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韓)씨이다.
난 한씨 성으로 태어난 것이 참 좋다. 우리나라 이름이 大韓民國인데, 韓씨는 바로 우리나라 이름이기도 하며, 또한 한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姓氏 가운데 하나다.
족보를 말하면 나는 시조로부터 33세손이고, 제주도에 우리 조상이 入島한 것으로 세어보면 入島 23세손이 된다.
지금까지 50년이 넘는 세월을 이곳 제주에서 살았지만 부끄럽게도 난 濟州 入島祖의 묘역에 가 보지 못했었다. 오히려 멀리 淸州에 있는 始祖의 묘역에는 가보았었다. 入島祖의 묘역이 표선면 가시리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조차도 모르고 지냈었다.
그러다가 가시리 아랫마을인 가마리(세화2리)의 가마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 入島祖 묘역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어느 날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찾아갔다.
묘역은 가시리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 중심부의 삼거리에서 정석항공로 방향인 북쪽으로 약 300m를 올라가면 도로 서쪽 편에 [恕齊韓公蕆墓域]이라 새긴 큰 돌비가 세워져 있고, 거기서 안쪽으로 100m를 가면 넓은 묘역이 있다. 묘역은 후손들이 잘 가꾸고 돌보는 관계로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으며, 주변은 여러 종의 나무들을 심어 묘역을 아늑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묘역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묘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다.
『가시리 설오름 청주 한씨 방묘 / 제주특별자치도지정 기념물 제60-2호 /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 이 분묘는 판석으로 석곽을 조성한 후 봉분을 방형으로 마무리 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방형석곽묘 양식이다. 이러한 형태로는 도내에 화북동의 성주 고봉례 추정묘, 하원동 탐라왕자묘, 김녕리 광산김씨묘 등이 있다. 특히 이곳 청주한씨 방묘는 봉분의 일부분을 보수하기는 하였으나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제주도의 묘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묘역에 들어서면 좌우로는 동자석이 서로 마주보게 세워져 있고, 가운데에는 석등이 세워져 있다.
묘역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서, 아래쪽에는 入島祖인 恕齊公의 후손 중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낸 계로(繼老)와 그 분의 배필이신 남평문씨(南平文氏)의 묘가 있고, 위쪽에는 서제공(恕齊公)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소위장군의 묘 앞에는 옛날 세워진 비석과 근래 들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으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비의 앞면>『昭威將軍韓公繼老/配淑人南平文氏 祔右 之墓(소위장군한공계로/배숙인남평문씨 합우 지묘) / 昭威將軍義興衛前副司直韓繼老之墓(소위장군의흥위전부사직한계로지묘)』
<비의 뒷면> 『公의 姓은 韓氏요 諱는 繼老, 本貫은 淸州이시다. 始祖 韓蘭은 高麗 太祖를 保佐하여 開國功臣으로 벼슬이 太尉에 이르렀고, 諡号를 威襄이라 하시었으며, 그 以後 代代로 國家에 功勳을 남겨 國乘家牒에 記錄되어 世傳되고 있고, 公은 그의 十五世孫이시다. 高祖諱蕆은 号를 恕齊라 하셨는데, 高麗末葉에 藝文館大提學으로 國破君亡하자 ?事二姓하여 濟州에 流配되어 仍居하시었다. 曾祖는 南隱諱沫 祖는 諱權, 考는 諱南寶로 遺訓을 世守하여 李朝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했으며, 妣는 耽羅高氏諱進公의 따님이시다. 公은 世宗 二十三年 辛酉에 生하여 昭威將軍義興衛副司直으로 남다른 德義와 才能과 度量이 있어 많은 사람을 濟度하였다고 古老들이 오늘까지 相傳해오고 있다. 配位는 南平文氏인데 一子를 生하니 ?厚通訓大夫忠武衛와 五孫을 두니 鶴嘉善大夫 鳳忠?校尉 鴻修義副尉 鵬?은 無後, 曾玄孫 以下는 不記하다. 墓는 旌義縣 西加時岳 壬原에 雙墳으로 公은 左便 配는 右便이다. 墳形은 鍊石方築인바 이는 當時 鄕制이다. 옛부터 墓碑가 있었는데 四百年 歲月이 흐르는 동안 刓缺되어 解讀이 어렵게 되자 高宗庚辰年에 更?하였고 隆熙戊戌年에 다시 重竪하면서 事績을 明記한바 있으나 그 後 近 百年이 되어 文字를 解讀하기 어려움으로 이제 다시 宗議에 따라 新碑를 세우고 先祖의 높은 遺德을 追慕하면서 이를 千秋萬代에 傳하고저 하다.
西紀 一九九六年 丙子 二月 日 公의 十七代後孫 大燮(威德)重改竪』
서제공(恕齊公)의 묘 앞 한 단 아래에는 공덕비와 석등이 세워져 있다.
공덕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崇祖愛德의 念 功績碑
一九九四年 甲戌 十二月 十二日 巢乙岳에서 加時里 家族墓苑으로 遷移하고 ?墓?石을 築成했으며, 碑와 石儀로 修治山한 功績은 우리들 後代에 永遠히 龜鑑이 될 것이다.
(기명 생략)
西紀 一九九六年 丙子 二月 日 淸州韓氏濟州門中會』
공의 묘는 대리석으로 네모나게 만든 커다란 방묘이며, 묘 오른쪽 편에는 거북 받침의 큰 대리석 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始祖大王 箕聖께서 朝鮮國을 創建하시고 準王은 南下하여 韓國을 세우시니 古代王室에서 起源한 吾韓은 悠久한 歷史와 深遠한 傳統을 萬世一系로 繼承해 온 東方 最古의 甲族이다. 高麗가 隆興할 때 始祖威襄公 諱蘭은 高麗 建國에 앞장서서 三韓을 統合하고 高麗壁上開國功臣으로 벼슬이 壁上三韓三重大匡太衛(正一品)에 오르시니 恕齊公은 그의 十一世 嗣孫이시다. 高祖이신 文惠公 諱康은 若冠 十六歲에 國子監試에 壯元及第하여 匡靖大夫都僉議中賛으로 致仕할 때까지 一世의 名相으로 이름이 높으셨고, 元나라에 벼슬하여 高陽侯亞中大夫로 追封되고 歸國하여 寶問閣大提學知制誥를 지내신 提學公 諱謝奇는 曾祖이시다. 右政丞上黨府院 君宣力佐理功臣으로 鐵券을 下賜받고 忠惠廟庭에 配享한 思肅公 諱涯(屋?)은 公의 祖父이시다. 考僉議公 諱大淳은 惟忠協贊功臣匡靖大夫(正一品)이며 벼슬이 知都僉議司事에 이르렀고, 妣 天安全氏는 同知密直進賢館大提學 全信의 따님이시다. 공은 麗末 韓門의 宗孫으로 家統을 承繼하고 일찌기 登第하여 恭愍 十四年 十月 典理判書로 國家考試에 試官이 되어 九十六人의 人材를 選拔登用하였고, 同 十四年 慶尙道 都巡門使, 恭讓 三年 判開城府事를 거쳐 藝文館大提學侍中이 되시다. 高麗史 曰 「恭讓 四年七月王遜于原州斬丹陽君禹成範晋原君姜淮季流大提學韓蕆等于外」麗末 風雲이 危急을 告할 때 公은 圃隱 鄭夢周 丹陽君 禹成範 晋原君 姜淮季 忠簡公 諱理 等과 함께 李成桂의 武力革命野慾을 遮斷하고 麗朝를 中興하려 했으나 五百年 高麗 社稷이 무너지고 濟州에 落鄕하셨다. 新王朝에서 높은 벼슬로 公을 招聘했으나 이를 拒絶하고 落鄕地 濟州에서 訓民施德으로 余生을 마치시다. 높은 學德을 思慕하여 雲集한 弟子들로 可時里 設村이 되고 全島에 學問의 씨를 뿌렸다. 配位이신 先山金氏는 匡靖大夫政當文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을 지내신 章榮公 諱稹(?)의 따님이시며 二子를 生하니 長男은 南隱公 諱沫, 次男은 諱濟이다. 最後까지 愛國으로 一貫한 護國精神과 次臣代君 그 不正不義를 容納하지 아니한 大義思想은 後孫들이 遺訓으로 世守하여 李朝의 官途에는 나아가지 아니했다. 加時村 中央에 遺墟地가 있고 學堂 點堂 射場 等 地名이 尙今 世傳되고 있으며, 忠義祠에서 歲一祀를 봉행하고 있다. 巢乙岳 南쪽 기슭에 公께서 永眠한 高麗式 方墓를 옛부터 守護(二十代 後孫 學道修靖立碑)하던 中 甲戌年에 後孫들이 모여 이곳 家族墓苑으로 移葬 聖域化하여 公의 遺德을 千秋萬代에 빛내고저 하다.
生 一三三○年 庚午 高麗 忠肅王 十七年 開城府 西良醞洞
卒 一四○三年 癸未 朝鮮 太宗 三年 南濟州郡 表善面 加時里
西紀 一九九六年 丙子 二月 日
十九代孫 于澤 謹誌
淸州韓氏 濟州門中會長 在源 政竪』
묘역 위쪽으로 올라서서 내려다보니 넓은 공의 묘는 정남방을 향하고 있었고, 묘역 앞으로는 넓게 트여 있었다.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위쪽으로 멀리 가세오름과 매오름이 바라다보이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들이 쏜 로켓 (0) | 2011.03.31 |
---|---|
우리 집 새 식구 [꾸리] (0) | 2011.03.30 |
둘째 아이의 졸업 연주회 (0) | 2010.11.08 |
미악산의 행글라이딩 (0) | 2010.09.05 |
스승의 날 아이들과 함께 걸은 가마올레길 (0) | 2010.05.24 |