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에 눈이 녹듯이
꿈꾸는 아이 한 천 민
상담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하영아, 하영아!”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뒤를 따라 나오다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난 쿵광거리면서 복도를 뛰어갔다. 거칠게 복도를 뛰어가는 나의 발소리만이 내 뒤를 따라 달려왔다.
운동장 서쪽 편에 있는 수돗가까지 한숨에 뛰어온 나는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고 쏟아지는 물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카락을 적시고 얼굴로 흘러내리고 목을 타고 가슴으로 기어들어 가려는 듯 했다. 그제야 조금 시원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야?’
하영이는 조금 전 상담실에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선생님이 뭔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 하영아, 어제 윤경이 엄마가 선생님을 찾아왔었다. 윤경이 엄마는 울면서 윤경이가 두 달 동안 힘들어했던 이야기를 모두 했다. 윤경이가 왜 힘들어했는지 하영이는 잘 알 거야.
- 선생님은 하영이에게 실망했다. 하영이가 반장이래서 친구들을 잘 이끌어나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영이가 앞장서서 윤경이를 따돌린 것에 대해 무척 실망이란다.
‘선생님은 아무 것도 몰라. 아이들이 윤경이를 왜 싫어하는지…….’
“하영아, 이따 청소 끝나면 상담실에 잠깐 들리렴. 얘기 할 것이 있어.”
학교 공부가 끝날 무렵 선생님께서 상담실로 오라고 하셨다. 무엇 때문에 부르시는지 대강 짐작이 가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선생님께서 이 일 때문에 부를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교실 청소를 했다.
난 청소가 끝나고 친구들이 돌아간 다음 상담실로 갔다.
선생님은 상담실에서 책을 보시며 기다리고 계셨다.
선생님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선생님, 저 왔어요.”
“오, 그래. 거기 앉아라.”
난 선생님 앞 의자에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한 동안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나를 바라보셨다. 선생님이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괜히 고개가 숙여져 내 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짧은 침묵을 깨고 선생님이 입을 여셨다.
“하영아, 어제 윤경이 엄마가 선생님을 찾아왔었다. 그리고 울면서 윤경이가 두 달 동안 힘들어했던 이야기를 모두 했다. 윤경이가 왜 힘들어했는지 하영이는 잘 알 거야. 그래서 그 일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반장인 하영이를 부른 거야.”
내 짐작 대로였다. 선생님이 윤경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난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 발치께만 내려다보았다.
“윤경이 엄마의 말에 의하면 우리 반 아이들이 윤경이랑 놀지 않고 따돌린다고 하더구나. 윤경이는 친구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친구들이 상대해 주지 않고. 그래서 더욱 힘들었단다. 자, 이제 왜 그랬는지 친구들을 대표해서 반장인 하영이가 얘기해 주기 바란다.”
한참을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용기를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말씀드릴게요.”
“그래, 얘기해 보아라.”
“처음에 윤경이가 전학 왔을 때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윤경이랑 친구가 되고 싶어 다가갔어요.”
“그래, 그랬었지. 그런데 왜 두 달만에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선생님은 그게 궁금하구나.”
“윤경이는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때부터 친구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집으로 초대해서 자기 집 자랑을 하고, 친구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건 윤경이가 전학 와서 너희들과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걸 거야. 윤경이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왜 모든 친구들을 초대하지 않은 거죠? 한 달 동안에 윤경이네 집에 초대받아 가지 않은 친구들은 두 명의 친구뿐이었어요. 두 친구가 초대받지 못한 이유는 걔네들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였어요. 윤경이는 아버지가 대학 교수라고 자랑하고, 어머니가 의사라고 하면서 으스댔어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지난 시험에서 일 등을 하자 얼마나 뻐기는 데요. 그래서 친구들이 하나씩 등을 돌리기 시작하고 윤경이와 놀지 않게 된 거예요.”
“그래도 반장의 입장에서는 친구들이나 윤경이가 잘못하고 있는 점을 잘 얘기해 주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 주어야지 않겠니?”
“그런 노력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언젠가 한 번 윤경이를 따로 만나서 얘기했는데 윤경이는 제 충고를 듣고도 코방귀를 뀌고 여전히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화가 나서 윤경이를 따돌린 거예요.”
“물론 윤경이가 잘못하는 점은 있겠지만 우리 반을 잘 이끌어오고 있는 하영이가 넓은 마음으로 윤경이를 포용해 주고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윤경이를 설득하고 충고할 수도 있지 않았겠니? ”
“선생님, 저는 그러고 싶지만 먼저 윤경이가 변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친구들의 마음이 계속 토라져 있을 거예요.”
“아니야, 반장인 하영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단다.”
“싫어요. 윤경이가 지금까지의 일을 사과하지 않으면 저도 윤경이를 용서하지 않을래요.”
“선생님은 하영이에게 실망했다. 하영이가 반장이래서 친구들을 잘 이끌어나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영이가 앞장서서 윤경이를 따돌린 것에 대해 무척 실망이란다.”
“그래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 실망만 드리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상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와버렸다.
“하영아, 하영아!”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뒤를 따라 나오다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마음 속에 큰 파도가 일어났다.
잔물결이 일기 시작하더니 점점 허연 거품을 일으키는 큰 파도가 되어갔다. 처음에는 그 파도가 선생님을 향하여 달려가더니, 나중에는 윤경이를 향해 달려가서 선생님과 윤경이를 모두 파도 속에 빠뜨려버리려 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큰 파도를 일으키며 거칠어지던 내 가슴이 집에 도착할 무렵이 되어서는 조금씩 파도가 잔잔해지고 있었다. 허연 거품이 줄어들고 파도의 거친 숨결이 잦아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 반 친구들이 왜 윤경이를 따돌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윤경이 엄마 말씀만 듣고 그런 거야.’
‘선생님 말씀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와버린 내가 좀 잘못했지?’
‘아냐,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선생님 말씀이 옳은 것도 같아. 윤경이에게 한 번 충고해서 듣지 않았다고 내가 너무 성급한 것도 같아.’
‘아냐, 아냐, 아냐! 에이 어느 게 옳은 건지 모르겠어.’
난 고개를 흔들며 도리질을 했다. 아파트 계단을 오를 때쯤에는 가슴 속 파도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에 어제 일로 또 선생님이 부르셔서 꾸중하실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오히려 전보다 더 밝은 얼굴로 날 보시며 웃으시고 공부를 가르쳐 주시곤 하셨다.
난 그게 더 불안했다. 차라리 꾸중을 듣는 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선생님을 전처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자꾸 시선을 피하곤 했다.
며칠이 지나도 선생님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우리들의 행동을 지켜보시는 것 같았다.
난 친구들에게 상담실에서 선생님과 얘기 나누었던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여전히 윤경이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전처럼 대놓고 윤경이를 따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윤경이에게 다가가고 싶지도 않았다.
공부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내 눈은 어느 새 윤경이의 모습과 행동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지금 윤경이는 처음 전학 왔을 때의 윤경이가 아니었다.
공부 시간의 윤경이의 뒷모습은 어깨가 축 처져있었고, 발표할 때의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운동장에 나가 놀 때에도 윤경이는 교실에 혼자 남아 책을 보거나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곤 하였다. 교실에 아이들이 모여서 재잘거릴 때에도 윤경이는 자기 자리에서 책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윤경이의 눈은 펼쳐놓은 책으로 가지 않고 책장만 건성으로 넘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경이의 그런 모습을 보는 내 가슴 한 쪽에는 풀어지지 않은 실뭉치 같은 것이 엉켜있는 것 같았다. 실뭉치를 풀긴 풀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풀릴지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먼저 윤경이에게 다가가긴 싫었다. 윤경이가 친구들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한다면 받아들여서 모두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은데, 윤경이도 먼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영아, 너 요즘 이상하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곤 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가장 친한 은영이가 말했다.
선생님과 상담실에서 윤경이 이야기를 나눈 지 열흘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선생님은 여전히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가는 나들이에 아침부터 내 마음이 설렜다.
아버지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동문들과 가족들이 모여서 개교기념 행사로 체육대회가 열린다고 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작은 도시로 내려가는 길이다. 체육대회에도 참가하고 할아버지 댁에도 들릴 것을 생각하니, 며칠 동안 윤경이의 일로 지끈거리던 머리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막 겨울로 접어든 무렵이라 날씨가 쌀쌀하고 잔뜩 흐려진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지만 내 마음은 날씨와는 정 반대로 밝아졌다. 체육대회를 하기에는 좋지 않은 계절이지만 개교 기념 행사로 열리기 때문에 이맘때면 해마다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작은 고등학교 운동장에는 하얀 천막이 줄을 지어 가득 쳐져 있었고, 천막마다 사람들이 가득가득 앉아있었다.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반가운 인사를 하며 악수를 하기에 바빴다.
이윽고 치러진 체육대회는 경기마다 뜨거운 기운이 가득하고, 경쟁하기보다는 서로 웃고 즐거워하는 분위기로 바뀌어가곤 하였다.
아버지도 경기에 몇 번 참가하였고, 가족 경기에는 나도 참가하여 상을 받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경기 중에 내 마음에 찡하게 남아 있는 경기가 있었다.
그것은 옛 스승님을 모시고 달리는 2인 3각 달리기였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을 모시고 참가를 하였다. 아버지의 담임 선생님을 하셨고,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까지 하시다가 은퇴하셨다고 하시는 아버지의 선생님은 머리가 히끗히끗하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신 스승님과 한쪽 다리씩을 끈으로 묶고 달리기 출발선에 섰다.
“아버지, 파이팅! 선생님 파이팅!”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선생님을 응원하며 달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삐익!
출발 신호가 울리자 아버지는 선생님을 모시고 달렸다. 아버지와 선생님은 어깨동무를 하고 묶여 있는 발을 맞추며 하나 둘 하나 둘 천천히 달려갔다. 그러나 선생님이 나이가 많으셔서 그런지 빨리 달릴 수 없었다.
반쯤 달렸을 때는 다른 팀들과의 거리가 이미 상당히 벌어져 있었고, 아버지네가 제일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아니, 아버지와 선생님은 걷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천천히 달렸다.
나는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갑자기 멈추어 선 아버지가 다리에 묶었던 끈을 풀고 있는 것이었다. 끈을 다 푼 아버지는 선생님을 업고 결승선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엉뚱하게도 결승선을 넘어서 계속해서 운동장을 도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엉뚱한 행동에 나는 어쩔 줄 몰라 발을 구르고 있는데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 주는 것이었다.
운동장을 다시 한 바퀴 돌아 결승선으로 들어가신 아버지는 선생님을 내려 드리고 그 앞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손뼉을 크게 쳐주었다. 아버지는 2인 3각 달리기에서 꼴찌를 하였지만 가장 크게 박수를 받았다.
경기가 끝나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있었다.
“난 고등학교 시절 스승님으로부터 너무나 큰 사랑을 받았단다. 가난해서 공부하기가 어렵고 삐뚤어질 뻔한 나를 바르게 이끌어 주셔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분이 바로 이 분이시란다. 그 고마운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지만 스승님의 은혜를 한없이 갚고 싶은 내 마음을 업어드리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전해드리고 싶었단다.”
아버지의 눈에 어느새 작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난 마음 속으로 아버지에게 큰 박수를 보내드렸다.
“선배님, 잘 하셨어요.”
등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에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어, 자네도 왔군.”
“어, 그, 그런데 너 하영이가…….”
“서, 선생님…….”
거기에는 담임 선생님께서 운동복을 입고 서 계셨다.
선생님은 우리 가족들을 둘러보시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아버지도 선생님과 똑 같은 표정을 짓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보, 우리 하영이 담임 선생님이세요.”
어머니께서 선생님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럼 하영이가 선배님의 딸……?”
“자네,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우리 하영이를 담임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요. 저도 어리둥절하네요. 하영이 아버님 이름이 선배님 이름하고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이겠거니 하였지요.”
“하하하, 이거 참…….”
난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의 후배였다니…….
그런 줄도 모르고 선생님과 이야기하다가 말씀을 안 듣고 상담실 문을 열고 나와버리고, 선생님을 미워했고…….
아버지와 선생님은 손을 마주 잡고 웃으며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는데도 그걸 몰랐었군 그래.”
“예. 저도 이곳에 있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지난 봄에 서울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가서 몇 번 선생님을 뵀으면서도 선생님께서 우리 하영이 아빠 후배이신 줄을 몰랐었네요. 호호.”
어머니도 겸연쩍은지 작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우리 하영이 자네 속상하게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지?”
난 순간 아버지의 말씀에 가슴이 뜨끔하여 선생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생님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럼요. 하영이가 얼마나 모범적인 반장인데요. 하영이가 반 친구들을 잘 이끌어서 저도 기쁜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걸요.”
선생님의 말씀에 난 가만히 가슴을 쓸어 내리며 슬그머니 다시 선생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하하하. 우리 하영이가 선생님의 칭찬에 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렸구나.”
“하하하.”
“호호호.”
웃음소리가 귀 끝을 간질이면서 얼굴을 더욱 달아오르게 하였다.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 댁에서 일어났을 때 세상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어제부터 하늘이 잔뜩 흐려 있더니 기어이 하늘이 눈을 내려보낸 것이다.
“하영아, 첫 눈이 고웁게도 내렸구나. 어여 나가서 눈을 밟아 봐라.”
할아버지 말씀에 나는 얼른 마당으로 나갔다. 많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제법 검은 땅을 다 덮고 할아버지 댁 지붕을 덮고, 마당의 잎 떨어진 감나무 가지에 앉아 작은 눈꽃을 만들고 있었다.
눈을 밟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뽀드득.
뽀드득.
대문을 나가는 나를 발자국이 따라왔다.
손에 가득 눈을 모아 얼굴에 비벼보기도 하고, 눈을 뭉쳐 눈강아지도 만들어 보고, 눈 위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였다. 차가운 눈을 만지고 차가운 눈 위에 드러누웠는데도 눈은 포근하게 나를 감싸주었다.
한참을 놀다 들어오는데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햇살은 따스한 기운을 곳곳에 쏟아내고 있었다. 지붕에 내린 햇살은 벌써 고드름을 만들고 있었다.
할아버지네 마당에는 햇살이 더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햇살이 눈을 녹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까 눈이 녹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햇살 알갱이가 떨어져 부딪히는 곳마다 눈이 소리 없이 스러지고 있었다. 눈이 녹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눈 녹은 물이 땅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까 물기를 머금은 윤경이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느새 내 가슴속에서도 차가운 눈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어제 내게 눈을 찡긋거려주었던 선생님의 미소 같은 햇살이 내 가슴속에까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아직 녹지 않은 눈 위에 손가락으로 마음 속의 말을 써 보았다.
- 윤경아, 미안해. 너와 나를 가로막던 차가운 눈이 선생님의 햇살 같은 미소로 녹아가고 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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