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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을 찾아서/제주시 동부권의 오름들

4․3의 아픔을 간직한 오름 다랑쉬

다랑쉬오름의 위치

다랑쉬오름은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지경의 오름으로, 지경은 세화리에 속해 있으나, 세화리 마을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중산간에 위치해 있어서 오히려 송당리 마을에 가까이 있는 오름이다.

다랑쉬는 구좌읍 송당 마을과 성산읍 수산 마을 사이의 중산간동로를 달리면서 도로 동쪽으로 높이 솟아 바라보이는 오름으로, 이 근처의 오름들 중에는 높은오름과 더불어 가장 높고 위용이 빼어난 오름이다. 오름의 비고가 227미터로 상당히 높은 편이며, 굼부리의 둘레도 1,500미터나 되고, 정상에서부터 굼부리 아래까지의 수직 높이는 백록담의 깊이와 같은 115미터라고 하니 상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오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오름의 높이가 높은 만큼 경사가 매우 심한 편이어서 여느 오름보다도 올라가는데 힘이 많이 소모되는 오름이다.

 

이 오름의 정상부 시점으로 남동쪽 방향 직선거리 1.3km 지점에는 43사건 때의 비극의 현장인 다랑쉬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많은 유골이 발굴되기도 하여 가까운 시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이름의 유래

다랑쉬라는 이름은 산봉우리가 달처럼 둥글어서 높은 봉우리를 의미하는 고구려어의 , 과 봉우리를 뜻하는 수리가 합쳐진 말인 도랑쉬, 돌랑쉬, 달랑쉬가 변형되어 다랑쉬가 되었다고 하며, 한자 표기인 월랑봉(月郞峰)’은 다랑쉬의 이두식 표기라고 한다. 또한 다른 한자 표기로는 대랑수악(大郞秀岳)’, ‘대랑봉(大郞峰)’, ‘월랑수산(月郞秀山)’, ‘월랑수(月郞岫)’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다랑쉬오름을 찾아가는 길

첫째, 구좌읍 송당리와 성산읍 수산리 사이를 연결하는 중산간동로의 손자봉 교차로 삼거리(손지오름 북쪽)에서 용눈이오름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40m를 가면 곧바로 북쪽으로 이어지는 소로인 다랑쉬로로 꺾어들게 된다. 다랑쉬로를 따라 약 1.8km를 가면 다랑쉬오름 등반로 입구 주차장에 이른다.

 

둘째, 송당 마을의 송당초등학교 앞에서부터 성산읍 수산리 방향으로 중산간동로를 따라 약 780m를 가면 세송로가 시작되는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세송로로 꺾어들어 약 4km를 가면 세송로와 다랑쉬북로가 만나는 사거리 로터리에 이른다. 이 로터리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꺾어 다랑쉬북로를 따라 다시 약 780m를 가면 다랑쉬북로와 다랑쉬로가 만나는 사거리 로터리에 이른다. 이번에는 이 로터리에서 남서쪽으로 꺾어들어 다랑쉬로를 따라 약 1.3km를 가면 다랑쉬오름 등반로 입구 주차장에 이른다.

 

셋째, 구좌읍 세화리 마을의 동녘도서관 동쪽 세회리 교차로 사거리에서부터 출발하여 남서쪽 방향으로 충림로를 따라 약 6.1km를 가면 다랑쉬오름 등반로 입구 주차장에 이른다.

 

오름을 오르며

아내와 큰아들과 함께 다랑쉬오름을 등반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남조로를 따라 달리다가 교래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꺾어들어 교래 마을과 산굼부리 앞을 지나고 번영로의 대천동 사거리를 지난 다음 삼나무숲이 길 양쪽으로 멋있게 서 있는 비자림로를 달려 송당 마을 쪽으로 향했다. 송당 마을을 지난 다음에는 중산간도로를 따라 성산읍 수산리 쪽으로 달리다가 용눈이오름 못미처에 있는 삼거리에 이르러서 다랑쉬로 향해 나 있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 1.8km를 꼬불꼬불 달려 다랑쉬오름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오름 동쪽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반을 준비하였다.

등반객들이 여느 오름보다 많이 찾는 오름이어서 그런지 등반로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차장 동쪽에는 아끈다랑쉬가 있는데, 그리 작지 않은 오름인데도 마주 보고 있는 다랑쉬가 워낙 큰 오름이어서 아끈다랑쉬는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보였다.

 

다랑쉬 등반로 입구에는 오름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안내되어 있었다.

 

[다랑쉬오름(月郞峰)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산6번지 일대

다랑쉬오름은 구좌읍 세화리 산6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부지역의 오름들 중에서 비고가 가장 높은 오름이다. 오름 밑지름이 1,013m에 이르고 전체 둘레가 3,391m나 되며 오름 위에는 깔때기 모양의 넓고 깊게 파인 굼부리가 있는데, 바깥둘레가 1,500여 미터이고 깊이가 백록담과 비슷한 115m에 달한다. 오름의 외형은 둥글면서 몹시 가파른 비탈을 이루고 있고 삼나무, 편백나무, 해송 들이 조림되어 있으며 정상부에는 억새, 절굿대, 가시쑥부쟁이 등이 자라고 있다. 오름의 남쪽에는 43사건으로 사라진 다랑쉬마을(月郞洞)’43 희생자인 유골 11구가 발견된 다랑쉬굴이 있다. 산봉우리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ᄃᆞ랑쉬라고도 부른다.]

 

등반로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등반로는 처음에는 나무계단으로 놓여져 있다가 조금 올라간 지점부터는 폐타이어길로 만들어져 있었고, 폐타이어길 위에 굵은 밧줄을 가로로 붙여 미끄러짐을 방지하고 있었다.

등반로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아래에서부터 굼부리가 보이는 능선 위까지 직선으로 곧장 올라가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갈짓자() 모양으로 지그재그로 만들어져 있었다.

전에 직선으로 만들어져 있었을 때 몇 번 올 때는 정말 힘들게 올라갔었는데, 갈짓자로 만들어진 지금은 그 때보다 올라가기가 훨씬 수월하였다.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 오름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 아래 아끈다랑쉬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윤드리, 멀미, 지미봉, 큰왕메, 큰물메, 일출봉들이 보였다. 그리고 파란 바다 너머로는 우도가 한가롭게 되새김질을 하는 소처럼 바다 위에 누워 있었다.

 

능선 위로 오르니 능선 안쪽으로는 깊은 굼부리가 패여 있었고, 바깥쪽으로는 방금 올라온 등반로 아래로 주차장과 아끈다랑쉬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였다.

 

능선 길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갔다.

227미터라는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오름에서는 그 높이가 상당하여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오래 걸리고 힘이 많이 들었다.

 

정상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올라오느라고 흘린 땀을 다 식혀 주었다. 사방을 조망하니 이보다 더 시원하게 조망될 수 없을 만큼 사방의 모든 것이 조망되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굼부리는 눈으로 얼추 보기에도 상당한 깊이였다.

다랑쉬오름의 굼부리는 지질학상으로는 분석구라고 하는데, 분석구란 전문적인 용어를 빌어서 설명하면 스트롬볼리형 분출에 의해 분출된 분석, 화산탄 등이 화구 주위에 쌓여 형성된 산체로, 구성암석이 단일 성분이며 넓은 화산지대에 독립한 산체들을 이루고 있다. 제주도에 분포하는 오름의 대부분이 분석구에 해당하며 원형, 말굽형, 원추형, 복합형 등의 분화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정상에 있는 산화경방초소 옆에서 가을 햇빛을 받으며 가지고 간 간식과 물을 산바람에 버물려 먹었다. 어느 때보다도 더 맛이 있었다.

 

잠시 쉬고 능선의 서쪽에서 다시 남쪽으로 굼부리를 빙 돌아 처음 올라왔던 동쪽 능선으로 왔다.

 

한 바퀴 도는 동안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굼부리의 모습과 정상부의 모습들이 모두 다 웅장하게, 경이롭게 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굼부리를 도는 동안 절굿대와 꽃며느리밥풀, 산비장이 등이 보여서 머물러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꽃과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등반로를 따라 내려오는 길.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내려오며 여기서 보이는 꽃들과도 섭섭지 않게 대화를 나누었다.

 

내려오면서 바라보니 남동쪽 방향으로 4.3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다랑쉬굴이 있는 유적지 근처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위치 :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지경

굼부리 형태 : 원형

해발높이 382.4m, 자체높이 227m, 둘레 3,391m, 면적 800,463

 

 

오름 지도

 

다랑쉬오름을 떠올릴 때면 항상 같이 떠올리는 것은 이 오름 기슭에서 있었던 4.3의 비극이다. 그래서 얼마 전에 다랑쉬굴 유적을 찾아갔던 일이 있어서 그 기록을 여기에 함께 옮겨 놓는다.

 

다랑쉬굴 유적으로 가는 길은 다랑쉬오름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약 530m를 가면 길가의 팽나무 아래에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에서 약 40m를 다시 남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향하는 작은 길이 있으며, 그 길을 따라 약 300m를 가면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부터 안내되어 있는 화살표를 따라가면 다랑쉬굴 유적지에 이를 수 있다.

 

다랑쉬굴 유적 입구로 가는 근처의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안내되어 있었다.

 

[여기는 194811월 경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북제주군 구좌읍 다랑쉬 마을터이다. 다랑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마을의 북사면을 차지하고 앉아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다랑쉬오름(월랑봉, 높이 392m)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다랑쉬라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정겹다. 주민들은 산디(밭벼) , 메밀, 조 등을 일구거나 우마를 키우며 살았다. 소개되어 폐촌될 무렵 이 곳에는 10여 가호 40여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지금도 팽나무를 중심으로 연못터가 여러 군데 남아 있고 집터 주변에는 대나무들이 무더기져 자라 당시 인가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이 마을은 19924월 팽나무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다랑쉬 굴에서 11구의 시신이 발굴되면서 도민들에게 4.3의 아픔을 다시 한 번 새겨주었다. 당시 시신 중에는 아이 1명과 여성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4.3의 참화를 피해 숨어 다니던 부근 해안마을 사람들로 19491218일 희생되었다. 지금도 그들이 사용했던 솥, 항아리, 사발 등 생활도구들은 굴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43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상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조금 남쪽에서 동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다랑쉬굴로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화살표로 길을 안내하는 대로 2~3분 정도 따라 들어가니 지형이 주변 평지보다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다랑쉬굴 입구가 있었다.

 

 

다랑쉬굴 입구에도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안내되어 있었다.

 

[제주 4.3유적지(다랑쉬굴)

위치 :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2608번지 일대

 

19481218,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굴이 발각되어 집단희생 당한 곳이다. 이 날 군경민 합동 토벌대는 수류탄 등을 굴속에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나가도 죽을 것을 우려한 주민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어 굴 입구를 봉쇄했고, 굴속의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되어 죽어갔다. 유족들은 민보단원들로부터 가족들의 희생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당시의 상황은 시체를 수습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곳 다랑쉬굴은 잃어버린 마을을 조사하던 제주4.3연구소회원들에 의해 199112월에 발견되어 199241일 공개했으며, 11구의 희생자 유해는 45일 만인 515일 한줌의 재로 변해 바다에 뿌려졌다. 다랑쉬굴은 유해들이 밖으로 꺼내진 뒤, 나머지 유물들을 그대로 남긴 채 입구는 다시 콘크리트로 봉쇄되었다.] 

 

 

 

또 다른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안내물과 함께 오영호 시인의 추모시조가 새겨져 있었다.

 

[다랑쉬굴은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길이 30m인 용암동굴이다. 이곳은 4.3사건으로 피신해 있던 지역주민 11명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현장으로 1992년 발견 당시 유골과 당시 동굴 내부에서 쓰였던 항아리, 가마솥, 질그릇, 물허벅, 요강 등의 생활용품과 낫, 곡괭이, 도끼 등의 농기구가 같이 발견되었다.

다랑쉬오름

                        시 : 오영호(제주시조문학회)

비자림과 용눈이오름 높은오름 거느리고

사철 들꽃들을 가슴에 키워 큰항아리에 담고 앉아

불쌍한 열한 분 영혼 앞에

늘 헌화하고 있구나.]

 

덤불로 가득 덮인 가운데로 굴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 뚜렷이 나 있었지만, 안내판에 안쪽을 콘크리트로 막아놓았다고 하니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기는 하였지만, 입구에 큰 바위 무더기가 내려앉아 들어갈 수가 없게 만들어 놓은 모습만 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또다른 안내판에는 굴 내부의 모양과 희생자들 시신 및, 유물들이 있었던 위치가 그림으로 상세하게 안내되어 있었다.

 

당시의 참담하고 가슴 아팠던 사연을 되새겨보다가 발길을 돌려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을 돌리니 당시의 아픔을 알고 있는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가 다랑쉬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전에 다랑쉬오름에 올랐을 때 지었던 시가 생각나서 블로그를 열어서 다시 읽어보았다. 읽으면서 당시의 비극을 떠올려 보니, 내가 겪은 일은 아니지만 제주섬의 가까운 옛날의 비극이기에 가슴이 먹먹하였다.

 

          다랑쉬 오름에 올라

 

                                    꿈꾸는 아이 한천민

 

얼마나 험한 세월이었던가!

오름에 오르는 것이 이리도 험한데

아이야,

지나간 그 세월은 어찌 견디었느냐?

그래, 견디지 못해

너는 오름 기슭에 누워 쉬는구나

억새 우거진 그곳에는

네 소꿉놀이 사금파리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 위로

한가롭게 들리는 트랙터 소리

총성이 무서워

총소리만큼 큰 소리로 울고

아버지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는

눈물이 말라 가슴으로만 울던

아이야,

이젠 울지 말아라

네 아픔을

대신 아파하는 이들이

네 가슴으로 울고 있으니…….

 

해가 뜬다

다랑쉬 위에 걸렸던 그믐달이

일출봉 위로

해가 되어 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