

어른들이 네 아이를 보면서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습니다.

다들 열심히 보리를 베고 있는데 창수 어머니와 창수는 보리를 베지도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저 보리 베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종은이 어머니의 입에서 다시 구성진 풍년가 가락이 흘러 나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