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09년 8월 24일부터 26일까지 우리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뭍 나들이를 하고 왔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뭍(육지)으로의 나들이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다가 차를 가지고 가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마침 이번 여름방학에는 함께 근무하고 있는 선생님들과 함께 뭍으로 나들이를 할 계획을 미리 세워놓고 추진하던 중 바캉스 계절이 끝나가는 무렵인 8월 말 경으로 날을 잡아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24일 아침 제주공항에서 만나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와 섬을 바라보고, 신문도 잠시 뒤적이다보니 어느새 부산 김해공항이다.
김해공항에서는 미리 예약해 놓은 렌트카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네비게이션에 의지해서 첫 번째 목적지인 거제도로 향했다. 김해공항에서 이리저리 빠져나가 남해고속도로로 들어서서 거제도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아차 하는 순간 창원 IC에서 거제도 쪽이 아닌 대구 쪽 방향으로 연결된 북창원 방향으로 들어서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북창원 IC에서 빠져나와 마산 시내를 거치고 고성군을 거쳐서 가는 국도를 따라 차를 몰았다.
고성에 이르러서야 진주 통영 간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거제도로 갈 수 있었다.
거제도 학동마을에 있는 숙소에 짐을 내린 일행들은 곧장 바람의 언덕 앞에 있는 도장포 유람선 선착장으로 차를 달렸다.
우리 일행을 태운 유람선은 푸른 바다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해금강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런데 해금강이란 말만으로도 잔뜩 기대를 하고 갔었는데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뭐야? 겨우 이게 해금강이란 말이야?”
“우리 서귀포 유람선을 타고 문섬과 범섬을 거쳐 외돌개를 구경하는 것이 이것보다 낫겠다.”
우리 일행들의 입에서 실망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다 위에 제법 멋있게 솟아있는 바위들로 둘러싸인 섬 하나를 돌아오는 것이 해금강을 구경하는 코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코스 말고도 한산도 쪽으로 가면 더 아름다운 바다와 섬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다음에는 한산도 쪽으로 가 보리라 마음먹었다.
유람선은 해금강을 구경하고 다음에 외도(外島)로 우리 일행을 데려갔다. 외도는 전부터 꽃섬으로 유명하다기에 한 번 가보리라 기대했던 곳이었는데 역시 여름 꽃들이 온 섬을 가득 덮어 섬이 꽃빛으로 환하였다.
그러나 그곳도 사람의 손길이 너무 많이 간 듯한 느낌이 들어 좀 더 자연미가 풍기는 상태로 가꿀 수는 없을까 하는 조그만 아쉬움이 남기도 하였다.
하여간, 섬에 도착하여,
언덕을 오르고……,
꽃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고……,
온갖 경치를 구경하면서 다니다 보니 어느 새 시간이 훌쩍 지나 다시 배를 타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해금강과 외도를 구경하고 돌아온 우리들은 학동 마을 앞 몽돌해변에 잠시 앉아 저물어가는 거제도의 저녁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신이 난 여선생님들은 물수제비를 뜨고,
우리 곁에서 어느 다정한 연인 한 쌍은 가위바위보를 하여 진 사람이 한 발씩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재미있는 놀이도 하여 앉아 구경하는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둘째 날은 거제도의 서쪽 해안 도로를 따라 경치를 구경하며 거제대교를 지났다.
이어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에서는 송광사와 낙안읍성을 들르기로 하여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오래 차를 몰았다.
송광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스피커에서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가 낭랑한 목소리로 낭송되고 있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또 무슨 시인지는 지금은 기억에 없지만…….
송광사(松廣寺)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에 있는 절로 한국의 삼보 사찰 가운데 승보사찰로서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사는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길상(吉祥)이라 하였으며, 고려 인종 때에 보조국사 지눌이 대찰로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뒤 한동안 폐사 상태였는데, 뒤에 복원하고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삼존불, 지장보살상, 금기, 대종 및 기타 보물과 《화엄경(華嚴經)》 장판(藏板) 약간만을 건졌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였으나 1948년의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그 후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고, 이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었다.(naver 백과사전에서 발췌)
다음에 간 곳은 송광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낙안읍성이다. 낙안읍성은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東內里)·서내리·남내리에 걸쳐 있는 조선시대 성곽 유적으로, 넓은 분지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좌우와 뒤편이 산으로 둘려있었고, 앞으로는 탁 트여 있어 보금자리 안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형태였다.
성 안에는 1536년(중종 31)에 지은 객사가 온전히 남아 있고, 대성전 등 9채나 되는 향교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장군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낙안읍의 현령으로 있을 때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도 남아 있었다.
읍성 안의 가운데 큰 버드나무 근처의 저자에서 점심을 먹고 읍성의 여기 저기를 둘러보았다. 현청과 기타 건물들이 옛 모습을 유지하며 그대로 보존이 잘 되고 있었다. 후문 쪽에서 읍성의 성곽에 올라 성곽 위를 따라 정문 쪽으로 오며 둘러보는 경치 또한 일품이었다.
낙안읍성에서 나온 우리들은 해남 땅끝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도중에 다산초당 안내판이 눈에 들어와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다산초당에 마악 도착했을 때의 시간이 마침 오후 5시가 거의 되고 있었다. 이 날 이 시간은 우리 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가 발사되는 시간이었다.
우리들은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에서 나로도가 얼마 멀지 않으니 나로호가 발사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해도 발사 구름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휴대폰 DNB를 켜서 보는 한편 나로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DNB 뉴스 중계로 나로호가 발사되는 순간을 감격적으로 보고 나서 잠시 나로도 방향을 보고 있었는데, 몇 초 후 제트기 구름 같은 하얀 구름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쭈-욱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난 얼른 카메라 셔터를 눌러 발사 구름을 렌즈에 담았다.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감격이 얼마 후 보도되는 뉴스에서 나로호가 발사된 후에 실패로 끝났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실망이 컸는지 모른다.
다산기념관을 둘러보고 그 뒤에 한참 가야 하는 곳에 있는 다산초당까지 가 보려 했지만 길어 멀고 갈 길이 바빠 중간에 되돌아와버렸다.
다산초당은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있으며, 다산 정약용이 약 10년간 머문 곳이다.
정약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된다. 장기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지는데, 황사영이 다산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다시 유배지를 바꿔 강진으로 유배된다. 이때 <자산어보>를 남긴 그의 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된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강진 생활은 정약용 개인에게 있어서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실학을 집대성하여 후세에 그 업적을 남긴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본래 초가였던 다산초당은 1936년에 무너져 없어졌는데, 1957년 해남 윤씨의 도움을 받아 정다산유적보존회가 복원하면서 지붕을 기와로 덮었다. 해남 윤씨는 다산의 외가인데, 선비화가 윤두서의 손녀가 바로 다산의 어머니이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강진에 머물면서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했던 곳이며, 서암은 제자들이 머물던 곳, 동암은 다산이 초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을 집필한 곳이다.
1818년, 다산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이곳을 떠난다. 그 해는 바로 목민심서가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그를 우리는 조선 후기 실학(實學)의 대가로 기억한다. (naver 백과사전에서 발췌)
다시 저물어가는 해를 가슴으로 안으며 땅끝마을로 향했다. 중간에 바다에 비추는 석양을 렌즈에 담다가 땅끝마을에 도착한 것이 어두워질 무렵.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몸을 쉬었다.
다음날은 갈두산 땅끝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빛을 기다리며 전망대에서 기다리길 한참. 동쪽 하늘 저편 바다 건너 산위로 아침 해가 붉은 머리를 내밀었다. 그날의 붉고 둥근 아침 해가 여느 날의 아침 해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원래는 진도로 여정을 잡으려 했었지만 코스를 바꿔 두륜산과 대흥사를 구경하기로 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먼저 두륜산 아래 자리잡은 대흥사로 갔다.
대흥사는 대둔사라고도 하는데,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이다. 이 절은 426년 신라의 승려 정관(淨觀)이 창건한 만일암(挽日庵)이라고도 하고, 또 544년(진흥왕 5)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508년(무열왕 8)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승이 중창(重創)했다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확인할 길이 없다. 그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사찰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거느린 승군(僧軍)의 총본영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naver 백과사전에서 발췌)
대흥사를 휘돌아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두륜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두륜산은 해남군 삼산면 남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703m이며, 주봉은 두륜봉이라고 한다.
소백산맥의 남단인 해남반도에 우뚝 솟아 있어, 정상에 서면 멀리 완도와 진도를 비롯하여 다도해의 작은 섬들이 바라다 보인다.
특히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동백나무 숲과 붉게 타오르는 동백꽃, 2㎞에 이르는 계곡이 장관이다. 또 가을이면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에 넓은 억새밭이 펼쳐진다. 대둔산 자락의 왕벚나무자생지는 천연기념물 173호로 지정되었다. (naver 백과사전에서 발췌)
두륜산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방으로 바라보이는 해남 땅과, 다도해의 푸른 바다와 그 위에 점점이 앉아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내려다보고 두륜산을 내려와 해남읍으로 향했다.
거기서 전라도 한정식으로 점심을 한 우리는 광주공항에 도착할 시간을 계산하여 시간이 조금 남자, 해남읍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현산면 구시리에 있는 윤선도 유적지로 갔다.
윤선도 유적지는 조선시대 학자인 윤선도가 기거하던 유적지로 사적 제432호로 보호되고 있는 곳이었다.
8세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에서 자란 윤선도는 정치적인 부침을 심하게 겪었는데,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이 유적은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윤선도의 창작산실 역할뿐 아니라 옛 성의 형태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다.
윤선도 유적지를 뒤로 하고 차를 달려 광주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