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시작되는 12월의 첫째 날, 새벽이어서 그런지 공기가 쌀쌀하였다.
새벽에 서귀포의 집을 나서서 서성로와 남조로를 달려 조천 만세동산에 도착하였다. 거기가 제주올레 18코스의 종점이다. 18코스를 다 걸은 뒤에 차를 타고 집으로 바로 돌아오기 쉽게 하기 위해 그곳에 주차를 하고 만세동산 앞에서 제주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른 아침부터 제주시내로 출근하러 가는 사람들과 볼일을 보러 가는 사람들로 버스는 제법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달렸다. 새벽 공기가 쌀쌀해서 그런지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툼하였고 입에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제주시 동문로터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렸다.
동문로터리 산지천 마당에서부터 제주올레 18코스가 시작된다.
광장 소나무 아래 18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간세와 코스 지도를 붙여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18코스는 여기서부터 조천 만세동산까지로 거리는 18.8km가 된다.
코스를 자세히 안내하면 다음과 같다.
산지천 마당 - 여객터미널공원 - 사라봉 입구 - 사라봉 정상 - 애기 업은 돌 - 곤을동 - 화북 금산농로 입구 - 화북 별도포구 - 화북 별도연대 - 삼양 검은모래해변 입구 - 원당봉 입구 - 불탑사 - 신촌가는 옛길 - 신촌 농로 - 시비(詩碑)코지 - 닭모루 - 신촌포구 - 대섬 - 연북정 - 만세동산
산지천 마당은 사람들의 쉼터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운치 있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 아래 쉼팡을 만들어 놓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쉴 수 있게 하고 있었고, 시간을 정하여 뿜어져 올라오는 분수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리 난간은 역사들이 무거운 물건을 힘을 합해 들고 있는 조각을 해 놓아서 눈길을 끌고 있었다.
난간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지천이 맑은 물줄기로 흐르고 있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안내되어 있었다.
[산지천(山地川)의 유래]
산지천(山地川:일명 山底川)은 「탐라지(耽羅志)」 및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제주읍성 동쪽 1리에 있으며, 2리쯤 흘러 바다로 들어가면 건입포(健入浦)가 된다고 하였고, 「효종실록(孝宗實錄)」 등에는, 큰 태풍이 불어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냇물이 범람하여 사람과 마축이 많이 죽은 피해가 있었다고 기록되는 등 산지천은 제주성 안팎에 살았던 제주인에게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잦은 홍수로 공포의 하천이요 재원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석축다리인 홍예교(虹蜺橋)와 수구(水口)인 북수구(北水口), 남수구(南水口)와 지주암(砥柱巖), 조천석(朝天石) 등 역사의 자취가 있었던 문화유적이기도 하다.
또한 이 산지천에는 많은 샘이 있으며 수량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하류에는 은어가 많아서 나라에 진상했다고도 한다.
이 산지천은 제주시 상권의 중심 지역을 흐르는 하천으로서 1960년대 후반부터 남수각(南水閣)에서부터 용진교(勇進橋)까지 660여 미터 구간을 복개하여 상가 건물을 지어 지역경제에 이바지하여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복개 구조물의 노후로 철거하게 되면서 이 산지천을 문화와 역사의 정취가 살아 숨쉬는 옛 모습으로 되살려 도심 속의 생태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시민의 뜻을 모아 환경을 중시하는 21세기 벽두에 도시의 젖줄이 흐르는 옛 산지천으로 복원하게 되었다.
2002년 7월 제주시
산지천변을 따라 제주항 쪽으로 향했다. 겨울의 차가운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는 산지천에 해오라기, 청둥오리 등 겨울철새들이 모여서 쉬기도 하고 물고기 사냥을 하기도 하곤 하였다.
제주항은 제주와 육지부를 연결하는 해상항로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기 때문에 제주섬에서는 가장 큰 항구로 발전한 곳이다. 이곳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배들로 북적거리는 곳으로, 항구의 동쪽편 일대는 주로 여객선과 화물선 부두, 서쪽은 어선 부두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올레길은 제주항 앞길을 따라 동쪽을 향해 사라봉을 보며 나아가고 있었다.
제주항 앞 도로변의 어느 공터에는 「의녀 김만덕 객주터」도 있었고, 이 일대가 옛 건입포였음을 알려주는 안내문도 돌비에 새겨져 있었다.
건입포는 육지를 오가는 관문으로 교역과 어로활동의 중심지였다. 특히 건입포 주민들은 20여척의 중선(重船 : 돛대 2개로 운항하던 풍선(風船))을 보유, 봄이면 전북 군산, 연평도, 해주, 신의주까지 진출한 뒤 음역 10월이면 쌀과 각종 상품을 싣고 귀향했다고 한다.
건입포 안내비를 지나니 넓은 공터의 옛 주정공장 터가 나왔다.
주정공장은 일제의 경제수탈기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1940년부터 설립한 큰 공장으로 연간 14,940kl가량의 주정을 생산하던 공장이었다. 이곳에서는 제주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를 원료로 주정을 생산하여 일본 병참본부에 항공연료로 납품하고 제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자동차 연료로도 공급했다 한다. 제주도민들은 이를 술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주정공장 터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로 4.3의 비극적 현장이기도 한 곳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이곳에 세워져 있는 비문을 옮겨 놓음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옛 주정공장 터 비문]
이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 당시 수많은 제주민중들이 끌려와 감금당한 채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모진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옛 주정공장 터이다. 4.3의 와중에 목숨 부지를 위해 한라산 일대에 피신했던 주민들은 혹한의 겨울을 야산에서 견디다가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군경 토벌대의 선무작전에 따라 대부분 순순히 귀순하였다. 하지만 용공협의를 뒤집어 씌워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문도 모른 채 산지항을 통해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야 했다. 또 한국전쟁 발발 후 예비검속자들 역시 집단 수용되었다가 행방을 모르는 등 헤아리기조차 힘든 수천의 우리 부모형제들이 마지막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남아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 저 앞 바다를 보라! 예나 지금이나 일렁이는 파도는 변함없이 제주해협을 오고 가지만 반세기를 훌쩍 넘긴 오늘날까지 어떤 기별도, 한 줌 흔적도 추스르지 못한 슬픔을 가눌 길 없는 우리 유족들은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참혹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이 빗돌을 세운다.
서기 2005년 4월 1일
제주도 4.3사건희생자유족회 근립
주정공장 터를 지나니 바로 그 옆으로 작은 숲길 속 계단으로 올레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짧은 계단을 올라서니 다시 건입동의 주택지들이다. 높은 지대로 올라서니 제주항의 풍경이 눈 아래로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여객터미널 너머 방파제를 지나서 펼쳐진 겨울바다가 잔잔한 날이었다.
주택지를 지나 항구로 내려가는 큰 도로를 횡단하여 사라봉으로 향했다.
사라봉 오르는 계단 길 바로 옆에 움푹 패인 진지동굴이 하나 눈에 띈다. 제주섬 중요 오름들 곳곳에 일본군들이 파헤쳐 놓은 진지동굴이 무수히 있지만 이곳의 진지동굴은 유독 더 크고 공허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시커먼 동굴이 슬픈 눈동자를 하고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사라봉 정상부 근처에는 벚나무가 길 양옆으로 줄을 지어 있었다. 겨울이어서 이젠 잎이 다 떨어져 있었지만 봄이 되면 만개한 벚꽃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할 것만 같았다.
정상 팔각정에서는 눈 아래로 제주항이 내려다보이고 남해바다가 더욱 넓고 푸르게 눈에 들어왔다. 또 동쪽으로는 별도봉과 그 너머 앞으로 걸어갈 올레길의 들판과 마을들과 바닷가들이 모두 보였다.
팔각정 근처에는 연대가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연대 아래에 뚫려 있는 일제 진지동굴이라니……. 동굴이 뚫려 나간 방향이 조금만 연대 아래로 향했더라면 연대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긴, 동굴을 뚫어놓은 일본군들에게는 우리의 연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겠지.
사라봉을 내려오니 바로 별도봉으로 이어진다. 별도봉을 넘어가는 길은 정상으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길, 남쪽 기슭과 북쪽 기슭을 따라가는 길 등 세 가지 길이 있는데, 올레길 안내 리본과 화살표가 북쪽 기슭을 따라 가라 가리키고 있었다.
북쪽 기슭을 따라 걸어가는 길, 사람들이 많이 산책하고 운동하러 다니는 길이어서 폐타이어 고무판으로 모두 깔려 있고 난간과 쉼터, 가로등까지도 만들어 놓아 도심 가까운 좋은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었다.
걸어가는 내내 한창 건설 중인 제주항 동부두와 산지등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길이었다.
중간에 애기업개 바위가 바다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모습도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였다.
별도봉 산책로 올레길을 지나니 곤을동으로 꺾여 내려간다. 곤을동은 별도봉 동쪽과 현재의 화북1동 서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로 지금은 없어진 4.3사건 유적지이다. 4.3사건 때에 마을이 모두 불태워 없어진 곳으로 지금은 마을이 있던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었다.
[곤을동]
소재지 : 제주시 화북동 4440번지 일대
곤을동은 제주시 화북1동 서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이다. 4.3이 일어나기 전,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곤을’에는 224가구, 화북천 두 지류의 가운데 있던 ‘가운옛곤을’에는 17가구, ‘밧곤을’에는 28가구가 있었다.
곤을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때는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이었다.
1949년 1월 5일 오후 3~4께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곤을동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곤을 22가구와 가운옛곤을 17가구 모두를 불태웠다.
다음날인 1월 5일에도 군인들은 인근 화북초등학교에 가뒀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모살불’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 후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제주시 인근 해안마을이면서도 폐동돼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 된 곤을동에는 지금도 집터, 올레(집과 마을길을 연결해 주는 작은 길) 등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4.3의 아픔을 웅변해주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4.3사업소
안내판에 없었으면 버려진 황무지겠거니 하며 그냥 지나칠 법 한 곳인데, 안내판 덕분에 이곳이 과거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는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곤을동 유적지를 지나 화북천을 건너 화북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 비석거리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마을의 역사와 선각자들, 기릴 만한 분들의 치적을 기념하는 비석들이 많이 세워져 있어서 화북 마을이 역사가 오래 된 마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화북 마을 서쪽편 바닷가로 올레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닷가 올레길을 걷고 있노라니 제주에서도 몇 군데 밖에 찾아보기 어려운 해녀콩이 자라고 있는 곳으 발견하였다. 마침 콩깍지가 제법 튼실하게 여물어 있었다.
화북포구에 다다랐다. 화북포구는 조선시대에는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 역할을 했던 포구 중의 하나로 역사가 오래 된 포구이다.
제주교육대학교에 다니던 대학생 시절에 나는 한 해 동안 이곳 화북 마을에서 자취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가끔 이곳 화북포구까지 산책을 나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기억으로는 화북포구가 작은 포구였던 것 같았는데 올레길을 걸으면서 다시 보게 되는 화북포구는 어촌 포구치고는 상당히 큰 포구로 변해 있었다. 물론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의 옛 포구에서 더 바깥쪽으로 넓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작은 농어촌마을이었던 화북 마을이 지금은 매우 큰 마을로 발전이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화북포구를 지나니 바로 화북진성이다.
화북진성은 조선시대에 군인들이 주둔하던 진으로 육지와 제주섬을 오가던 중요한 포구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아마도 진을 설치하고 군인들이 주둔지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화북진성을 지나서 이번에는 해안변에 만들어진 환해장성과 화북연대로 갔다. 이들 역시 화북진성과 더불어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거나 살펴보기 위해 일찍이 만들어 놓은 시설들이다.
화북 마을을 지나 농로를 지나서 삼양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초입의 작은 포구를 지나서 별랑포구 쪽으로 가는 길의 별랑 마을 어느 집 벽에 담쟁이덩굴이 너무나 곱게 물들어 있어서 한 컷 찍었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울 만큼 색깔이 고와서 여기 올려서 이 블로그를 보는 사람들과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다.
별랑포구에 다라랐다. 별랑포구는 삼양동의 포구 중의 하나로 이곳에는 새각시물이라고 하여 옛날에 식수와 빨래터로 사용하던 곳이 소개되어 있었다. 별랑포구에서부터 해안도로가 계속 이어져 있었다. 별랑포구 바로 옆에는 원담의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다른 곳에서도 잘 찾아볼 수 없는 옛 어로의 흔적이어서 잘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니 이내 나타나는 곳은 삼양검은모래해변이다. 다른 해수욕장의 누런 모래와는 달리 이곳 해수욕장의 모래는 검은 모래로 이루어져서 모래찜질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한다. 이날 따라 파도가 센데다 밀물이어서 검은 모래 해변 대부분이 물이 많이 올라와 해변의 정취를 느끼는 데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검은모래해변을 지나서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라가다가 다시 마을 안길로 들어서서 길은 원당봉으로 향했다.
원당봉은 삼양 마을 동쪽에 있는 오름으로, 불탑사, 원당사, 문강사 등 유서 깊은 사찰들이 자리 잡고 있는 오름이다. 봉우리 일곱 개(원당봉, 알오름, 망오름, 편안오름, 도산오름, 동부나기, 서부나기로 원당칠봉이라 부름), 사찰 세 곳, 굼부리 안에 자리한 연못, 5층석탑 등 원당봉은 볼거리가 많은 오름이다. 특히 불탑사 경내에 있는 오층석탑은 보물 제118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무들이 우거져서 시원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름 문강사로 가는 오른쪽 길과 불탑사와 원강사가 있는 쪽으로 가는 왼쪽 길로 갈라지게 된다. 올레길은 왼쪽 길로 가도록 안내가 되고 있었다.
불탑사 경내로 들어섰다. 불탑사는 고려 충렬왕 26년에 창건된 매우 오래 된 사찰이다. 처음의 이름은 원당사였으나 조선 숙종 28년에 절이 없어지고 오층석탑만 남아 있다가 1914년에 다시 중건하여 불탑사라 개칭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현재 원당사라는 이름의 사찰은 불탑사 앞에 다른 사찰로 존재하고 있다.
불탑사 오층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오층의 탑신을 형성한 일반형 석탑으로 이곳에 처음 원당사라는 이름으로 사찰이 창건될 때에 함께 만들어졌던 탑이다. 원래의 사찰은 앞의 설명처럼 3번에 걸친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오층석탑만큼은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도 남아서 잘 보존되고 있다.
불탑사를 지나서 신촌가는 옛길을 따라 신촌으로 향했다. 이 길은 삼양에 사는 사람들이 이웃 마을인 신촌 마을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제삿밥을 먹기 위해 오갔던 길이라고 한다.
옛길을 따라가다가 올레길은 다시 바닷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바닷가로 가니 바위 위에 시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누구의 시비인가 다가가 보았더니 내가 알고 있는 시인의 시비다. 성산포에 살고 있는 바다의 시인 채바다 시인의 것이다. 채바다 시인은 천상 바다의 시인이다. 이름에도 바다가 들어있고, 바다를 좋아해서 바다에 대한 시를 많이 써서 시에도 바다가 들어있고, 시비도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어서 이곳을 시비코지라 부른다고 했다.
시비코지를 지나서 바닷가 기정길을 따라 닭머루로 향했다.
닭머루는 닭의 머리처럼 독특하게 생긴 바위에 붙여진 이름으로, 바닷가로 툭 튀어나온 바위 모습이 닭이 흙을 걷어내고 들어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닭머르 위에는 정자가 하나 만들어져 있어서 이곳에서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게 하고 있었다.
닭머르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다가 다시 길을 가노라니 신촌 포구에 도착하였다.
신촌 포구에는 특이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치 다리였다. 방파제의 두 끝을 이어서 아치형 다리를 만들어 놓아 사람들은 이쪽 방파제에서 저쪽 방파제로 건너갈 수 있도록 하고, 배들은 아치 다리 밑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운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나도 아치 다리를 건너 올레길을 걸었다.
이어서 신촌 마을과 조천 마을 사이에 있는 대섬이라는 곳으로 올레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섬은 조천 마을과 신촌 마을 경계에 있는 섬으로 점성이 낮아 넓은 지역으로 퍼지면서 흘러내린 용암류(파호이호이용암류)가 표면만 살짝 굳어져 평평하게 만들어진 지형이 특징인 곳으로 제주도 내에서는 지질할 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대섬은 섬이긴 하지만 육지와 거의 붙어 있고, 섬으로 연결된 길은 거의 육지의 연장인 것처럼 되어 있어서 언듯 보면 섬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섬과 육지 사이에는 작은 호수와 같은 부분들도 형성되어 있어서 갈대와 해안 습지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철새들이 많이 모여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섬의 다른 쪽 편에서 조천 마을 바닷가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 있어서 건너가니 바로 조천 마을이다.
이어서 조천초등학교 뒤편 해안변 마을길을 걷고 있노라니 조천초등학교 후문 앞에「시인의 집」이라는 작은 간판이 눈에 띄어서 살펴보았더니 찻집이었다. 오래 걸어서 피곤하기도 하고 커피 생각도 간절하던 차에 찻집 이름이 정겨워 거기로 들어갔다.
차 한 잔을 주문하고 앉아서 탁자를 살펴보니 시집과 중학교 국어 교과서가 놓여 있었다.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기도 하였기에 펼쳐서 살펴보았다. 시집은 손세실리아 시인의 시집이었고,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손세실리아 시인의 시가 실려 있었다. 시집 속의 시인의 사진을 보았던 찻집을 운영하는 여자분의 얼굴이었다.
문단의 동료를 만난 반가운 마음에 손세실리아 시인과 인사를 나누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 시인이 만들어 준 따뜻한 차를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어지는 곳은 연북정.
안내판에는 아래와 같이 연북정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었다.
[연북정(戀北亭)]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호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연북정은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1590년(선조 23년) 당시의 조천관을 중창하여 쌍벽정(雙璧亭)이라 칭하였다가 1599년(선조 32)에 다시 건물을 고쳐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하였다.
건물은 네모꼴에 가깝고 높이 14자(尺)의 축대 위에 동남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축대의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이 둘러 쌓여 있다. 이곳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연북정은 망루(望樓)의 용도로 지어졌을 듯싶다.
연북정에 올라 이곳에서 먼 북쪽 서울을 향해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옛 선인들의 모습을 그리며 한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연북정에서부터 조천 마을 안길을 얼마 가지 않아 이내 18코스의 종점인 만세동산에 도착하였다.
만세동산은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곳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었다. 이곳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탑, 기념비, 전시관 등으로 조성한 공원으로, 이에 대하여는 19코스를 걸었던 기록을 쓸 때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18.8km의 18코스를 다 걸으니 아침 7시 20분경부터 걷기 시작하여 오후 2시 20분경까지 7시간이 걸렸다. 물론 중간에 쉬어가기도 하고, 점심도 먹고, 시인의 집에서 머물러 오랜 시간 차를 마시고 하는 등 쉬었던 시간을 빼면 꾸준히 걸었을 경우 거의 5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차를 이곳에 두고 출발지점으로 가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도착하여 바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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