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걷기로 한 곳은 올레길 11코스. 11코스 전체를 걷지는 않고 시점인 모슬포 항구 근처에서 모슬봉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로 하고 차를 몰았다.
11코스가 시작하는 곳은 모슬포 항구 근처의 홍마트 앞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알고 있던 정보로는 11코스가 홍마트 앞을 출발하여 알뜨르 비행장 쪽을 거쳐 모슬포 마을의 동쪽으로 해서 모슬봉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코스가 바뀌었다고 한다. 새로 바뀐 코스는 모슬포 항구를 지나 모슬포 오일시장을 거쳐 바닷가로 해서 동일리 포구 근처러 간 다음에 송악도서관 앞을 지나고 대정여고 서쪽으로 해서 모슬봉을 향해 올라간 다음, 모슬봉 서쪽편의 중턱에서 남쪽편 능선을 따라 다시 동쪽편 중턱으로 간 다음 정상 쪽을 향해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모슬포 항구를 끼고 매일시장 쪽으로 갔다. 우리가 간 날은 장이 서는 날은 아니어서 장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모슬포 장을 벗어나니 서쪽편 바닷가에 ‘산이물’이라는 용천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었다.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산이물통에서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정겨운 시골 모습이었다.
산이물을 등지고 다시 서쪽으로 바닷가를 따라 가노라니 널따란 바다와 바위 위에 멋들어지게 작은 돌들로 장식을 한 것들이 작은 눈요깃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었고, 갈대들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흔들리고 있었다.
동일리 포구를 만난 다음 길은 동일리 마을 안으로 꺾어 들었다가 송악도서관 쪽으로 접어들었다.
송악도서관 울타리 안에는 지석묘(고인돌)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하모리 지석묘는 도지정 기념물 제2-3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것으로써, 탐라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남방식 형식의 고인돌이라고 한다.
송악도서관 앞을 지나 이어지는 올레길. 일주도로를 건너서 대정여고 서쪽편 농로를 타고 모슬봉쪽으로 길이 뻗어 있었다. 겨울인데도 밭에서는 초록색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고 농부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제주도만의 농촌 풍경이다.
모슬봉 중턱까지 간 다음에 올레길은 원래 길이 없는 풀밭과 밭 기슭을 지나 모슬봉의 동쪽을 향해 나가게 되어 있었다. 간세와 화살표, 올레 리본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아갔더니 모슬봉 위로 올라가는 아스팔트 길을 만났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 다시 올라가니 시멘트 길을 따라 다시 동쪽으로 나가게 되어 있었고, 이윽고 간세는 숲속으로 들어가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간세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숲속으로 들어갔다. 모슬봉 중턱에 있는 숲은 제주섬의 여느 다른 숲들과 마찬가지로 나무가 우거지고 겨울인데도 짙은 잎은 달고 싱싱함을 내 뿜고 있는 숲이었다.
약 10여분을 걸어 숲을 빠져나오니 작은 공터가 나오고 정상을 향해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공동묘지였다. 세상을 떠난 자들이 누워있는 곳 사이로 걸어가노라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올라가니 정상. 실제 정상에는 군사보호시설이 있어 철조망이 쳐서 있어서 갈 수 없는 곳이고, 철조망 앞까지 가는 것으로 정상에 도달한 것이다.
이날 걷기로 한 예정은 여기까지였기에 발길을 돌려 모슬봉을 내려와 읍내를 지나 모슬포 항구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 식구가 함께 먹는 점심. 싱싱한 회와 해산물로 차려진 점심이 식구가 함께 먹어서 더욱 맛이 있었다. 작은아이도 이 싱싱한 점심을 함께 먹었으면 더욱 맛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모슬봉까지 갔다가 돌아온 올레길 11코스. 다시 끝까지 가기로 작성하고 나선 것은 다음 토요일인 2월 두 번째 토요일이다.
그날은 아침에 눈이 조금 쌓여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리 많이 온 눈은 아니어서 일주도로로는 차가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 느지막이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모슬봉 아래 대정고등학교 교문 근처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 곧바로 모슬봉으로 올라가는 길로 올라갔다. 거기로 올라가면 지난 주에 갔을 때 들어갔던 숲길로 갈 수 있는 걸 알기 때문에 이날 올레길 걷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하기로 작정하였다.
숲속 길에서는 우거진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었는데, 숲속을 벗어나 모슬봉 정상 가까이에 있는 공동묘지 쪽에 다다르자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옷깃을 여미고, 등산복 점퍼에 달린 모자까지 푹 당겨썼지만 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칼바람이 되어 들어왔다.
정상 쪽에서 바라보이는 바굼지오름이 눈보라 때문에 흐릿하게 보이고, 그 뒤로 산방산이 겨우 바라보일 정도로 희미하게 보였다.
모슬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올레를 알리는 간세에 모슬봉에 대한 안내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모슬봉은 모슬포 평야지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오름이다. 모슬개(모슬포)에 있다고 하여 모슬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슬은 모래를 뜻하는 제주어 모살에서 나온 말. 조선시대의 봉수대가 있다.]
간단하게 안내가 된 이 내용에서 보듯이 모슬봉의 이름의 유래가 나오고,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기 때문에 오름의 이름에 “봉”자가 붙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상으로 올라갔을 때에는 눈보라는 그쳤지만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와서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정상에서 이어지는 길은 오름의 북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눈이 쌓인 길이 약간 미끄럽기도 하였지만 설치된 밧줄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약간의 구부러짐을 있었지만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가는 길로 10분 정도 내려가니 바로 오름 북쪽편 기슭으로 내려서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길은 모슬봉 뒤쪽에서 신평리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은 넓은 아스팔트로 이어지다가 좁은 농로로 들어가라고 간세가 가리키고 있었다. 간세와 리본을 따라 농로로 걸어갔다. 과수원의 방풍림들이 바람을 막아주어 무척 포근한 길이었다. 거기서 바라보이는 모슬봉은 찬바람 속에 흰 눈을 조금씩 두른 채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농로를 따라 다시 나아가는데 갑자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세찬 눈보라가 몰아쳐왔다. 주변에 방풍림도 거의 없고, 낮은 돌담들뿐이어서 눈보라를 피할 곳이 없었다. 그냥 눈보라를 맞으며 두 발 전진하고 한 발 후퇴하는 걸음으로 겨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0여분을 걸었을까! 눈보라가 몰아쳐오는 것을 막아주는 방향으로 꺾여진 돌담과 방풍림을 만나 몸을 가누고 눈을 털어낼 수 있었다. 지독한 눈보라였다.
눈보라가 잦아들기를 잠시 기다리다 계속 걸어가는 길. 얼마 가지 않아 천주교 대정성지로 조성되어 있는 故 정난주 마리아 묘에 이르렀다.
거기로 들어가 조성되어 있는 묘를 살펴보면서 오래 머물렀다.
여기서 잠시……. 정난주 마리아 묘역에 소개된 안내의 글을 여기에 옮겨 본다.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 묘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정 마리아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다. 그녀는 1773년 나주 본관 丁若鉉과 경주 본관 李氏 사이에서 태어나 命連이란 아명을 받았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던 당대 최고의 실학자 若銓, 若鐘, 若鏞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 나라 신앙의 성조인 李壁의 누이였다. 黃嗣永과 혼인한 그녀는 1800년에 옥동자 景漢을 출산하였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약관 16세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신앙함으로써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周文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전교에 전력을 다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黃嗣永 帛書를 썼다. 박해의 실상을 기슬한 이 백서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동년 음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처인 정마리아는 제주도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마리아는 1801년 음 11월 21일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어린 아들과 생이별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추자도에 격리된 아들은 어부 吳氏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으며, 그 후손은 현재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 제주목 관노로 정배된 정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서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음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정마리아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 증거의 연속이었기에 우리는 그녀를 ‘신앙의 증인’으로 추모하면서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묘역을 새로 단장, 성역화하였다. 그녀의 삶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영원하고도 소중한 표양이 될 것이다.
천주교 제주교구]
묘역의 가장자리에 둥근잎호랑가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고, 그 나무들마다 빨간 열매들이 가득 달려 있었다. 열매의 빨간 빛깔이 마치 정마리아의 굳은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
정마리아 묘역에서 한참을 쉬며 추위를 털어내고 다시 길을 떠났다. 모슬포에서 신평리로 가는 길을 따라 가는데 다시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옷깃을 추슬러 올리고 꼭꼭 여미고 하였지만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를 어쩔 수 없었다. 눈보라가 그쳤을 때는 파란 하늘이 보이고 멀리 산방산까지도 깨끗하게 보이다가 눈보라가 몰아치면 앞이 안 보이곤 했다.
신평리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입구에는 열녀 오씨를 기리는 작은 열녀문이 세워져 있었고,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발길을 잠시 멈추고 안내판을 읽어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열녀 오씨문(烈女 吳氏 門)
오씨의 본관은 화순(和順)이요 신평리(新坪里) 사람이다. 성품이 어질고 착하여 어릴적부터 규수의 모범이 있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성림(成林)에게 시잡갔으나 결혼하는 날 신랑이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져 죽었으므로 음식을 전폐하고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하자 시부모가 억지로 만류하여 이르기를, 「남편에게는 열녀가 되지마는 부모에게는 효도가 안 되므로 시아비의 시키는 말을 어기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고 타이르자 드디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반드시 새 옷을 갈아 올려 정성을 다하였을 뿐 아니라 자주 남편 산소에 가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으며,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여 효도를 다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 효성과 정절을 둘 다 실천한 것을 칭찬하였다. 유림(儒林)의 추천과 목사(牧使) 찰리사(察里使)의 완문(完文)과 태극교(太極敎)의 삼강풍화록(三綱風化錄)의 기록을 근거로 1900년(고종 7년)에 특별히 조정에서 하사미(下賜未)를 내리는 은총까지 입었으나 아직 정표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손 된 자의 도리로써 그 효행을 후세에 남기고져 1941년 4월 10일 이 문(門)을 건립하였음. 오늘날도 그 효행을 밝히고 있으니 후세인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열녀문을 지나고 신평리 마을 가운데를 지나 마을이 끝나가는 곳에서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길 안내에는 곶자왈로 가는 길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작은 농로를 얼마 쯤 가서 곶자왈로 들어섰다.
무릉 신평 곶자왈.
곶자왈에 들어서서 다시 출구로 나올 때까지 거의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었던 것 같다. 곶자왈 안에는 내린 눈이 얇게 쌓여 녹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찬바람을 막아주어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산을 좋아하고 숲을 좋아하는 내게는 이런 숲이 마냥 포근하게 느껴지곤 한다.
길게 이어지는 곶자왈 길. 숲이 계속되다가 숲 가운데 공터가 나타나기도 하고, 큰 나무들이 큰 가지를 뻗치고 있는 곳을 지나기도 하고, 빌레들이 깔려 있는 곳을 지나기도 하는 등 곶자왈 길은 여러 가지 모양을 보여주었다. 중간 중간 여러 지명들이 안내되어 있었다. 지졍들이 제주말로 되어 있어서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정개왓, 더러시남빌레, 성제숯굿, 웃빌레질…….
오랜 시간을 곶자왈 숲길을 걸은 끝에 출구로 나왔다. 출구 쪽은 모슬포와 저지리와 고산과 무릉2리로 갈라지는 큰 갈림길인 사거리.
사거리에서 무릉2리 방향으로 큰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11코스 종점인 무릉2리 생태체험골에 도착했다. 도착할 무렵에는 바람도 잦아들고 눈보라도 내리지 않아 고요했다.
도착한 곳에서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추위 속을 오래 걸은 후에 먹는 따뜻한 점심 맛은 그렇게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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