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코스는 어느 한 날에 한꺼번에 걷지 않고 중간 중간 나누어서 여러 번에 걸쳐서 걸었었다. 지금은 서귀포 서부지역의 산방산이 있는 마을의 학교에 근무하고 있지만 작년과 재작년에는 표선면에 있는 가마초등학교에 근무하였기 때문에 학교의 행사로 아이들과 함께, 또는 선생님들과 함께 학교 근처의 올레길을 걸은 적도 있고, 어느 토요일은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부분 부분을 걷다가 돌아오기도 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걸었던 것을 모아서 4코스 출발지부터 종착지까지 걸었던 길을 차례대로 써 보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부분에서는 여름의 이야기가, 어느 부분에서는 겨울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또 먼저 걸었던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중에 하고, 나중에 걸었던 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기도 할 것이다.
4코스 시점인 당케포구를 출발해서 걷기 시작한 것은 겨울이 한창인 어느 날이었다. 겨울 방학 중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표선 해비치해변으로 가서 지난 번 3코스 종주를 마쳤던 곳, 3코스의 종점과 4코스의 시점인 해비치해변의 샤워장 앞으로 가서 걷기 시작하였다.
바람이 세지는 않았지만 겨울바람이 귀를 엘 듯이 몹시 차가웠다.
파란 바다 위에 고깃배들이 매어 있는 당케포구를 끼고 작지왓(“자갈이 많은 지역”을 뜻하는 제주말)으로 들어가서 걸었다. 작지왓을 걸어가는 도중에 바닷가에 만들어진 당포연대를 지나게 되었다. 연대는 옛날 바다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략을 감시하고 연락하기 위해 바닷가에 세워졌던 것으로, 연대에서 불이나 연기를 피워 오름 위에 설치되었던 봉수대로 연락하면 곳곳의 봉수대로 빠르게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연대는 많이 허물어져 있었지만 허물어진 그대로 놔둔 것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고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다른 곳에서 보았던 연대들은 복원을 해서 너무 반듯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옛 모습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조금 더 걸어가자 바닷가에서 열 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뭔가 설명을 듣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들이 먼저 인사를 하였다. 그래서 나도 인사를 받으며 보니 [Daum]이라 쓰여 있는 팻말이 보이는 것이었다. 반가웠다. 왜냐하면 나의 큰아들이 Daum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번에 Daum 직원으로 뽑혀서 사전 연수를 받고 있는 중에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아들이 지금 Daum 미디어팀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들도 반가워하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서서 사진 모델이 되어주고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 표선 바닷가에는 갈매기와 왜가리 등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물 위에 떠있거나 이러 저리 먹이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니 표선리 해녀의 집이 있고, 그 어름의 길가에 시비(詩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보았더니 내가 알고 지내는 표선 출신 송상 시인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제목은 <기억 너머의 귀영구석>
그 시의 전부를 여기 옮겨 적어 본다.
곧은길은 귀영구석 길이 아니다.
갯바위로 에두른 올레길을 밟으면서
우리들 삶이 닮아온 것이다.
낯선 사람들이 굽어 간 길목마다
바람은 누이 손톱 같은 갯빌레꽃을
환장하게 피워내는데
우리들의 얼굴을 닮았던 길은
기억의 방에서 하얗게 비워지고 있다.
누가 귀영구석 길을 허물어 왔을까
뭍이 그리운 밀물도 발길을 돌리고 있다.
돌담으로 검게 그은 신작로 길섶에
면직원이 뿌려 놓은 유채꽃들이
당포를 향해 목을 빼들고
화르르 화르르
우울증을 털어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마도 이 근처 바닷가의 지명을 <귀영구석>이라고 하는가 보다.
거기서 한참을 더 걸었다. 지금 걷고 있는 길들은 근무지가 이 근처여서 차로는 자주 다니던 길이어서 아주 익숙하고 눈이 익은 길이다. 그래도 다닐 때마다 시원스런 느낌이 들고 가슴으로 들어오는 바다의 풍광이 늘 새롭곤 했었는데, 이렇게 올레길을 따라 걸으니 더욱 새로운 느낌이 든다.
당케 포구와 가마리 포구 사이의 중간 쯤의 바닷가에 특이한 지형이 있다. 학문적으로 이런 지형을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곳의 바닷가에서는 별로 볼 수 없는 지형이다. 뭍과 바다 사이를 검은 현무암 바위들이 쌓여 바다를 막아 작은 호수를 만들어 놓은 듯 한데, 밀물과 썰물의 드나듦에 따라 바닷물이 그 안으로도 들어왔다가 나가기도 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민물이 유입되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는 하얀 모래밭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였다. 거기에도 먹이를 찾아온 철새들이 많이 모여 물 위에 떠 있었다.
가마리 쪽으로 더 가니 가마리 포구 가까이의 바닷가에 황근 자생지가 있었다. 황근은 멸종위기 2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콩과의 목본류 식물로 일명 노랑무궁화라고도 하며 특이하게 바닷가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이다. 그런 황근이 자생하는 곳이 제주섬에 몇 군데 있는데, 이곳도 자생지 중의 한 군데이다.
겨울이어서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만 있는 황근들이 검은 바위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황근 자생지 근처에는 하얀 등대가 우뚝 세워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봄이 되면 황근들은 연둣빛 새 잎을 돋우고, 여름이 되면 노란 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면 잎들은 단풍잎보다 더 고운 노랑, 빨강 빛으로 물들어 갈 것이다.
<이 황근 사진은 이날 찍은 사진이 아닌 전에 다른 곳에서 찍어두었던 것임>
가마리 포구를 지나 가마천 하류의 배고픈다리를 건너 가마리 마을로 들어섰다. 포구를 바라보며 바닷가를 따라 올레꾼들이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데크 위를 따라 걸었다. 여기는 우리 학교 아이들이 사는 곳. 그러나 걸어가고 있는 내내 아이들은 커녕 마을 어른들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어서 밖에 나다니기 춥기도 했으려니와 방학인데도 아이들은 학원에 가고, 어른들은 밭으로, 직장으로 일하러 갔을 것이다.
여기에 오니 바다가 조금 잔잔해진 듯했다. 그리고 방파제 안의 바다는 파란 색을 더욱 파랗게 만들어 잔잔한 호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5월 스승의 날 행사로 우리 학교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학교 앞에서부터 토산포구까지의 올레길 걷기를 하기로 했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이어서 그런지 하늘은 푸르렀고, 바람도 잔잔하게 기분이 좋을 만큼 불었다. 걸어가는 길에는 봄꽃들이 피어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도 바다는 조금 거칠어 하얀 파도를 만들며 뭍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 토산포구 사진은 이날 찍은 사진이 아닌 예전에 찍어두었던 것임>
다음부터의 이야기는 다시 겨울로 돌아와서 토산포구에서부터 태흥포구 근처까지 걸은 이야기를 쓴다.
겨울이 한창인 방학 중의 어느 날, 토산포구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거기서부터 걷기 시작하였다.
토산포구를 지나서 일주도로를 건너 토산 마을 동쪽편 농로를 따라 토산봉 쪽으로 올레길이 이어졌다. 일주도로 쪽이나 마을 근처에는 눈이 없었는데, 토산봉 쪽에 가까이 가자 길가에는 며칠 전에 왔던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채로 하얗게 남아 있었다.
올레길은 토산봉의 동쪽에서 올라서 서쪽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토산봉으로 올라갔다. 토산봉은 여러 번 올랐던 곳이지만 이날은 올레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생각으로 나선 길이었으므로 그대로 따라 올라갔다.
토산봉을 오르는 등반로는 돌층계로 만들어져 있었고, 돌층계 주위에 명언을 쓴 나무패들이 나무에 붙여져 있어서 올라가는 걸음을 잠시 쉬고 읽어보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해 주고 있었다.
등반로에 군데군데 쌓여있는 눈을 밟으면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토산봉 정상에는 옛 토산봉수의 터가 남아있었다. 가운데에 불을 피웠던 곳이 두두룩한 형태로 되어 있었고, 그 둘레에는 도랑을 팠던 곳이 골이 깊게 남아 있었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니 윗마을인 토산1리에서 아랫마을인 토산2리로 내려가는 길을 만났다. 이어서 곧바로 다시 시멘트 포장이 된 농로를 따라 서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약 400미터 쯤 가니 시멘트길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는 표시가 되어 있고, 거슨새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안내된 대로 따라 들어갔다. 곧바로 나타나는 것은 숲 속에 땅을 파서 만든 우물. 샘물이 솟아나오는 땅 주변을 제주돌들로 쌓아 올렸고, 거기서 흘러내려가는 물이 몇 군데에 고였다가 흘러갈 수 있도록 몇 층으로 연결되어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겨울이어서 물이 많이 흐르지는 않고 흘러서 고여있던 물들도 꽁꽁 얼어 있었다. 다시 여름이 되면 시원한 물이 흐를 것이다.
제주섬의 거의 모든 물들은 한라산 방향에서부터 바다쪽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이 샘물은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거꾸로 한라산 방향을 향해 흐른다고 해서 ‘거슬러 흐르는 샘’이라는 뜻의 제주말 ‘거슨새미’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거슨새미 앞에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이름의 뜻과 이곳에 얽힌 전설이 새겨져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한라산을 향해 물이 거꾸로 흐른다 하여 ‘거슨새미’라고 불리고 있으며, 여기서 조금 남쪽에는 순리대로 바다를 향해 흐르는 ‘노단새미’가 있다. 이 두 곳의 샘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수질이 좋고 양이 많아 토산리 설촌 이래 상수도 시설이 되기 전까지 인근마을(가시, 세화, 신흥 등)의 중요한 생활용수로 사용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약 1천 년 전 중국의 송나라시대 제주도의 지세가 날개 달린 장수와 천하를 통치할 왕후(王侯)가 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중국황실에서는 술사인 호종단을 보내어 제주의 산수맥(山水脈)을 모두 뜰 것을 명하였다. 종달리 포구로 들어온 호종단이 수맥을 뜨면서 토산리에 거의 올 무렵 영천수신(靈泉水神)은 아가씨로 변신하여 너븐밭에서 밭을 가는 농부에게 빨리 행기(놋그릇)에 새미물을 떠서 고부랑낭(구부러진 나무) 아래 숨겨 달라고 했다. 호종단은 지리서에 나와 있는 고부랑낭 아래 행기물이 있는 너븐밭까지 찾아갔으나 거슨새미의 수맥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종달리에서 토산리까지는 샘물이 없었고 이곳은 아직까지 샘물이 솟아난다. 너븐밭 주변에는 행기무덤이 있는데 이는 마을 선조들이 호종단을 물리친 거슨새미의 수신을 기리기 위한 상징물로 전해지고 있다. / 2009. 2. 14. 토산1리마을회]
거슨새미를 지나 남쪽으로 얼마쯤 내려가니 조금 전에 거슨새미 비석에 쓰여있던 대로 노단새미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노단새미’는 제주말로 ‘똑바로 된 샘’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한라산 방향에서부터 바다 쪽 방향인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그 샘물이 솟아나는 곳에 연못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영천사라는 절이 세워져 있었다.
노단새미 앞을 지나 신흥리 쪽으로 내려갔다. 걸어가는 길의 주변은 거의 대부분 귤나무 과수원이었다. 그러나 귤을 모두 따버려서 열매 없는 나무들만이 과수원에 가득 서 있었다.
신흥리 마을로 내려오니 일주도로. 흥산초등학교 서쪽편에서 일주도로를 넘어서 신흥리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 해안도로를 따라 태흥리 포구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의 왼쪽으로 겨울바다를 보며 걸어가는데 매서운 겨울바람이 여민 옷깃 속으로까지 들어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태흥포구 근처에 있는 남원하수처리장 앞까지 왔는데 저녁에 다른 약속 시간이 예정되어 있어서 이날은 여기까지만 걷기로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마침 남원하수처리장에 근무하는 사람 중에 지인이 있어 전화로 불러 따뜻한 차를 달라고 하여 마셨더니 몸이 움츠러들게 하던 추위가 조금 가시는 듯 했다.
토산포구에서 태흥포구까지 걸었던 며칠 뒤, 이번에는 남은 구간을 마저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날은 4코스의 남은 구간을 걷고 내쳐서 5코스까지 완주할 생각이었다.
먼젓번 걸었을 때에는 날이 추웠었는데, 이날은 겨울날씨답지 않게 포근하고 바다도 잔잔하였다.
태흥포구에서 출발하여 걸어가는 길에서 보는 바다가 무척 잔잔하고, 푸른빛이 더욱 푸르러진 것 같았다.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의 모습도 평화로워보였다.
걸어가는 길에 해녀들이 물질하고 나와서 불을 쬐던 불턱도 있었고, 작은 시내도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태흥리 바닷가에는 옛날에 만들어진 벌포연대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벌포연대가 있는 곳에서 조금 더 서쪽의 태흥리 바다는 육지 쪽으로 무지개 모양으로 쑤욱 들어와 어느 곳보다도 더 파란 빛깔의 물빛으로 잔잔하게 수를 놓고 있었다.
거기를 지나 4코스의 종점인 남원포구.
이날의 목적은 5코스를 모두 종주하는 것이어서 남원포구를 지나 계속 걸었지만, 5코스의 이야기는 따로 쓰고, 4코스까지 걸은 이야기는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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