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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길

제주의 과거를 돌아보며 걷는 길 올레19코스

  12월의 마지막 토요일. 이날은 제주올레 19코스를 걷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서 차를 달렸다. 도착한 곳은 19코스의 시작점인 조천 만세동산.

 

  제주올레 19코스는 조천 만세동산을 출발하여 구좌읍 김녕 서포구까지의 18.8km 거리를 걷는 구간이다.

  코스를 자세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천만세동산 → 관곶(2.2km) → 신흥해수욕장(3.1km) → 앞갯물(5km) → 함덕 서우봉해변(5.9km) → 서우봉(7.1km) → 너븐숭이 4.3기념관(8.9km) → 북촌동명대(북촌포구)(9.8km) → 북촌동굴(10.8km) → 난시빌레(11.4km) → 동복교회(11.9km) → 동복리 마을운동장/벌러진동산(12.9km) → 김녕마을 입구(14.8km) → 김녕농로(15.8km) → 남흘동(18km) → 백련사(18.4km) → 김녕서포구(어민복지회관 앞)(18.8km)

 

 

 

 

 

  19코스의 시작점인 조천 만세동산.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곳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었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탑, 기념비, 전시관 등으로 조성한 공원이 만세동산이다.

  만세동산은 넓은 면적의 부지에 가운데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공원 내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작은 언덕에도 기념탑과 더불어 독립취지문을 새긴 비석,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의 이름과 행적 등을 새긴 비석 등을 만들어 놓아 기념하고 있었다.

  그 중 독립취지문을 새긴 비석에는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었다.

 

  [獨立趣旨文]

 

  己未年 濟州의 만세운동은 日帝의 폭정에 분연히 항거한 三.一운동의 擴散氣流로, 同年 三月 二十 一日 이곳 朝天 미밋동산(만세동산)에서 最初로 決行되었다.

  金時範, 金時段, 李文天, 金?培, 朴斗圭, 金熙洙, 黃鎭式, 金弼達, 金章煥, 金容燦, 金慶熙, 白膺善, 高載崙, 金瀅培 님 등 熱血靑年들이 主導하고, 수백 수천의 島民들이 한마음으로 結集된 이 운동은 全島民에게 뜨거운 民族精氣를 일깨운 一大 快擧였다. 그러나 烈士들이 倭警에게 잡혀 獄苦를 치른 후, 그 거룩한 뜻을 이어받고자 노력해 왔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은 紀念碑만이 그날의 喊聲과 넋을 기리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烈士들의 고장이며 제주 만세운동의 搖籃이 이 동산에 民族을 위해 몸을 불사른 그 崇古한 精神을 길이 後孫에게 傳하고자 島民의 誠力을 모아 이 塔을 세운다.

  西紀 一九九一年 三月 一日

  朝天 만세동산 聖域化推進委員會

 

 

 

 

 

 

  만세동산과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서 본격적으로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걸어가는 앞길에 동쪽 멀리로 이제 걷게 될 함덕 서우봉이 뿌연 해무에 싸여 떠올라 보였다.

 

 

 

  만세동산에서 북쪽의 바닷가 불쑥 튀어나온 곳, 관곶에 이르니 작은 언덕이 몸을 살짝 일으켜 바다를 바라보는 듯하게 뾰조록하게 솟아 있었다.

 

 

 

  관곶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길에 불턱이 보존되어 있었다. 불턱은 해녀들이 물질하기 위해 모여들어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물질을 하고 나와서는 물질 후 얼린 몸을 녹이기 위해서 불을 피우기도 하는 곳이다. 잘 복원되어 보존되고 있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래는 드나드는 문이 길가에서 볼 수 없도록 바다 쪽을 향해 있어야 하는데 이 불턱의 드나드는 문은 길가 쪽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턱을 지나니 해안도로를 살짝 벗어나서 바닷가 들판 길로 들어가도록 올레길 안내 리본이 가리키고 있었다. 가리키는 대로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가다가 다시 나온 곳은 신흥 해수욕장이었다. 마침 밀물이어서 해수욕장의 모래밭은 거의 물에 잠겨 있어서 해수욕장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바닷가와 작은 만(灣)처럼 안으로 쏙 들어와서 물이 잠겨 있는 바다 가운데를 통틀어 모두 5개의 방사탑들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에는 두 개의 탑이 서 있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예전부터 있던 것이고, 어느 것이 나중에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신흥리의 두 개의 방사탑은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8-11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탑은 세운 방향이 허하다고 하여 남쪽과 북쪽에 1기씩 세웠다고 한며 이 탑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남쪽 포구에 있는 탑은 ‘큰개탑’ 또는 ‘생이탑’이라고 하여 음탑(陰塔)을 뜻하고, 북쪽에 있는 탑은 ‘오다리탑’, ‘생이탑’이라고 하고 탑 위에는 길죽한 돌이 세워져 있어 양탑(陽塔)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올레길은 신흥 해수욕장을 따라 나 있는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가다가 마을 안길로 이어져 있었다. 마을 안길로 얼마를 가니 옛 신흥초등학교 터에 세워진 제주다문화교육센터 앞을 지나게 되었다. 농어촌의 많은 마을들이 학생 수의 감소로 말미암아 폐교가 되어 옛 학교 건물과 부지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곳은 교육청에서 다문화교육센터로 재탄생하여 잘 활용되고 있는 좋은 예이다.

 

 

 

 

  다문화교육센터 앞을 지나서 제주대학교 해양환경연구소 앞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얼마를 더 가니 함덕 포구다. 함덕 포구에는 옛날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 있었는데 앞갯물이라고 한다고 하여 잘 보존되고 있었다.

  시골의 어촌 포구치고는 꽤 큰 포구에 배들이 많이 매여 있고, 어부들이 어구를 손질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포구를 지나 조금 더 가니 서우봉해변(함덕해수욕장)이다.

  함덕해수욕장에 와서 보니 겨울의 해수욕장은 쓸쓸할 것 같은 생각은 선입견일 뿐이었다. 넓은 모래밭은 모래 보호를 위해서 부직포로 덥혀 있었지만, 젊은 남녀들이 찾아와 겨울 바다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있어서 쓸쓸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서우봉해변 동쪽 언덕에는 이곳이 전적지임을 말해주는 작은 돌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삼별초 항쟁 때 여원(麗元) 연합군이 상륙한 전적지. 삼별초가 점거해 있던 제주도에 1273년(원종 14) 4월 여원군이 상륙전을 감행할 때 원수 김방경은 먼저 좌익군을 비양도에 상륙시켜 명월포를 공격할 것처럼 오인시키고 중군을 이곳으로 상륙시켰다. 이 양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여원군은 그 기세를 타 삼별초를 전멸시키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올레길은 해수욕장을 지나서 바로 서우봉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서우봉은 물소가 뭍으로 기어 올라오는 듯한 형상이라고 하여 예부터 덕산으로 여겨져 왔다고 한다. 동쪽 기슭에는 일본군이 파 놓은 21개의 굴이 남아 있으며, 서우봉 산책로는 함덕리 고두철 이장과 동네 청년들이 2003년부터 2년 동난 낫과 호미만으로 만들 길이라고 한다.

 

  서우봉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뒤돌아 보니 함덕 마을과 겨울 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함덕리는 읍면소재지도 아닌 일개 마을이지만 작은 도시 못지않게 상당히 큰 마을이다. 바닷가에는 큰 빌딩도 우뚝우뚝 서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산책로를 따라 숲속 길로 가도록 나무에 묶여있는 올레 표시를 따라 정상에 올랐다. 서우봉 정상은 넓고 편평한 풀밭이었다. 내 발은 잠시 정상에 머물렀으나 내처 걷는 김에 그냥 가리라 생각하고 정상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올레길 표시를 따라 서우봉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서는 북쪽에 펼쳐진 바다와 북촌 마을, 그 앞의 다려도의 풍경이 펼쳐졌다.

서우봉을 다 내려간 곳에 작은 포구가 있었다. 그런데 포구의 크기가 작고 어선들보다는 고무보트들이 매여 있는 것으로 보아 고깃배들이 이용하는 포구는 아닌 듯 싶었다.

 

 

 

 

  작은 포구를 지나서부터는 마을 안길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고, 작은 마을 안길을 벗어나니 올레 표시는 농로를 따라 가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농로를 얼마쯤 따라갔을까, 눈앞에 문득 나타나는 건 「너븐숭이 4.3기념관」이다.

  전부터 4.3때의 북촌 마을의 비극을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기념관을 자세히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관람객이 아무도 없는 기념관을 혼자서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북촌 마을의 비극이 글과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었고, 그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었다.

  좀 길긴 하지만 그 때의 북촌 마을의 비극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알 수 있도록 기념관에 안내되어 있는 대로 여기 옮겨 적는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주민 대학살의 진상]

 

  ○ 발단

  1949년 1월 17일, 북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세칭 ‘북촌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 마을 너븐숭이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보초를 서던 원로들은 군인 시신을 군부대로 운구해 가라는 명령을 받고 들것에 실어 함덜리 주둔부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9명의 연로자 가운데 경찰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살해 버렸다.

 

  ○ 전개

  오전 11시 전후,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 쯤 되는 병력이 북촌 마을을 덮쳤다. 무장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남녀노소, 병약자 할 것 없이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학교 운동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웠다. 4백여 채의 가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1천 명 가량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교단에 오른 헌병 지휘자는 먼저 민보단 책임자(장운관)를 나오도록 해서 ‘마을보초 잘못 섰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했다. 또 두 명의 여인에게도 총격이 가해졌다. 군인들은 다시 군경가족들을 나오도록 해서 운동장 서쪽 편으로 따로 분리시켜 갔다. 이때 교문 쪽에서 총성이 들렸다.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은 채 싸늘히 식어갔다. 배고파 울던 아기는 죽은 어머니의 젖가슴에 매달려 젖을 빨고 있었다.

 

  ○ 대학살

  어린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군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민 몇 십 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당팟’과 ‘너븐숭이’, ‘탯질’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 주민학살은 오후 4시경 대대장의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 증언

  “군인들이 맨 처음에 19명의 민보단원들을 호명하여, 그 사람들을 학교 서쪽에 있는 너븐숭이 소나무밭으로 가서 학살했습니다. 두 번째 희생자들도 너븐숭이 소나무밭 바로 건너에서 학살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냥 무작위로 한꺼번에 수십 명씩 끌려갔는데, 그 때가 제일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습니다.” _조희권(북촌리 주민)

 

  ○ 이어지는 학살

  한편 사살 중지를 명령한 대대장은 주민들에게 다음 날 함덕으로 강제 소개 명령을 내리고 병력을 철수시겼다. 살아 남은 주민들 가운데는 다음날 산으로 피신한 사람, 함덕으로 간 사람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대대장으 말대로 함덕으로 갔던 주민들 가운데 100명 가까이가 ‘빨갱이 가족 색출작전’에 휘말려 다시 희생되었다.

 

  ○ 증언

  “한 장교가 ‘군에 들어온 후에도 적을 살상해보지 못한 군인들이 있으니까 1개 부대에서 몇 명씩 끌고 나가 총살을 해서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 결국 그게 채택되었습니다.“ _김병석(당시 경찰, 대대장 차량 운전수)

 

  ○ 결말

  이 사건으로 북촌 마을은 후손이 끊겨진 집안이 적지 않아서 한때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마다 섣달 열여드렛날이 되면 명절과 같은 집단적인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이처럼 엄청난 피해를 당했음에도 북촌리 마을 주민들은 이후 이 사건에 대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침묵과 금기, 그리고 왜곡의 역사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 증언

  “동생들을 찾기 위해서 막 다녔는데, 나중에 보니까, 저 소낭밭에서 찾았어요. 제일 밑에 동생(당시 5세)은 총 안 맞고, 추워서 죽었어요. 둘째 누이동생(10세)은 가시더물 위에 넘어져 있었고, 또 제 밑에 동생(8세)은 이마에 총을 맞았어요. 각기 손에 고무신을 다 쥐고 그렇게 죽어 있었어요. 그래서 너븐숭이에 지금 무덤이 있어요.” _김석보(북촌리 주민)

 

  ○ 또 하나의 학살

  이날 북촌리에서 집단 학살극을 벌인 군인들은 옆 마을인 동복리에 들러 주민들 86명을 속칭 ‘굴왓’에서 집단 학살하기도 했다.

 

  ○ 아이고 사건

  마을에서 세칭 ‘아이고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1954년 1월 23일 벌어졌다. 이날 주민들은 초등학교 교정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김석태의 고별식과 속칭 ‘꽃놀이’를 하던 중 “오늘은 6년 전 마을이 소각된 날이며 여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지 6주년 기념일이니 당시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을 올리자.”는 한 주민의 제안에 따라 묵념을 하게 됐다. 그 때 설움에 복받친 주민들이 대성통곡을 한 것이 경찰에 알려져 ‘다시는 집단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나올 수 있었다. 눈물마저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 현기영의 ‘순이삼촌’

  아무도 말 못하던 시절, 문학적 양심으로 고향의 아픈 역사에 대한 펜대를 들이댄 작가가 현기영이었다. 그는 북촌리의 대학살을 다룬 「순이삼촌」을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하면서 침묵의 금기를 깨고 논의의 한복판으로 끌어내었다. 그러나 작가는 4.3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한 공동체가 멜싸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말이야. 이념적인 건 문제가 아니야. 거기에 왜 붉은색을 칠하려고 해? 공동체가 무너지고, 누이가 능욕 당하고, 재산이 약탈 당하고, 아버지가 살해 당하고, 친구가 고문 당하고, 씨멸족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항쟁이란 당연한 거야.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항복하고 굴복해야 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_현기영. 「제주작가」22호.

 

  ○ 북촌리의 진상규명 운동

  1960년 4.19혁명 후 국회 차원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 사업이 벌어지자 북촌리 주민들은 희생자 신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그러나 곧 5.16이 발생해 진상은 다시 묻히고 말았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4.3에 대한 논의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북촌리에서는 1993년에 이르러서야 마을 원로회를 중심으로 4.3 희생자 조사에 나섰다. 6개월 동안 옛 지적도까지 동원한 1차 조사 결과 426명의 사망자 명단을 확인 조사했다. 그러나 1994년 2차 조사에서는 사망자 숫자가 479명으로 불어났다. 제주 4.3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 신고된 북촌리 4.3 희생자 수는 총 462명이고, 북촌리 위령비에는 443위의 희생자가 각명되어 있다. 이 숫자는 계속 유동적이다.

 

  ○ 너븐숭이 기념관 개요

  제주 4.3의 상징인 조천읍 북촌리, 학살과 강요된 침묵, 그리고 ‘울음마저도 죄가 되던’ 암울한 시대를 넘어 이제 북촌리는 진실과 화해, 평화와 상생의 새 역사로 나아가고 있다.

  정부는 이곳 ‘너븐숭이’ 일대에 국비 약 15억8천만원을 들여 위령비, 기념관, 문학기념관, 관람로 시설 등을 마련하여 후세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게 하였다. 북촌리 4.3희생자유족회에서는 이곳에서 매년 음력 12월 19일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를 엄숙하게 지내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가 절로 숙어지고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하게 무엇인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기념관의 한쪽 벽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돌판이 세 줄로 길다랗게 붙여져 있었다.

 

 

 

 

  기념관을 나오니 기념관 정문 건너편에 애기무덤이라고 쓰여 있는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낮은 돌담에 둘러싸인 올망졸망한 작은 무덤들이 여러 개가 보였다. 이곳은 북촌리 주민 학살 사건 때 어른들의 시신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곳에 안장되었으나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현재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 있는데 적어도 8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라고 한다.

  애기무덤 앞에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양영길 시인의 시가 돌판에 새겨져 있어서 이곳에서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넋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애기 돌무덤 앞에서

지은이 : 양영길

 

한라영산이 푸르게

푸르게 지켜보는 조천읍 북촌 마을

4.3사태 때 군인 한두 명 다쳤다고

마을 사람 모두 불러 모아 무차별 난사했던

총부리 서슬이 아직도 남아 있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너븐숭이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에는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누가 이 주검을 위해

한 줌 흙조차 허락하지 않았을까

누가 이 아기의 무덤에

흙 한 줌 뿌릴 시간마저 뺏아갔을까

돌무더기 속에 곱게 삭아 내렸을

그 어린 영혼

구천을 떠도는 어린 영혼 앞에

두 손을 모은다

용서를 빈다

제발 이 살아있는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빌고

또 빈다

 

 

 

 

  애기무덤 북쪽편에는 <제주4.3희생자 북촌리원혼 위령비>가 세워져 있었고 비 뒤에는 북촌리에서 희생된 원혼들의 이름을 새긴 돌판이 세워져 있었다. 돌판 뒷면에는 위령비 건수기가 새겨져 있었다.

 

 

 

 

  너븐숭이 4.3기념관을 뒤로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북촌리 바닷가 쪽을 향해 걸었다.

  바닷가 해안도로에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었다. 당시의 아이들은 차가운 총부리에 희생되어서 돌무덤 속에 누워있건만 이 아이들은 지금 이 평화의 시대에 태어나서 얼마나 행복한 아이들인가,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바닷가에 작은 돌섬이 있었다. 돌섬까지는 짧은 거리에 밀물일 때에도 건너갈 수 있도록 한 사람이 겨우 건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시멘트길이 만들어져 있어서 건너갔다.

  그곳에서는 먼저 지나왔던 서우봉이 나지막한 모습으로 바다 건너편으로 바라다보였다.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길. 바다 위에 야트막하게 누워있는 다려도의 모습을 왼편으로 보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북촌 포구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포구에는 옛 등대 역할을 하던 등명대가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북촌포구를 지나서부터는 바닷가를 벗어나 다시 마을길을 따라 안쪽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마을길을 벗어나서 일주도로를 횡단한 다음 중산간 쪽으로 농로를 따라 들어가니 북촌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동굴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철책으로 막아놓아 보호하고 있었다.

  어떤 동굴이기에 출입을 금지하며 막아놓았는가 싶어 안내판을 보니 다음과 같이 안내되어 있었다.

 

  [북촌동굴(北村洞窟)]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3호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294

  북촌동굴은 화산의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동굴로 1998년 11월 25일 농지개산 중에 발견되었다.

  동굴의 규모는 100m, 넓이 3~10m, 높이 1~2m로 동굴 내에는 용암이 굳는 과정에서 가스가 빠져나오면서 형성된 용암곡석, 동굴 바닥을 따라 용암이 흘어내리다가 멈춘 용암발톱,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용암에 의해 바닥에서 위로 자란 용암석순, 용암종유 등과 동굴 바닥을 마지막으로 흐른 용암의 표면에서 관찰되는 승상용암 구조 등의 다양한 동굴생성물과 미지형이 발달하고 있다.

  북촌동굴은 용암동굴의 형성단계를 잘 알려주기 때문에 학술적 가치가 높고 자연유산으로의 보존이 필요하다고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북촌동굴 근처에서부터는 농로를 따라가다가 숲길 또는 곶자왈 숲길로 들어갔다가 다시 농로로 나오곤 하면서 몇 번 반복하며 동복리와 김녕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농로의 갈림길에 올레 간세가 세워지고 ‘벌러진 동산’이라고 표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두 마을이 갈라지는 곳, 혹은 넓은 바위가 번개에 맞아 벌어진 곳이라고 해서 벌러진 동산이라 부른다고 했다. 나무가 우거져 있고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넓은 공터가 있으며, 아름다운 옛길이 남아있는 지역이라고 했다.

  간세가 가리키는 방향의 곶자왈 숲길을 따라 걸으니 과연 아름다운 길이었다. 길 좌우에는 곶자왈의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하고, 향기로운 숲의 향기가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하였다.

 

 

 

 

  길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바닥에 편평하면서도 용암이 흘러내린 자국으로 갈라진 바위들이 깔려있는 ‘난시빌레’라는 곳이 나왔다. ‘빌레’는 바위와 돌들이 많은 지역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난시빌레에는 용암이 흘러내린 자국이 아름다운 줄무늬를 이룬 바위들이 깔려 있었고, 바닥에 깔려있는 바위를 투과하지 못하여 고인 물들이 작은 연못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었다. 이곳 또한 학술적으로 가치 있는 곳이라 생각이 들어서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곳인 것 같았다.

 

 

 

 

  난시빌레를 지나니 김령 포구까지 농로가 계속되고 있었다.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씨 속에서 농작물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김녕 마을로 들어서니 마을 앞에 푸른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고 종점이 어느새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주도로를 횡단하여 백련사 앞을 지나 19코스의 종점인 김녕서포구 어민복지회관 앞에 도착하였다.

 

 

 

 

 

  아침 8시 30분부터 시작점인 조천 만세동산에서 걷기 시작하여 오후 2시 20분경에 도착. 18.8km를 약 6시간 동안 걸었다. 시간당 약 3.1km를 걸은 셈이다.

 

  한 코스를 완주하니 나니 다리가 뻐근하였다. 김녕 서포구 근처 백련사 앞에서 버스를 타고 차를 세워두었던 조천 만세동산으로 되돌아와서 18코스를 걸었을 때 들렀던 시인의 집 카페로 가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니 피로가 다 풀리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