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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길

봄의 한가운데서 제주올레 16코스 걷기

  2012년 4월 말. 완연한 봄이 온 제주 땅을 덮고 있었다.

  이날은 제주올레 16코스를 걷기 위해 16코스의 시작점인 애월읍 고내리로 차를 몰았다.

  16코스는 애월읍 고내포구에서 시작하여 신엄리 포구와 구엄리 포구까지 해안을 따라 걷다가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물메로 올라간 다음 수산저수지를 거쳐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를 지난 다음 안오름을 거쳐 종점인 광령1리 사무소까지 가는 총 17.8km의 길이다.

 

 

 

  16코스 시점인 고내포구에 차를 세우고 출발의 발걸음을 떼었다.

  고내포구 앞에는 우주물이라는 샘이 땅속에서 솟아나와 흐르고 있었다. 옛날에는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였을 것이고, 마을 아낙들의 빨래터가 되어 마을의 온갖 정보를 주고받던 추억의 장소였을 것이다.

 

 

 

  고내포구의 파란 물빛이 오늘 올레길 걷는 길을 잘 갔다 오라고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봄바다도 잔잔하여 작은 파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날은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세상이 온통 파란 빛깔인 것 같았다.

 

 

 

  고내포구를 출발하여 왼편으로 절벽 아래의 파란 바다를 내려다보며 걸었다. 다락빌레에 만들어 놓은 다락쉼터에서 넓은 남해바다를 바라보니 멀리로 관탈섬이 보이고 파란 바다 위로 금방이라도 돌고래 무리들이 바다 위로 튀어오르며 헤엄칠 것 같았다. ‘다락빌레’에서 ‘다락’은 부엍에 물건을 넣는 다락이고, ‘빌레’는 너럭바위의 제주말로서, 이곳의 평평한 지형이 다락처럼 암반이 널리 깔려 있는 곳이어서 다락빌레라고 불리웠고,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평평한 이곳에서 여러 사람이 어울려 놀았던 곳이라고 한다.

 

 

  앙증맞게 작은 포구, 신엄포구에 이르렀다. 방파제 끝의 빨간 등대와 물속까지 다 비치게 티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바다색이 작은 포구에 조화를 이루어 잘 어울렸다.

 

 

 

 

  신엄포구를 지나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길. 신엄포구에서부터 남두연대까지는 해안도로변 바닷가 절벽 위로 나무가 무성한 숲길로 올레길은 이어지고 있었다. 노상카페에서 사먹는 커피 한 잔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남두연대를 지나니 해안 절벽이 끝나고 지형이 차차 낮아져 해안도로가 바다 가까이로 내리막길이 되었다. 새까맣고 둥글둥글한 먹돌(몽돌)이 해안을 따라 길게 펼쳐서 있었다.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창질경이들이 딱딱한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때론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왔을 것이고, 때론 파도가 만들어 낸 포말이 날아왔을 테지만 이런 곳에서 자라며 생명을 이어간다는 것이 참 질기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질경이일 테지만…….

 

 

 

  구엄포구에 도착하였다.

  구엄포구는 지금까지 지나온 고내포구나 신엄포구보다는 제법 규모가 큰 포구였다. 어떤 기준인지 모르지만 고내포구와 신엄포구 방파제의 등대는 모두 빨간 색인데 비해 구엄포구 방파제의 등대는 하얀 색이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특이한 것이 눈에 띄었다. 바로 돌염전이었다. 바닷가의 평평한 돌 위에 바닷 물을 가두어놓고 자연 증발에 의해 천연소금을 만들어내던 염전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이런 염전을 처음 보아서 그런지 참 신기하였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염전터에서 무심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고내포구에서 여기까지가 바닷가를 따라 걷는 길이었다. 구엄포구에서부터는 길이 꺾여서 내륙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앞에 물메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엄리 마을을 가운데를 지나 물메로 향했다. 일주도로 큰 길을 횡단하여 물메로 들어서니 북서쪽 기슭에서부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오름으로 올라서 가지 않더라도 오름 아래로 돌아서 저수지 쪽으로 가는 길도 예부터 있었던 길로 올레길 표시가 되어 있었다.

  물메 정상을 올랐다가 내려가니 넓은 수산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산저수지는 이 근처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이곳의 물은 주로 농업용으로 이용되고, 여름철에는 유원지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강태공들에게는 매우 좋은 낚시터이기도 하다. 이 저수지가 있기 때문에 이 마을 이름이 수산이 되었는지, 수산이라는 마을 이름 때문에 저수지의 이름이 수산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 저수지를 끼고 있는 오름 이름 역시 ‘물메’다.

 

 

 

  저수지 서쪽에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가지를 늘어뜨려 쇠기둥에 의지하고 더러는 물속에까지 가지를 드리운 아름드리 곰솔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곰솔은 천연기념물 제441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로, 수령이 오래 되고 나무의 모양이 특이하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나무의 크기는 12.5m, 둘레는 5.8m로 지상 2m 높이에서 원줄기가 잘린 흔적이 있고 그곳에서 4개의 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는 400년 전 수산리가 생길 때 뜰 안에 심었으나 집이 없어진 뒤 강씨 선조가 관리하였다고 전해지며, 수산리 주민들은 이 곰솔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이라 믿고 보호하여 왔으며, 눈이 내려 덮이면 마치 백곰 같다고 하여 곰솔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물가에 앉아 가지고 온 김밥을 먹노라니 저수지를 감돌아 온 시원한 바람이 김밥에 함께 말려 입안으로 들어와 김밥의 맛을 더해 주었다.

  올레길은 저수지 둑방 위로 이어졌다. 둑방 위 길을 걷노라니 하얗고 붉은 갯무가 둑 위 풀밭에 가득 덮여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시원한 수산저수지를 뒤로 하고 마을도 벗어나 물메초등학교 근처를 지나 농로로 들어서서 계속 길을 재촉했다.

  항파두리 성까지는 농로와 마을길로 지나가며 특이한 점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멀리 남쪽으로 큰 숲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저곳이 항파두리 성이 있는 곳이구나 짐작하며 그 곳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기만 하였다.

 

 

  중산간도로를 건너 항파두리 성 쪽으로 올라가는 길. 한 쪽은 가파른 언덕이고, 한 쪽은 물이 흐르지 않는 시내 사이로 길이 뚫려 있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가만히 지형을 살펴 보았다.

아하! 이런 지형이니까 옛날 삼별초군이 이곳에 성을 쌓고 방어진지로 사용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고려 때 항몽을 하던 고려 정부가 몽고와 화친을 하자 끝까지 항몽을 결의하여 싸우던 삼별초군이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게 쫓겨 탐라섬으로 들어와 이곳에 큰 토성을 쌓고 최후의 방어진지로 이용하였던 유적지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허물어지고 흔적이 사라져 버렸을 토성이 다시 복원되어 옛 자취를 되찾고 항몽의 유적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이었다.

  드디어 토성을 쌓은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언제부터 자라기 시작했는지 토성 위에는 무심한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봄꽃들이 피어나서 올레길을 걷던 아가씨가 카메라 앵글 속으로 꽃들을 담고 있었다.

 

 

 

 

  올레길은 토성을 넘어서 항몽유적이 앞길을 지나 고성 숲길로 이어졌다.

  안오름 아래 고성숲길에서 올려다보니 이곳의 토성은 복원공사가 이제 막 끝났는지 금방 잔디를 입힌 모습이었다.

 

 

  고성숲길을 지나 고성천길로 들어선 다음 고성천 시내를 건너 농로로 계속 길을 따라 걸었다. 때로는 큰길도 만나고, 때로는 작은 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때로는 밭길을 걷곤 하면서 종점인 광령리 사무소 쪽을 향해 걸었다.

 

 

  이리저리 꼬불꼬불 올레 표시를 따라 걸어가는 길. 어느 밭 담 위로 줄기를 뻗어 자라고 있는 멀꿀이 하얀 꽃을 활짝 피우고 여린 향기를 피우고 있었다.

 

 

  길을 따라 걷노라니 청화마을. 몇 가구가 오순도순 정겹게 살고 있을 작은 동네였다. 경치도 아름답고 앉아 있는 집들도 아름다운 마을인 것 같았다.

  청화마을을 지나 농로를 따라 걷노라니 어느덧 광령이 마을로 들어서게 되었다.

  광령초등학교까지 오니 학교 울타리를 따라 자라고 있는 큰 나무들이 올레길을 걷느라고 지치고 땀이 많이 난 나그네에게 시원한 그늘과 바람을 불어주었다.

  학교 앞을 지나 드디어 종점인 광령리 사무소 앞에 도착하였다.

  올레 스템프를 찍는 조랑말 모양의 간세가 이곳에서 16코스가 끝나고 17코스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