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벌립을 쓴 쇠테우리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학교에서 돌아오는 석이는 괜히 신이 났습니다. 바로 내일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을 소풍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 년에 두 번 밖에 없는 소풍날. 더구나 내일은 국민학교(90년대 초까지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음)에서의 마지막 소풍날이기 때문에 석이는 은근히 기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며칠 전부터 석이의 소풍 점심 걱정을 하시면서도 소풍날은 곤밥(쌀밥)에 달걀부침과 옥돔을 구워 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 밖에는 먹지 못하는 곤밥과 옥돔을 이번에는 마지막 소풍이기 때문에 특별히 도시락으로 싸 주시겠다고 하자 석이는 며칠 전부터 소풍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올레(집 바깥 큰길에서 마당에 이르는 골목 같은 길)를 들어서자 아버지가 마당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석이는 신이 나서 외쳤습니다.
"아버지, 우리 내일 소풍이우다."
"기냐?"
아버지는 석이를 힐끗 쳐다보고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부지런히 손을 놀렸습니다.
심드렁한 아버지의 대답에 신이 났던 석이는 조금 김이 빠졌습니다.
석이는 가방을 방에다 던져두고 아버지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그 앞에 앉았습니다. 옆에는 잎을 뜯어낸 칡넝쿨과 비슷한 줄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아버지는 그것들을 이리 저리 엮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쪽에는 다 완성이 된 듯한 물건이 있었는데, 생김새가 모자하고 비슷했습니다.
"아버지, 이 칡으로 무시거 만드는 거우꽈?"
"이건 칡이 아니여. 정당이엔 하는 거여." (정당☞'댕댕이덩굴'의 제주도 사투리)
"기꽈? 경 헌디 이 정당으로 만든 모자 닮은 건 무신거우꽈?"
"벌립이여. 우리 제주도 말로 패랭이를 벌립이엔 한다. 정당으로 만든 벌립이난 정당벌립이엔 하주. 자, 느 나시 벌립 다 만들어시난 한 번 써 보라."
아버지는 벌립을 석이의 머리에 씌워 주었습니다. 미리 재어보고 만들기라도 한 듯 벌립은 석이의 머리에 꼭 맞았습니다.
"석아."
벌립을 쓴 석이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불렀습니다.
"예."
"내일 느네 소풍날인 거 알암저마는, 소풍 가지 말앙 아버지영 어디 가사 되키여."
갑작스런 아버지의 말씀에 석이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어디 말이우꽈?"
"한라산에 강 쇠 내령 와사 하키여."
"무사 꼭 내일 쇠 내령 와사 되여 마씀?"
"기여. 내일부터는 다른 농시도 해사 되곡 하난 내일 안 가민 안 된다. 쇠를 내령 와사 밭도 갈곡 하주."
"아버지이……, 내일 우리 마지막 소풍 아니우꽈."
석이의 얼굴이 점점 죽을상이 되어 갔습니다.
"소풍은 중학교 때도 갈 수 있는 거여. 중학교 안 갈타?"
"무사, 가사 됩주 마씀."
"그 쇠를 내령 와사 팔앙 중학교 갈 때 등록금 낼 거여. 중학교 가고 싶거들랑 내일 나영 걸라."
"경 해도……."
"경 해도고 무신거고 내일 소풍 갈 생각이랑 당최 하지 말라."
석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아버지의 고집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쇠고집이기 때문에 한 번 내뱉은 말은 취소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물질을 마치고 테왁을 메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석이는 눈으로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석이의 울상 짓는 표정과 정당 벌립을 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뒤꼍으로 가버렸습니다.
석이는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거렸습니다. 소풍 가서 오락 시간에 할 것들을 친구들과 미리 다 연습했는데 그만 모두 다 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잇, 내일 비나 좍좍 쏟아져 버렸으면……."
그러나 겨우 잠이 들었다가 아버지가 깨우는 바람에 해도 뜨지 않는 새벽에 눈을 떴을 때는 비는커녕 샛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습니다.
갈옷을 입고 벌립을 쓰고 도시락 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아버지와 석이는 집을 나섰습니다. (갈옷☞무명에 감물을 들여 만든 옷)
'내일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소풍도 가지 않고 쇠 내리러 간 날 보고 쇠테우리라고 놀리겠구나.' (쇠테우리☞'소를 치는 목동'의 제주도 사투리)
물오름 근처까지 갔을 때에야 해가 둥실 떠올라 사방을 훤히 비춰 주었습니다.
말도 없이 푹푹 가슴속에서만 불만을 터뜨리던 석이는 시원한 공기와 상쾌한 아침 햇빛을 받고 빛나는 산과 들을 바라보자 가슴 문이 열리며 어느덧 불만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험한 산길을 걷고 걸으며 숨이 가빠지고, 따가운 가을 해가 높이 떠오르며 몸을 데우기 시작하자 열렸던 가슴 문이 다시 닫히고 있었습니다.
'지금쯤 아이들은 소풍 장소로 출발하고 있을 거야.'
'지금쯤 아이들은 소풍 장소에 도착했을 거야.'
'지금쯤 전체 오락을 하고 있겠지. 에이 그놈들만 신나겠구나.'
아버지는 석이의 불만을 알고 있음직한데도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습니다.
"아버지, 우리 쇠 올린 디 아직도 멀었수꽈?"
"거의 다 와감저."
"경헌디 이 넓은 한라산에서 사름들은 자기네 쇠가 있는 디를 어떵 알아마씀? 쇠를 산에 올령 놔두민 고만히 그 자리에 이서 마씀?"
"기여, 쇠들은 처음 올령 놔둔 곳에서 멀리 안 강 그 근방에만 이신다. 경허고 낙인이 다 찍혀 이시난 아무리 멀리 가도 다른 사름들이 그 낙인 봥 쇠 찾아가랜 연락 해준다."
"경 허는 건 참 좋은게 마씀. 경헌디 우리 쇠가 우리 몰라보고 도망가 버리민 어떵 헐거우꽈?"
"경허난 이 정당 벌립을 썽 오는 거주. 정당으로 만든 벌립은 가시덤불이나 존존한 낭가쟁이 사이로 뛰엉가도 미끄러우난 그것에 걸리지 안 해영 얼굴이 다치지 않게 해 주는 거주."
석이는 벌립을 만져 보며 아버지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여. 정당벌립은 뜨거운 햇볕도 가려주엉 시원하게 해 주곡, 먼지나 바람도 막아 준다."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덧 한라산 중턱의 넓은 풀밭에 다다랐습니다.
풀밭에서는 여러 마리의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어떤 소는 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데도 석이네 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석이는 풀밭 근처의 숲을 찾아보았습니다. 중학교 등록금이 될 소이기 때문에 늘 아끼며 돌보던 터라 금방 한 눈에 알 수 있을 터인데도 아무데서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석이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소를 찾지 못하면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몰랐습니다.
"다른 사름들이 우리 쇠를 잡아 가버린 거 아니우꽈?"
"아니여. 인심 좋은 우리 제주 사름들이 경 헐 리가 어신다. 더 멀리 저 쪽으로 강 찾아보게. 저 쪽에 다른 마을에서 쇠 올린 디가 이시난 거기 강 숫쇠들이영 놀암신지도 모르키여."
석이와 아버지는 다시 부지런히 숲을 걸었습니다. 나뭇가지들과 가시덤불이 앞을 가로막곤 했지만, 아버지가 앞에서 걸으며 가시덤불을 헤쳐 주기도 하고 나뭇가지들이 벌립에 미끄러지기도 하여 석이는 편히 갈 수 있었습니다.
한 시간쯤 숲을 헤치고 골짜기를 건너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풀밭에 다다랐습니다. 거기에도 여러 마리의 소들이 있기는 했지만 석이네 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음머, 음머.
두리번거리며 소를 찾던 석이의 귀에 풀밭 너머 숲 속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 저 쪽에서 쇠 울음소리 남수다. 가 보게 마씀."
"기여, 우리 쇠 울음소리 닮다."
풀밭을 너머 숲 속으로 갔더니 거기에 석이네 누렁이가 털이 붉은 황소와 같이 비스듬히 드러누워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거 우리 쇠 맞수다."
"기여, 이젠 찾았구나."
그러나 석이네와 누렁이 사이에는 가시덤불이 잔뜩 있어서 쉽게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작대기로 가시덤불을 후려쳐서 갈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가시덤불을 후려치는 소리를 들은 황소가 일어나 부르륵거리더니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석이네 누렁이도 덩달아 황소를 따라 달아났습니다.
"누렁아, 나다, 나. 느네 주인 석이란 말이다."
석이가 부르는 소리에도 누렁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달아나기만 했습니다. 누렁이와 황소는 가시덤불이 많은 더 깊은 숲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석아, 늘랑 저쪽으로 강 풀밭더레 쇠를 몰라. 아버진 이쪽으로 강 몰아가키여. 벌립을 돈돈히 졸라매라. 경 해사 낭가쟁이에 걸려도 얼굴이 안 다친다."
"예, 알았수다."
석이는 벌립을 꾸욱 눌러 쓰고 끈으로 단단히 졸라매었습니다. 그리고는 누렁이가 달아나는 앞길을 막기 위해 빙 돌아 달렸습니다.
나무의 잔가지들이 길을 막으며 후려치곤 했지만 정당벌립과 갈옷이 후려치는 가지들을 막아주어 몸에 생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석이는 정당벌립과 갈옷 덕분에 나뭇가지들이 후려쳐 오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나무 사이를 힘껏 달렸습니다.
음머, 음머.
누렁이와 황소가 저만치서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석이는 비잉 돌아서 소들이 달아나는 앞길을 막았습니다.
"황, 황. 누렁아, 달아나지 말앙 저 쪽으로 가라."
누렁이와 황소는 앞길이 석이에게 막히자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달렸습니다.
"아버지, 쇠가 그쪽으로 감수다."
석이의 외침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여, 풀밭더레만 천천히 몰아가라."
"예."
석이는 천천히 소를 몰았습니다. 소들은 석이가 모는 대로 풀밭 쪽으로 천천히 뛰어갔습니다. 소들은 풀밭에 다다르자 다른 소들과 섞여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아버지, 쇠가 풀밭더레 강 다른 쇠들이영 섞였수다."
"잘 했저. 우리 석이 혼자서 쇠를 몰아왔구나. 이제 고만 놔두었당 진정되민 고삐에 매영 가민 된다. 자, 이제 점심이나 먹으멍 기다리게."
아버지가 숲 속에서 나오며 석이를 칭찬했습니다.
석이와 아버지는 벌립을 벗어 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었습니다.
소풍 갈 때에 싸 주겠다고 하던 곤밥과 달걀부침, 그리고 옥돔구이가 어머니의 정성으로 먹음직스러웠습니다.
먹는 것까지도 늘 조냥하는 아버지였지만 이번에는 점심 도시락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풍을 가지 못해서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맛있는 점심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소를 몰아왔다는 뿌듯함이 서운한 마음을 많이 가라앉혀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석이의 얼굴을 살펴보았습니다.
"거 보라. 정당벌립을 쓴 덕분에 얼굴에 생채기 난 곳이 어신예. 게나 제나 혼자서 도망가는 쇠를 몰아온 걸 보난 우리 석이도 이제 쇠테우리가 다 됐저."
아버지의 말씀에 석이는 쑥스러워서 누렁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누렁이도 이제는 진정이 되었는지 다른 소들과 어울려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누렁이의 배가 유난히 불룩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 우리 누렁이 새끼 밴 거 아니우꽈? 배가 불룩한 게 마씀."
"경 고란 보난 새끼 밴 것 같다. 이제 우리 석이 중학교 들어갈 등록금 걱정은 원 안 해도 되키여. 누렁이를 안 팔고 새끼 낭 팔아도 등록금은 충분하당도 버치키여."
아버지의 말씀에 석이는 벌써 중학생이 된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빙그레 웃음 지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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