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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을 찾아서/국립공원 내의 오름들

돈내코 코스로의 겨울 등반

   오랜만에 쉬는 날. 느직하게 일어나 몽캐다가(“뭉그적거리다”의 제주말) 밖에 나가 하늘을 보니 더 없이 맑고 바람도 없었다. 겨울날씨답지 않는 포근한 날이었다. 육지에는 날씨가 춥고 눈도 온다고 하는데…….

   이런 날이면 습관이 되어버려, 이날도 배낭을 차에 싣고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돈내코 쪽으로 차를 몰았다. 돈내코 등반로 코스가 지난 12월 초에 개방을 했는데 한 달여가 지나도록 아직 가보지 않았던 것이 생각이 나서 오늘은 그 코스로 등반을 해야지 하고 맘을 먹었다.

   백록담 쪽을 보니 구름에 가려 한라산 정상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가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어떠랴 하는 생각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침이 시작된 지 시간이 많이 지나고 있어서 통제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통제하여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다른 오름을 오를 생각이어서 마음이 편했다.

   서귀포시충혼묘지가 있는 곳을 빙 돌아 뒤쪽으로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배낭을 메고 등반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갔다. 늦은 아침이었지만 다행히 통제하지 않고 들여보내 주어서 등반을 시작하였다.

  처음 등반로가 시작되는 곳에는 목제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계단 위로 오르면서 뒤돌아보니 돈내코 아래쪽으로 마을들과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바다 위에 섬들이 점잖게 앉아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목제 데크가 끝나고 잡목들 사이로 등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800미터쯤 가니 [밀림 입구]다. 백록담 남벽분기점까지는 6.2킬로미터.

 

 

 

 밀림 입구로 들어서서 등반로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사방이 빽빽한 나무들로 덮여 경관은 전혀 보이지 않는 길을 등반로 표시만 따라 마냥 걸었다. 그러나 처음 가보는 길이라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는 길에 나무들을 보며 이름을 기억해 내고, 겨울 땅 속을 헤치고 나와 초록색을 내보이는 몇 몇 들풀들도 보노라니 지루한 줄을 모르겠다.

   해발 700미터를 나타내는
돌 표지판 근처에 왔을 때 등반로 옆으로 작은 굴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굴이라기보다는 “궤”였다. (※ 궤 - 바위 아래가 굴 입구처럼 움푹 패여 들어간 곳) 대여섯 명이 들어가 앉을 만큼 되어서 등반을 하다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비를 피하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

 

 

 

 1.7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썩은물통]. 물이 고여있는 곳이 얼어있어서 괜찮겠거니 하고 물이 고여있는 가장자리 진흙을 밟았다가 발이 푹 빠지는 바람에 얼른 발을 뺐지만, 한쪽 등산화가 시커먼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낙엽을 긁어모아 닦아냈지만 등산화가 거무스름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해발 900미터쯤부터 등반로와 주변에 희끗희끗 눈이 쌓여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올라갈수록 쌓인 눈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적송지대] 표지판이 보인다. 2.57킬로미터를 걸어왔다. 이제 남벽분기점까지 남은 거리는 4.43킬로미터. 그 일대를 둘러보니 잡목들 사이사이로 우뚝우뚝 서 있는 적송들이 많이 보인다. 줄기가 검회색인 해송과 달리 적송은 줄기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적송의 가지를 뻗은 모양새도 고아하여 옛 선비 같은 고고한 품격을 풍기는 듯하였다.

 

 

 

 해발 1,000미터 표지석을 지나 4킬로미터를 간 곳에 여기가 [살채기도]임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남은 거리는 3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었다.
   올려다보니 여기서부터는 경사가 많이 높아지는 듯했다. 눈도 많이 쌓여 있어서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보였다.

   잠시 쉬며 보온병의 뜨거운 물로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시니 속이 조금 훈훈해 온다.
   이런 데서 마시는 커피라서 그런가, 맛이 참 좋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살채기도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하였다. 경사가 높고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제법 힘이 들었다. 눈 쌓인 길을 걸으면서도 땀이 많이 났다.

 

 

 

 둔비바위에 다다르니 지금까지 온 거리가 4.7킬로미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남은 거리는 2.3킬로미터. 표지석 앞에 둔비를 닮은 네모난 바위가 놓여 있었다. 울퉁불퉁한 주변의 다른 바위들과는 달리 네모난 모양이 꼭 둔비를 닮았다. (※ 둔비는 두부의 제주말)

 

 

 

 눈길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평궤대피소까지 남은 시간을 물어보았다. 3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한다고 한다. 힘을 내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둔비바위를 지나면서부터 바람소리가 씽씽 세차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올라갈수록 나무의 키들은 점점 작아지고 바람은 작아지는 나무의 키에 반비례하듯이 무척 세어지고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쳐 와서 얼굴을 때렸다. 배낭에 가지고 온 얼굴 가리개를 꺼내어 덮어썼다. 여기에서 몰아치는 눈보라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쌓였던 눈이 세찬 바람에 날려 몰아치는 것이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며 드디어 [평궤대피소]에 도착하였다.

 

 

 

 

 

 평궤대피소에 올라 남쪽을 내려다보니 흐릿한 속에서 서귀포 시내가 발아래 조그맣게 내려다보인다. 그 앞으로는 드넓은 태평양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깨끗한 날씨 속에서 내려다보았다면 기가 막힌 경치였으리라.

 

 

 

 여기서부터 백록담 아래 남벽분기점까지 1.7킬로미터 남았지만 몰아치는 세찬 바람을 뚫고 더 이상 남벽분기점까지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백록담도 바람이 흩뿌리는 눈보라 때문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한라산 정상까지도 맑은 날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대피소 안으로 들어갔다. 평평하게 놓여진 바위 아래 궤를 이용하여 만든 대피소라서 평궤대피소라고 부른다고 한다.여남은 명의 등반객들이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가지고 간 사발면을 꺼내어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부어 먹었다. 날씨가 워낙 추운 탓인가, 빨리 익지 않은 면을 휘휘 저어 설익은 채로 먹었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추위 속에서 아무 거나 뜨거운 것을 먹는데 어느 것인들 맛있지 않을 리가 없겠지.

   하산하는 길.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여 아쉽기는 했지만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차를 세워둔 곳에 도착하여 차에 놔두었던 귤을 까서 갈증 난 입에 먹는 그 맛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