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시작되는 6월 어느 날. 전부터 계획했던 등반을 이날 꼭 하겠다는 생각으로 배낭에 도시락을 챙겨 넣고, 물병도 준비하고, 카메라를 넣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날의 등반 계획은 성판악 코스로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까지 오른 다음 관음사 코스로 내려가는 계획이었다.
지금까지 성판악 코스로 백록담까지 올랐다가 다시 성판악 코스로 내려오기를 여러 번, 관음사 코스로 올랐다가 다시 관음사 코스로 내려가기는 한 번 했었는데, 이 코스로 올랐다가 저 코스로 내려가기는 아직 해 보지 않았다. 그건 등반로가 시작되는 곳에 세워둔 차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성판악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관음사 코스로 내려간 다음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5.16도로 버스를 탈 수 있는 산천단까지 가서 성판악으로 버스를 타고 간 다음 세워둔 내 차를 타고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아직은 다리가 그리 부실하지 않을 때 이런 등반을 해야지 나이가 더 많아지면 무리한 등반을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서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아침 일찍 성판악 주차장에는 내 차를 세워둘 공간이 남아 있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공휴일에 5.16도로를 가다보면 성판악 주차장은 등반객들의 차량으로 꽉 차서 바깥 도로에까지 양쪽으로 1,2km씩 주차해 놓은 것을 보곤 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일찍 나온 덕분에 주차장 안에 공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6시 25분경부터 등산을 시작하였다.
성판악 코스는 등반로가 시작되는 곳부터 숲이 우거져서 정상이 눈앞에 나타나는 4시간가량을 거의 숲으로만 가게 되었다.
약 45분 쯤 걸었을 때 해발 1,000미터 되는 지점에 도착하였다. 성판악 주차장이 해발 약 750미터니까 해발 높이로 약 250미터를 올라온 것이다.
경사가 완만한 등반로로 계속 올라가는 길은 숲이 우거져서 시원하였다. 일찍 출발했기 때문인지 등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을 뿐이었다.
7시 50분쯤에 사라약수에 도착하였다.
사라약수는 사라오름 근처에 있는 약수터로, 성판악 등반로에서는 유일한 약수이다. 일년 내내 시원하고 맑은 물이 쉼 없이 솟아 나와서 등반객들의 마른 목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약수다. 약수터 쉼팡에 앉아 약수를 시원하게 마시고 빈 페트병에도 채워 넣었다.
다시 올라가는 길. 초여름 우거진 나뭇잎이 싱그러웠다. 키 큰 나무숲 아래에는 조릿대가 땅을 뒤덮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사라오름 입구를 지나 9시 무렵에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6월 초면 이곳에 털진달래와 철쭉들이 한창 피어야 할 텐데 진달래나 철쭉은 보기가 어려웠다. 그 대신 병꽃나무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아침을 일찍 먹고 올라온 터라 조금 허기졌는데 대피소 앞 쉼터에 앉아 빵과 귤로 간식을 먹고 나니 다시 힘이 생겼다.
30분쯤 쉬고 나서 다시 출발하였다.
구상나무가 우거진 등반로를 지날 때는 은은하게 풍기는 구상나무의 향기가 코를 자극하였다. 구상나무 숲 아래에는 큰앵초가 화사한 꽃을 피우고 있어서 가던 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곤 하였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출발한지 한 시간 쯤 될 무렵 높은 능선을 넘어서 정상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지금까지는 우거진 숲길이거나 구상나무 숲이었는데 여기서부터는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고 등반로에는 그늘이 없어졌다. 그 대신 숲길을 걸을 땐 보이지 않던 사방의 풍경들이 환하게 눈이 들어왔다. 그리고 데크 시설이 없는 곳은 돌길이었다.
나무 데크 길과 돌길을 걸어 마지막 오르막인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향해 올랐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오르막 중간을 지나 정상에 거의 다 올랐을 무렵 다리에 쥐가 나서 뻣뻣해지고 아파오는 것이었다. 그만 주저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한참을 쉬었다. 정상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잠시 쉬면서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주변의 산꽃도 살펴보았다.
몇몇 젊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 오르는 어름에서는 힘들어하고 다리가 아파하는 것 같았다. 앉아서 쉬고 있는 주변에 설앵초가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작은 솜털로 덮여 있는 구름떡쑥도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11시 20분 경에 한라산 정상에 올라섰다.
성판악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5시간 만에 정상에 도착하였다. 쉬는 시간을 줄이고 꾸준히 올랐으면 4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곳인데, 중간에 쉼도 많이 하였고 꽃을 보면 카메라를 들이대곤 하면서 오르다보닌 정상적으로 오르는 시간보다 1시간이 더 걸린 셈이었다.
백록담에는 물이 조금밖에 고여 있지 않았다.
내가 처음 백록담에 올랐던 때가 중학교 2학년 때인 42년 전이었는데, 그 때는 물이 가득 고여 있어서 분화구 안에 들어가서 백록담 물로 밥을 지어 먹고 나서 그 물속에 들어가서 목욕을 했던 기억이 났다.
(※ 그 때는 영실에서 윗세오름을 거쳐 서북벽을 타고 올라와서 분화구 안으로 들어갔었는데, 지금은 서북벽으로의 등반이 통제되어 있고 분화구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멀리 성판악 등반로가 시작되는 곳과 그 앞의 물오름, 성널오름, 사라오름, 흙붉은오름, 돌오름 등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서귀포 시내와 섶섬, 문섬들이 희미한 안개 속에 내려다 보였다.
이날따라 정상에는 웬 날벌레들이 그리도 많은지 엄청나게 많은 날개미 비슷한 작은 벌레가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곤 하여 발붙일 곳이 없을 정도였는데, 아래 사진에서 서귀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사진 속의 작은 점들은 날벌레들이 사진에 찍힌 것들이다.
정상에서 가지고 간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잠시 쉰 다음 12시 경에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관음사 코스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내려가는 길에 보니 죽은 구상나무들과 살아있는 구상나무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구상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고 했으니, 죽은 구상나무들도 살아있는 구상나무들에게 생의 가르침을 주고 있는 듯 하였다.
내려가면서 보니 삼각봉 쪽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에서는 눈 아래로 안개가 깔린 풍경이 참 멋있었다.
백록담 북벽과 장구목의 풍경을 보면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정상에서 용진각까지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심한 등반로여서 전에 이 길로 올라왔을 때도 힘이 들었었지만, 내려가고 있는 지금도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러나 북벽과 장구목의 웅장하고 멋진 풍경을 보노라면 힘이 든 것도 이겨낼 수 있었다.
가장 힘든 내리막길을 다 내려가 용진각에 도착하였다.
용진각에 대한 설명은 그곳에 세워진 안내판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쓰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 자리(해발 1,500m)에 있었던 용진각 대피소는 1974년 건립 이후 30여넌 동안 한라산을 찾는 탐방객들의 아늑한 쉼터로서 보금자리 역할을 해왔던 추억의 산장이다. 한라산 정상인 북벽과 장구목, 삼각봉, 왕관릉으로 둘러싸여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이곳은 히말라야를 연상케 하는 수직의 암벽이 있어 산악인들의 동계훈련 장소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태풍 “나리”로 한라산 지역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백록담 북벽에서부터 암반과 함께 급류가 쏟아져 내려 인근 계곡의 지형이 크게 변하고 수십년 된 고목들이 뿌리채 뽑혔으며 오랜 추억을 간진한 용진각 대피소는 이 때 아쉽게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에는 용진각 산장 앞 시내(건천)를 지나서 삼각봉 아래로 가곤 했었는데, 이제는 시내 위로 구름다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백록담에서 출발한 지 1시간 만인 오후 1시 경 용진각 다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용진각 구름다리는 주변의 멋진 경치에 어울려 더욱 운치있게 보였다.
용진각 구름다리를 지나니 시원하게 솟아나는 샘물이 있어서 마른 목을 축이고 다시 빈 페트병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삼각봉 아랫길을 천천히 걸어 삼각봉 산장까지 가며 계속 눈을 사로잡는 멋진 경치에 빠져들었다. 특히 왕관릉의 모습과 머리 위로 높이 솟아 있는 삼각봉의 모습에 피곤한 줄을 몰랐다.
삼각봉 산장을 지나면서부터는 완만한 경사로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아, 그런데 여기쯤에서부터 무릎에 통증이 오는 것이 아닌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왼쪽 무릎 관절 부분에 통증이 왔다. 내려가려면 아직도 두 시간 쯤은 더 가야 하는데 큰일났다 싶어 잠시 쉬면서 무릎을 주물러 보기도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오른쪽 다리에 힘을 더 주면서 왼쪽 다리를 덜 움직이는 방법으로 천천히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내려가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삼각봉 산장에서 좀 더 내려가자 적송지대가 한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적송들을 감싸고돌면서 연기같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 눈 아래로 보았던 안개가 여기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였던 것이다.
안개 낀 적송지대롤 더 내려가자 슬슬 안개가 걷히고 붉은 적송들이 미끈한 몸뚱이를 드러내고 팔을 벌리고 있었다.
적송지대를 지나서도 울창한 숲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픈 다리를 끌고 더 천천히 걸어야 했다. 특히 계단을 내려갈 때는 통증이 더 심했다. 가끔 경치가 좋은 시내 위의 구름다리를 지날 때도 이젠 아픈 다리 때문에 더 이상 사진 찍기도 귀찮아졌다.
겨우 겨우 관음사 등반로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제주 시내로 내려가는 다른 등반객의 차를 얻어 타고 산천단에서 내린 다음 성판악 주차장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에 세워두었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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