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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길

섬 풍경과 가슴 아픈 역사유적을 품고 있는 제주올레 10코스 걷기

  제주올레 10코스는 안덕면 화순리의 화순항 근처 금모래해변에서부터 대정읍 모슬포항구 근처의 대정중학교 남쪽 하모체육공원까지 약 14.8km를 걷는 코스이다.

  근무하는 학교가 10코스가 지나가는 곳 근처에 있어서 토요일 퇴근 후에 시간이 날 때마다 세 번에 나누어서 걸었다.

  처음에는 2011년 가을의 중간인 10월의 어느 날, 10코스 시점인 화순 금모래해변에서 사계포구까지.

  두 번째는 새해 들어 2012년 1월 중순, 사계포구에서 섯알오름까지.

  세 번째는 2012년 1월 말 설날연휴, 섯알오름에서 종점인 모슬포항구 근처까지.

 

 

 

 

 

  10월은 해수욕장에게는 쓸쓸한 계절이다. 내가 10코스를 걷기 위해 화순 금모래해변으로 갔을 때 해수욕장인 금모래해변은 찾는 사람이 없는 쓸쓸한 해변이었다.

  그러나 쓸쓸하다고 생각했던 해변에서 올레길을 걷기 시작하였을 때 해변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여름 내 북적이던 해수욕객들만이 없을 뿐이지 금모래해변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늦가을의 햇살이 모래밭을 비치고 있었고,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가 잔잔한 물결을 모래밭으로 조용히 밀어올리고 있었다. 또 동네 노인들이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 쉼터에 앉아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왜가리와 해오라기도 바닷가 갈대밭을 찾아와 늦가을 바다의 쓸쓸함을 달래주고 있었다. 

 

 

 

  걸어가는 앞쪽 담수욕장 너머에 작은 오름 썩은다리가 있었다.

  “썩은다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 블로그 오름을 찾아서 편에 썩은다리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써 놓았다.

  올레길은 썩은다리 아래 바닷가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나는 일부러 올레길이 아닌 오름 위로 오르는 등반로를 택하여 썩은다리 위로 올라갔다.

썩은다리 위에 올라서자 화순 마을 아랫동네와 화순항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화순항 너머로는 남제주화력발전소와 올레길 9코스가 이어지는 절벽 풍광이 보였다.

 

 

 

  썩은다리를 내려와 오름 서쪽의 모래밭으로 이어지는 올레길로 다시 들어서서 걸었다.

서쪽 모래밭에서 바라보이는 썩은다리의 모습도 경치가 좋아 볼만했다.

 

 

 

  그런데 지난 여름 태풍 때에 난파된 모래운반용(?) 폐선 하나가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풍경 속에 꼴불견스러워 보였다.

 

 

 

  폐선이 버려진 모래밭을 지나 바닷가 언덕으로 올라갔다.

  작은 언덕을 지나는 길에는 언덕 아래 만들어진 작은 주상절리 절벽의 풍광과 그 너머 길을 걸을 때마다 점점 가까워지는 산방산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절벽 아래 바닷물 빛이 주상절리 절벽의 무늬와 어우러져 더욱 파랗게 보였다.

 

 

 

  언덕을 지나 순비기와 띠풀들이 자라고 있는 길을 지나 다시 나타나는 모래밭길. 바라보이는 모래밭길이 경치는 좋은데 넓고 길어서 걷기가 불편할 것 같아 코스를 벗어나 모래밭 북쪽의 도로 쪽으로 나가 도로를 따라 모래밭의 반대쪽 편으로 나갔다.

 

 

 

  거기서 올레길을 걷고 있는 아가씨 두 명을 만나 잠시 동행이 되었다. 산방산 남쪽 용머리로 향하는 기정길에서부터 함께 걸으며 산방산과 용머리의 지형과 전설들도 이야기 해 주고, 길에서 보이는 꽃들도 가르쳐 주곤 하였다.

  용머리 위쪽 하멜표류 기념비에서부터 다시 용머리 매표소 쪽으로 내려간 다음 용머리를 한 바퀴 돌고 가자고 권유하여 용머리의 절벽 아래 바닷길을 따라 걸으며 용머리 절벽의 멋진 경치를 맘껏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높아지는 해수면 때문에 점점 잠겨가는 이 바닷길의 상태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용머리를 지나 설름바당길을 따라 걸었다. 설름바당길을 따라 자라고 있던 소나무들이 지난 여름 태풍 때 해수 피해를 받아 잎이 누렇게 변해서 죽어가는 나무들이 많이 보여 안타까웠다.

  사계포구에 도착하여 서울 아가씨들은 계속 걷는다며 사계 해안도로를 따라 길을 가고, 난 집으로 갈 시간이 되어 학교로 간 다음 학교에 세워두었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사계포구에서부터 다시 이어서 걸은 것은 1월 중순의 어느 토요일.

  사계포구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해안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갔다.

  사계해안도를 따라 걸으면 뒤로는 산방산이 우람함이 든든하고, 앞에는 야트막한 절울이(송악산)가 걸어오는 올레꾼들을 반겨주었다. 남쪽에는 형제섬이 넓은 바다에 다정한 모습으로 앉아 올레꾼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사계포구와 절울이의 중간 쯤에 <사람 발자국 화석지>가 있었다. 바닷가 평평한 바위에 남아 있는 사람 발자국과 동물 발자국 화석들이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여 관리사무소까지 만들어 보호하고 있었다.

 

 

 

 

 

  산이수동에 가까이 갔을 때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상모리패총 안내판」이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곳 상모리 산이수동 마을 해안에 길게 형성되어 있는 상모리 패총 유적은 1988년에 발굴되었습니다. 이 유적은 생활 주거지인 남쪽의 평탄한 유물 산포지와 퇴적층 구역, 그리고 패총 구역인 사구층 지역과 그 주변으로 나누어지며, 출토된 토기는 공렬토기로 도내의 민무늬토기를 대표합니다. 본 유적을 무단 점유하거나, 불법 훼손할 때에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처벌받게 됨을 알려 드리오니, 다 함께 유적 보전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서귀포시장」

  안내문 뒤 둔덕으로 올라가 살펴보았다. 여러 가지 조개 껍데기와 고동 껍데기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아마도 둔덕을 파헤치면 이런 것들이 더 많이 나올 것이다. 제주섬의 바닷가에는 여기저기 이런 유적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개발이 되면서 사라져버린 유적들이 상당할 것이다. 그나마 여기는 안내판을 붙여서 붙여놓은 것으로 보아 보존하려고 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절울이 동쪽의 산이수동 포구는 마라도로 가는 유람선이 출발하는 곳이어서 늘 관광객이 붐비고 있는 곳이다. 이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차장에는 관광객을 싣고 온 버스들과 렌트 승용차들이 빽빽하고, 관광객들이 거기서 보이는 멋진 경치에 감탄하며 이리 저러 눈을 돌리고 사진을 찍어대기에 바쁜 모습들이었다.

 

  절울이를 향해 올라갔다.

  절울이 절벽 위의 기정길을 걸어 올라가는 한 발 한 발마다 멋진 풍광들이 걷는 발길을 따라 좇아왔다. 파란 바다 위에 형제섬이 앉아있고, 그 너머에는 산방산과 바굼지오름, 그리고 더 멀리로 흰 눈을 인 한라산이 솟아 있는 멋진 풍광이 자주 보는 경치인데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중간에 일본군 진지동굴이 있어서 일제 강점기 때의 아픈 상처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 가슴 아팠다.

 

 

 

 

 

  올레길은 절울이 정상으로 올라가서 내려가는 길이 있고, 남쪽 절벽 위 전망대를 끼고 기정을 따라 가는 길로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는데, 정상 쪽으로는 여러 번 가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전망대 방향으로 향했다.

  전망대에서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가까이 보였다. 가파도는 내가 2년 간 근무했던 곳이라서 볼 때마다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섬이다.

 

 

 

  남쪽 기정을 따라 목재로 새로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머물러 주변의 모든 경치를 눈에 가득 넣어 가고 싶은 길이었다.

 

 

 

 

  기정길을 지나 절울이 서쪽 숲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서 해안도로를 횡단하여 셋알오름길로 들어섰다.

  이 오름은 절울이 북쪽에 해안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오름으로, 동쪽의 오름을 ‘동알오름’, 서쪽의 오름을 ‘섯알오름’이라 하는데, 동알오름 중에 서쪽의 낮은 봉우리를 따로 구별하여 제주말로 ‘둘째’라는 뜻의 ‘셋’자를 붙여 ‘셋알오름’이라 부르기도 한다.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셋알오름 언덕을 올라 셋알오름 정상으로 향했다. 셋알오름 정상에는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군 고사포 진지 유적이 2기가 남아 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안내되어 있었다.

 

  「이 시설물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 시설이다. 1945년 무렵에 원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구축된 고사포 진지로, 5기의 고사포 진지 중 4기는 완공되고, 나머지 1기는 미완공된 상태이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군 군사 시설의 하나로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셋알오름 정상의 고사포 진지 유적을 지나 섯알오름과 알뜨르 비행장이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

 

  셋알오름에서 내려가 다시 작은 오름을 오르는데, 그 오름이 섯알오름이다. 섯알오름에는 갈 때마다 숙연해진다. 바로 제주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4.3사건 때의 민간인 학살터 유적이기 때문이다. 섯알오름 아래 작은 굼부리 웅덩이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해 버려져 있었는데, 나중에 발굴하여 지금은 그 자리를 보존하고 추모비를 세워 아픈 상처를 추모하여 달래고 있다.

 

 

 

 

  당시의 사건 기록을 비를 세워 기록해 놓았는데, 펜으로 일일이 기록할 시간이 없어 사진을 찍어 두었다가 여기 옮겨 적어 본다.

 

  「내역비(內譯碑)

이곳은 제주 4.3사건 비극이 진정된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에서 일제 식민지 치하 우리민족을 압살하던 예비검속법(1945년 10월 9일 미군정청에 의하여 폐지됨)을 악용, 당시 오후 2시 요시찰인 및 형무소 경비강화,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 6월 30일 구금자 처형 등의 내용을 전문으로 각 경찰국에 지시함에 따라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344명을 예비검속하여 관리해오다 7월 16일 63명이 군에 인계된 후 20명은 섯알오름에서 1차 학살되었으며, 2차로 8월 20일 새벽 2시에 한림 수용자 60명을, 새벽 5시에 모슬포 수용자 130여명 등 210여명을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하여 암매장한 비극의 현장이다.

비극의 전말(顚末)

1. 예비검속과 집단수용

모슬포 경찰서(당시 三區署) 관내 각 지서에서는 6월과 7월 무고한 농민, 공무원, 마을유지, 부녀자, 학생 344명을 구인하여 모슬포와 한림에 분산 수용, 경찰의 감호를 받으며 가족과의 면회를 실시하는 허용적 분위기를 조성시키면서 자의적 판단에 따라 A, B, C, D로 분류, 지병자의 병보석을 시행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으로 사료됨.

2. 수용자의 집단학살과 암매장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대전을 거쳐 대구, 부산으로 퇴각하는 와중에 모슬포 주둔 정부군은 201여명을 집단 학살 암매장한 후 반인륜적 만행을 은폐하고 시신 수습을 차단키 위하여 이 일대의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고 군,경에 의한 경비를 강화하였음.

3. 시신 및 유골 발굴과 안장

제1차 : 학살 사실을 처음 인지한 당시 대정읍 상모리 거주 이경익(李慶益)씨와 정공삼(鄭公三)씨 등에 의하여 비보를 접한 유족 300여명이 학살 현장에 모여 27구의 시신을 옮기는 도중 경찰들이 공포를 쏘며 엄습해오자 유족들이 원상회복시키고 철수함.

제2차 : 유족들은 이웃의 질시와 능멸, 그리고 연좌제로 입신양명의 길이 차단된 채 망연자실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차 한림 유족들은 1956년 3월 30일 심야를 이용 시신을 수습하여 만벵디 공동묘역으로 유해를 운구 60위로 맞춰놓고 치아와 유품을 통하여 가족으로 확인된 17구는 개인묘역으로 옮기고 43위는 현 묘역에 안장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백조일손 유족들이 4월 28일 학살현장에서 유해를 발굴 도중 무장군인의 저지로 해산함.

제3차 : 군·관의 타협의 의하여 유해발굴이 공식 허용되자 백조일손 유족들는 1956년 5월 18일 유해가 암매장된 굴 속의 물을 양수기로 흡출하여 유해를 발굴하게 되었다. 자타구분 없이 뒤엉킨 유골을 준비된 칠성판 위에 머리뼈, 팔뼈, 다리뼈를 적당히 맞춰 149개로 구성하였는데, 후환이 두려운 일부 유족들에 의하여 17구는 개인묘지료 옮겨지고 132구는 미리 마련한 현 묘역에 안장하여 백조일손지지(百組一孫之地)라 명명하였다.

2007년 12월 31일」

 

  묘비의 글을 읽으며 우울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다시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알뜨르 비행장이 있었던 근처여서 소형 비행기를 감추어 두곤 하였던 격납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 날은 여기까지 걸었을 때 날이 저물어가고 있어서 종점인 모슬포 항구까지의 걸음은 다음에 다시 하기로 생각하고 사계리 차를 세워두었던 곳으로 돌아와 집으로 향했다.

 

  먼저 걸었던 길을 마저 걷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은 2012년 1월 말 설날연휴, 섯알오름에서 종점인 모슬포항구 근처까지의 10코스 남은 길은 걸었다.

  지난번에 걷다가 중단했던 지점인 섯알오름 4.3유적지 주차장에서부터 서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알뜨르비행장으로 향했다.

  알뜨르비행장은 일제강점기 말인 태평양전쟁 때에 일본군들이 제주도를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만들었던 비행장의 유적이다. 지금은 평평하고 넓은 땅이 띠풀이 가득 덮인 풀밭으로 남아 있지만 비행장 주변에는 그 당시의 관련 흔적인 비행기 격납고 등 여러 가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원래 비행장 터가 넓었을 터인데, 지금은 많은 부분이 밭으로 바뀌어져 사용되고 있어서 지금은 비행장 활주로 부분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였다.

 

 

 

 

 

  알뜨르비행장을 지나고 농로를 지나니 바닷가 해안도로가 나왔다. 해안도로를 횡단하여 하모해수욕장 앞 솔숲으로 들어섰다. 겨울이어서 해수욕장에는 쌀쌀한 바람만이 불고 있었지만 바닷가 풀밭에는 갈매기 떼들이 날개를 접어 쉬고 있었다.

 

 

 

  해수욕장과 연결되어 있는 운진항을 지나서 해안도로를 주욱 따라가니 모슬포항구가 나왔다. 모슬포항구는 제주도 남서부의 중심 항구로 여기서 마라도와 가파도로 가는 도항선과 유람선이 출발하는 곳이다.

  모슬포항구 입구를 지나니 곧바로 10코스의 종점인 대정중학교 남쪽에 있는 하모체육공원이다.

  10코스를 가을의 가운데인 10월부터 1월 말까지 세 번에 나누어 걸었다. 근무처 근처에 있는 코스이다 보니 근무가 끝나는 토요일 오후와 그 밖의 짬짬이 시간을 내어 걷곤 하였다. 전에 4코스 인근에 근무했을 때도 역시 4코스는 여러 번에 나누어 걸었던 기억이 있다.

  10코스를 완보하고 나서 다음 목표를 어디로 할까 생각하며 돌아오는 발길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