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가운데인 1월 중순의 어느 날, 제주올레 9코스를 다시 걸었다.
4년 전쯤인가, 9코스를 걸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확산되어서 비상이 걸렸던 때였을 것이다. 그 시절에 9코스를 걸었는데, 몰질로 올라가서 박수 기정을 따라 만들어졌던 올레길이 구제역 때문에 목장 지역 근처를 지나는 원래의 올레길이 차단되어서 안덕계곡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올라갔다가 감산 마을과 화순 마을 사이의 내려가도록 하여 거기로 갔던 적이 잇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에 가보지 못했던 길로 제 코스로 가보려고 길을 나섰다.
제주올레 8코스는 26개의 올레 코스 중 10-1코스인 가파도 올레길 다음으로 가장 짧은 길이로 7.1km가 되는 길이다. 그러나 거리는 짧은 길인데도 정말 볼 것이 많고, 바다와 오름과 절벽과 계곡, 마을 등을 골고루 지나고, 역사 유적들도 살펴보면서 갈 수 있는 멋진 길이다.
대평포구에서 시작하여 화순 금모래해변까지 걷는 길로 코스는 아래와 같다.
대평포구 → 몰질(0.3km) → 박수기정 → 볼래낭길(2.1km) → 봉수대 → 월라봉(3.1km) → 임금내 전망대(4.1km) → 자귀나무숲길(5.1km)) → 안덕계곡 → 황개천(5.8km) → 동화동 폭낭 → 화순 선주협회 사무실 → 해양경찰서 → 화순금모래해변(7.1km)
대평포구의 9코스 시작 안내판이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포구와 바다를 보며 출발하였다.
포구를 뒤로 하고 파란 바닷물이 잔잔히 찰싹거리며 크고 작은 자갈들을 쓰다듬고 있는 바닷가를 옆에 끼고 몰질로 들어섰다.
몰질은 “말이 다니는 길”을 뜻하는 제주말로, 이 길은 옛날 대평 마을과 화순 마을 사이를 말을 타고 오고가던 길이어서 붙인 이름인 듯하다. 지형으로 봐서 대평 마을에서 화순 마을로 가려면 월라봉과 군뫼 사이의 작은 길을 꼬불꼬불 올라서 감산 마을로 갔다가 다시 화순 마을로 내려갈 수도 있으나, 다래오름 아래의 기정(절벽 위에 만들어진 길)으로 간 다음 황개천 하류를 거쳐 가는 길이 가장 짧은 길이어서 이 길을 만들어 말을 타고, 혹은 말에 짐을 실어 끌고 다녔을 것이다.
몰질을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심한 길로 왼쪽으로는 높은 절벽을 올려다보고 오른쪽으로는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며 올라가는 길이었다.
몰질을 올라가는 중간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한숨이 나오게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고란초과의 식물인 석위가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는 곳에서 한 부분이 크게 훼손되어 있는 것이었다. 자연적인 훼손이 아닌 누군가에 의한 인위적인 훼손이었다. 내가 한 행위는 아니지만 나와 생김새가 같은 몰지각한 인간의 행위로 인한 자연의 훼손에 자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훼손된 부분이 어서 빨리 회복되어 훼손된 부분이 다시 석위로 덮여 더 아름답게 자라기를 간절히 빌었다.
몰질을 다 올라가서 한밭소낭길을 따라 걸었다.
한밭소낭길이라는 말은 “큰 밭의 소나무 사잇길”이라는 말이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몰질은 경사가 심한 길이었지만 기정 위로 올라섰을 때는 월라봉 남쪽으로 넓은 평지였다.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사잇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기정길에서는 바다가 눈 아래로 바로 내려다보이고 9코스의 시작인 대평포구도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해 보여주고 있었다. 절벽 위의 소나무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푸른 바다가 햇살을 받아 너무나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기정길 중간의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송악산과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는 파란 도화지 위에 그린 산수화였다.
기정길이 끝나고 볼래낭길로 접어들면서 길은 북쪽으로 향했다.
볼래낭은 보리수나무를 뜻하는 제주말인데, 길의 이름 그대로 이 길에는 큰보리장나무와 보리밥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볼래낭길의 중간에는 옛 봉수대가 작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 봉수대는 서쪽으로 산방산 아래의 산방연대와 교신했던 봉수대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봉수대 근처에서는 일본군 진지동굴도 찾아볼 수 있어서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의 왜적 감시릉 위한 봉수대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의 흔적인 진지동굴을 한 군데서 모두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볼래낭길을 지난 길은 화순 마을과 산방산과 바다를 왼편으로 바라보며 다래오름(월라봉)으로 올라가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큰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절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다래오름으로 올랐다.
올레길을 따라 걷던 것을 잠시 멈추고 다래오름 정상쪽으로 올라갔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 나무계단이 놓여져 있어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정상부는 편평하였으며, 나무 벤치와 운동기구들이 설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상부에서도 일제진지동굴이 파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정상부에서는 서쪽 부분의 전망이 훤히 바라보여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정상에서 내려와 다시 올레길을 따라 걸었다.
다래오름 정상부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올레길에는 진지동굴 7개를 연달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첫 번째 진지동굴 근처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안덕 월라봉 일제 동굴진지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안덕면 감산리 1148번지 일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일본 제국주의는 ‘결7호작전’이라는 군사작전으로 제주도를 결사항전의 군사기지로 삼았다.
일본군은 미군 상륙의 가능성이 많은 곳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해안특공기지를 설치해 포대 및 토치카 벙커 등을 설치하였는데 월라봉 동굴진지는 바로 화순항으로 상륙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구축한 군사시설이다.
월라봉의 북사면 상단부에 모두 7개의 동굴이 확인되며 주 진지동굴은 관통형으로 폭 4m, 높이 4m, 길이는 약 80m에 달하는 대형 공동의 진지동굴오 직선형이다. 출구를 여러 방향으로 내어 유사시 다른 통로를 통해 대피할 수 있게 하였다. 내부에 발생한 연기를 밖으로 배출하기 위해 경사면과 수직으로 천정으로 구멍을 뚫어 놓기도 하였으며 해안과 공중에서 침투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토치카도 구축되어 있다.
월라봉 진지동굴은 제주 서부지역 일대의 전쟁 유적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로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훈을 되새겨주는 역사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2011년 11월 11일
안덕면, 안덕면주민자치위원회]
진지동굴을 지난 길은 다래오름 북서사면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다래오름을 다 내려온 곳에서 창고천을 만나고 그 다음부터는 창고천을 따라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창고천은 때론 얕게 때론 깊게 계곡을 이루면서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또한 냇물도 흐르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끊어졌다가 하면서 그래도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는 시내였다.
좁은 물줄기로 흐르던 창고천의 물은 하류에 와서는 넓게 퍼지면서 물의 양도 많아졌다. 창고천의 하류 부분은 황개천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곳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가끔 누런 물개라 나타나 울었다고 해서 황개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황개천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서 화순선사마을유적공원에 이르렀다.
화순선사마을유적공원은 한국남부발전(주)이 남제주화력 3,4호기 건설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발굴조사 결과 이 지역은 탐라형성기에 축조된 서남부 지역 최대의 거점마을유적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곳에 화순리 선사유적공원이 조성되었으며 발굴조사된 내용을 이전, 복원하고 전시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로는 송국리형 움집터 137동, 굴립주건물지 3동, 각종 수형유구 277기, 매납유구 2기, 소토유구 18기, 집석유구 2기, 옹관묘 3기 등 총 439기 이상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전시된 유적과 유물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9코스 종점인 화순금모래해변에 도착하였다.
9코스를 다 걷고 다시 대평포구로 돌아오는 길.
택시를 타고 대평포구로 갈까 하다가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길을 가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다시 황개천으로 돌아간 다음 황개천을 건너 대평과 화순 사이의 기정 절벽 아래 바닷가 바위를 타넘으며 대평포구를 향해 걸었다. 길이 만들어져 있는 곳이 아니어서 바위를 타 넘으며, 때론 바닷물에 하반신을 온통 잠그며 힘든 걸음을 옮겨 대평포구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기정 아래를 지나면서 찍은 사진들 몇 컷을 소개하면서 9코스를 걸은 기록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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